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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사무엘하] 12장 책망과 회개(悔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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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168회 작성일 2024-09-29 1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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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왕을 책망하는 나단 선지자>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1)

 

  다윗은 신하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취하였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일이고, 큰 죄인데 다윗은 지금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어느 누구도 다윗의 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는데, 용감하게 나서서 다윗을 깨우쳐 준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나단이지요. 

 

 그가 다윗에게 간 것은 하나님이 보내셔서 간 것이지만, 솔직히 다윗 왕의 노여움을 사서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성경을 읽어보면, 수많은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왕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했는데,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목숨을 걸고 가서 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마치 이슬람권 나라에 가서 복음을 증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그런데 이 나단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왕 앞에 나가서 담대하게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도 순서가 있어서, 아주 슬기롭게 다윗이 스스로 자기 잘못을 깨우치게 합니다. 어떻게 합니까?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1b-4)

 

 나단은 짧은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느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 일어난 아주 불합리하고 악한 일에 대해서 왕으로서 당신은 어떻게 판결하고 처리하겠는지 묻는 것입니다. 부자에게 아주 많은 양과 소가 많아서 언제든지 자기 가축을 잡아 먹고 잔치를 할 수 있는데, 부자에게 손님이 오자, 자기 가축들은 아끼고, 가난한 자의 양 한마리를 빼앗아서 죽이고 손님을 대접했다고 가정하지요.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가 자기의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그 부자는 정말 악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5)

 

 다윗은 그런 부자는 죽어도 마땅하다면서 분노합니다. 솔직히 양 한 마리를 잡아 죽인 것이 무슨 사람을 죽일 만큼 큰 죄일까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에도 분노하고 죽여 마땅하다고 다윗은 말합니다. 

 

 우리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의 잘못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가지만, 다른 사람의 작은 잘못은 아주 크게 화를 내면서,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떠들고, 정죄하고 심판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속에 있는 이중성, 이중 잣대로써, 어떤 신학자는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죄성이라고 단언합니다.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6)

 

 다윗이 처음에는 죽일 자라고 했지만, 나름 율법에 나와 있는 대로 공명정대하게 양은 4배로 갚으라고 판결하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면, 소를 훔쳤으면, 5마리로 갚고, 양을 훔치면 4배로 갚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만약 그 훔친 소나 양이 살아있으면 갑절로, 즉 2마리로 갚으면 되지만, 장물로 팔았거나 잡아 먹어서 다시 주인에게 돌려줄 수 없게 되면 그렇게 갚아야 합니다. 다윗이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7-9)

 

 “당신이 바로 그 부자다!” 나단이 다윗의 잘못은 정확하게 짚어줍니다. 비유로 이런 이야기를 만든 것은 다윗이 스스로 자기 잘못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다윗의 범죄가 여호와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면서, 그런 죄를 지은 것은 대놓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죄를 지으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아실까? 아마 모르실 거야.’ 은근히 이런 마음을 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사울 대신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을 때,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셨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은 다윗을 살려 주셨는데, 다윗은 자기 충신인 우리아를 죽여 버리지를 않나, 그 아내를 빼앗지 않나. 다윗에게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있었는데요. 아내가 여러 명, 후궁들은 10명 이상. 

 

 일반 대중들은 한 명인데, 그리고 오늘날 보면, 결혼도 못하고 노총각으로 늙어 죽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인데, 다윗이 자기 아내들에게 만족을 못하고 남의 여자에게 음욕을 품습니까? 그래서, 부자가 더 욕심이 많고, 바람 피는 사람들이 계속 더 바람을 핍니다. 이것이 바로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시를 짓고 노래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서 성전까지 지으려 했던 다윗이 이렇게 쉽게 무너졌다면,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너무 많은 것을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쉽게 하나님을 배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쩌면, 하나님 곁을 떠나지 않고 말씀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가난’이나 ‘질병’이나 연약함을 우리에게 주시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이 잘 나가고 부유해 지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죄에 빠져 살기 쉽상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잘 되거나 부요할 때, 죄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있거나 연약할 때, 항상 긴장하고, 말씀을 붙잡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다윗은 은밀하게 이 일들을 진행시켰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해 세상 만 천하에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하고 남겨서 오고 오는 세대에 부끄럽고 씻을 수 없는 치욕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10-12)

 

 이제 하나님의 판결이 떨어집니다. 다윗의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이고, 다윗의 아내들이 다른 사람과 동침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 배나 그 죄 값을 치르게 하십니다. 다만, 다윗은 죽이지 않고 살려 주십니다. 살아서 빼앗기는 심정을, 그 고통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살인자는 죽이게 되어 있지만, 그동안 하나님께 잘한 일도 있고 해서 정상참작(情狀參酌)이 된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판결을 듣고, 순순히 자기 잘못을 인정합니다. 다윗의 위대한 점이 여기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 죄를 감추려고만 하지 순순히 인정하거나 자복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죄를 드러나게 하려 하면, 어떻게든 감추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다윗은 나단을 죽여서 자기 잘못을 덮으려거나 자기 죄를 부인(否認)하지 않고 시인(是認)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이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으니 당신이 낳은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이다 하고” (13-14)

 

 다윗이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그대로 수용하고 하나님께 범죄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도 본받아야 할 자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지만, 죄를 지적할 때, 인정하고 잘못했다고 해야 우리가 용서받을 길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범죄했지만, 하나님은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다만, 죄과는 남아서 계속해서 다윗에게 고통을 줄 것입니다. 이 다윗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용서를 받았고, 죽지 않습니다. 다만, 죄가 있기에 죄로 인해서 죄의 열매 때문에 고통이 남게 됩니다. 

 

 죄는 다윗이 지었는데, 죽는 것은 밧세바와 다윗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죽습니다. 다윗이 이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금식하면서 기도하지만 돌이킬 수 없습니다. 

 

 “나단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아의 아내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를 여호와께서 치시매 심히 앓는지라.” (15)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이 이해가 도무지 안 될 것입니다. 다윗인들 이해가 되겠습니까? 살인하고 간음한 것은 자신인데, 왜 아들이 병들어 죽는냐 말입니다. 하나님은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분인데, 죄 지은 놈이 죽는 게 아니고 왜 엉뚱한 사람이 죽어야 하는가? 

 

 여기에 유비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해서, 죽어야 하는데, 왜 예수님이 죽으셔야 합니까? 그렇다고 우리들이 ‘우리가 죄를 지었으니까 우리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시고 예수님은 살려 주세요!’ 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지금  다윗도 그렇게 기도하고 있지는 않지 않습니까? 

 

 우리도 할 말이 없고, 다윗도 할 말이 없습니다. 죄인들은 할 말이 없을 뿐입니다.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다윗이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그 집의 늙은 자들이 그 곁에 서서 다윗을 땅에서 일으키려 하되 왕이 듣지 아니하고 그들과 더불어 먹지도 아니하더라. 이레 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그러나 다윗의 신하들이 아이가 죽은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두려워하니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아이가 살았을 때에 우리가 그에게 말하여도 왕이 그 말을 듣지 아니하셨나니 어떻게 그 아이가 죽은 것을 그에게 아뢸 수 있으랴 왕이 상심하시리로다 함이라.” (16-18)

 

 다윗의 아들은 7일 만에 죽었고, 다윗은 7일 동안 금식을 했지만 아이의 죽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한편, 신하들은 다윗에게 아이가 죽었다고 보고하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죽었다고 하면, 왕이 더 크게 상심해서 정사를 돌보실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할까 염려했지요. 신하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다윗이 금새 알아차립니다. 

 

 “다윗이 그의 신하들이 서로 수군거리는 것을 보고 그 아이가 죽은 줄을 다윗이 깨닫고 그의 신하들에게 묻되 아이가 죽었느냐 하니 대답하되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19-20)

 

 아이가 죽었다니까, 다윗이 옷을 갈아입고, 성막 앞에 가서 제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금식을 마치고 식사를 합니다. 아마 신하들은 아이를 위해서 크게 곡하면서 장례를 치르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뜻밖의 일을 다윗이 하니까 묻지요.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는 그를 위하여 금식하고 우시더니 죽은 후에는 일어나서 잡수시니 이 일이 어찌 됨이니이까 하니, 이르되 아이가 살았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혹시 여호와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사 아이를 살려 주실는지 누가 알까 생각함이거니와 지금은 죽었으니 내가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21-23)

 

 ‘이제 아이가 죽었으니, 음부에 가서 다시 만나면 모를까 이생에서는 다시는 못 보니까 이제 산 사람은 살아야 되지 않겠나!’ 하면서 다윗이 일상으로 돌아오지요.

 

 우리 성도들도 죽은 사람은 이제 다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 땅에서 삶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유교나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는 3년 상을 치르던지 말던지, 우리 기독교는 내세가 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마무리할 수는 없지요. 우리 각자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다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너무 그렇게 애달프게 생각하지 말고, 고인의 좋은 점은 본받고, 나쁜 점은 버리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의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24-25)

 

 사실, 자녀를 잃을 때가 가장 마음 아프고 상처를 받는 것은 그 어미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위로하고 더 사랑해 줍니다. 어떻게 그렇게 금방 임신을 하는지…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을 하셨지만, 또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것을 봅니다.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26-31)

 

 다윗은 2년이 넘게 암몬과 싸웠던 전쟁에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다윗이 왕궁을 거닐면서 한가롭게 지내지 않고, 전장에 나가서 싸웠다면, 이렇게 범죄하고 실수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승리도 금방 가져왔을 텐데, 아쉬움이 남습니다. 어째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승리를 주시고, 온갖 전리품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우리들이 지금 늘 여유가 없고, 결핍과 부족함 속에서 사는 것이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윗처럼 간음하고 살인은 저지르지 않을 지 모르지만,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죄를 범할 수 있음을 알고, 늘 말씀과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족한 물질과 바쁜 나날 속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손을 펴고, 감사와 기도로 슬기롭게 거룩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다윗을 깨우쳐 주심을 봅니다. 때로는 저희들도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시고, 다윗과 같은 큰 죄를 범하지 않더라도, 작은 나태와 게으름으로 인해서 점점 큰 죄악을 향해 나아가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어쩌면 우리에게 부족하고 연약함이 주님의 은혜일지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주님을 의뢰하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화평과 거룩함으로 성도다운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감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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