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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사무엘하] 14장 압살롬의 귀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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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37회 작성일 2024-10-13 11:5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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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 줄 알고” (1)

 

 

 암논이 죽고 한 3년 지났습니다. 일반 백성들도 자기 살기에 바빠지면, 관심이 아무래도 좀 덜하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점점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은 다윗의 오른팔이자 조카입니다(대상2:16). 아마 다윗이 말째이기 때문에 나이가 그리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조카이고 어쩌면 요압이 다윗보다 나이가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왕 곁에서 요압이 보니까, 자꾸 다윗이 압살롬을 그리워하는 것이 보입니다. 어차피 맏이는 죽었고, 그 다음이 압살롬인데, 키와 용모가 출중하고 암논을 죽인 것 빼고는 그리 흠잡을 만한 데가 없는 자식입니다. 

 

 “드고아에 사람을 보내 거기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중략… 왕께 들어가서 그에게 이러이러하게 말하라고 요압이 그의 입에 할 말을 넣어 주니라.” (2-3) 

 

 요압이 드고아에서 한 여배우를 섭외하여서 연극을 하게 합니다. 모든 연출과 시나리오, 감독까지 요압이 합니다. 설정은 이렇습니다.  남편이 죽은 드고아의 과부로서, 이 과부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가 싸우다가 그만 형이 동생을 죽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친척들이 첫째도 죽여 마땅하다고 과부에게 남은 아들의 목숨도 요구하여 왕에게 그 아들의 생명을 지켜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다윗의 암논과 압살롬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인데, 꼭 들어맞지는 않지만 다윗이 압살롬을 살리고 싶어하는 그 마음을 울리게 합니다.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뢸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이르되 왕이여 도우소서 하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라 대답하되 나는 진정으로 과부니이다 남편은 죽고, 이 여종에게 아들 둘이 있더니 그들이 들에서 싸우나 그들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쳐죽인지라. 온 족속이 일어나서 당신의 여종 나를 핍박하여 말하기를 그의 동생을 쳐죽인 자를 내놓으라 우리가 그의 동생 죽인 죄를 갚아 그를 죽여 상속자 될 것까지 끊겠노라 하오니 그러한즉 그들이 내게 남아 있는 숯불을 꺼서 내 남편의 이름과 씨를 세상에 남겨두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 (4-7)

 

 이 모든 드라마를 요압이 만들었는데, 참 지혜롭습니다. 다윗이 드고아 여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게 했고,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줄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갑니다. 싸움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문학적인 실력과 성경적인 지식도 상당히 해박합니다. 

 

 형제살인의 모티브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동생을 질투하는 형이 들판에서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무기를 가지고 동생을 죽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당시 단 두 아들 뿐이었는데, 물론 후사로 ‘셋’을 주시지만, 그 당시에는 가인도 죽어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죄인인 가인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어떤 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다른 땅에 가서 성을 쌓고 살게 되지요. 

 

 다윗도 율법을 지키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살인자 압살롬을 심판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던 것처럼, 용서할 수 있도록, 다른 후사가 없음을 이유로 사면을 할 수 있게 유도합니다. 이 모든 것은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는 요압의 계획입니다. 다윗 왕에게는 다른 아들들이 있지만, 당시에 다윗의 마음에는 후계자로 압살롬을 염두해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요압은 압살롬을 데려오면 훗날 만약 압살롬이 왕위를 잇게 되었을 때에 큰 공로를 인정받을 것이란 계산도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왕이 여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명령을 내리리라 하는지라.”  (8)

 

 다윗 왕이 이 연극을 보고, 드고아 여인의 살인범 아들을 죽이지 말라는 사면 명령을 내립니다. 드고아 여인이 진짜 그런 과부였다면, 왕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사면장을 받고 가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제부터 본격적인 요압의 핵심 요구사항을 왕께 전달합니다.  

 

 “드고아 여인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이여 그 죄는 나와 내 아버지의 집으로 돌릴 것이니 왕과 왕위는 허물이 없으리이다.” (9)

 

 갑자기 여인이 살인죄는 자기와 자기 아버지 가문의 죄로 돌리라고 합니다. 번역이 참 어렵습니다. 의역을 하자면, 드고아 여인이 책임을 뒤집어 쓰고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왕이 선처했을 때, 백성들의 입장에서 왕의 판결이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고 말하는 왕의 잘못된 판결, 허물을 말합니다. 일반 백성들이나 친척들에게 욕먹는 것은 자기 책임이고, 용서를 베푼 다윗 왕과 왕의 권위에는 조금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왕이 이르되 누구든지 네게 말하는 자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가 다시는 너를 건드리지도 못하리라 하니라.” (10)

 

 다윗이 재차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져 주겠다고 합니다. 혹시 시비거는 친척이나 이웃들이 있으면 자기에게로 데려오라고 합니다. 다윗은 여인과 그 아들도 지켜 주겠다고 합니다.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왕은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사 원수 갚는 자가 더 죽이지 못하게 하옵소서 내 아들을 죽일까 두렵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 아들의 머리카락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11)

 

 이 드고아의 여인은 얼마나 연기를 잘 했던지,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윗 왕의 이야기임을 다른 질문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여인이 이르되 청하건대 당신의 여종을 용납하여 한 말씀을 내 주 왕께 여쭙게 하옵소서 하니 그가 이르되 말하라 하니라. 여인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왕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하여 이같은 생각을 하셨나이까 이 말씀을 하심으로 왕께서 죄 있는 사람 같이 되심은 그 내쫓긴 자를 왕께서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2-13)

 

 드고아의 여인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내쫓긴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냅니다. 자기의 아들에 대해서는 사면(赦免)을 하시지만, 압살롬은 왜 용서해 주시 않냐는 것이지요.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아들을 죽이려는 백성들은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다윗도 백성들처럼 압살롬을 데려오지 않고 있는 것이 백성들의 생각과 같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이제 내가 와서 내 주 왕께 이 말씀을 여쭙는 것은 백성들이 나를 두렵게 하므로 당신의 여종이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왕께 여쭈오면 혹시 종이 청하는 것을 왕께서 시행하실 것이라.” (14-15)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도 가인이 살 수 있도록 하셨듯이 다윗 왕도 어떤 조치를 취해서 압살롬을 살려야 하지 않겠냐는 뜻입니다. 드고아의 요청은 압살롬을 용서하고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왕께서 들으시고 나와 내 아들을 함께 하나님의 기업에서 끊을 자의 손으로부터 주의 종을 구원하시리라 함이니이다. 당신의 여종이 또 스스로 말하기를 내 주 왕의 말씀이 나의 위로가 되기를 원한다 하였사오니 이는 내 주 왕께서 하나님의 사자 같이 선과 악을 분간하심이니이다 원하건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과 같이 계시옵소서.” (16-17)

 

 드고아 여인은 자신의 생각과 뜻이 모든 일반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마음이고, 분명히 다윗 왕은 좋은 판결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했고, 자신의 연극에 대해서도 그렇게 다윗이 판결했기 때문에 압살롬에 대해서도 선한 판결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여인이 다윗 왕을 축복합니다. 

 

 이제서야 다윗은 이 연극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분명 이렇게 이야기를 꾸민 사람이 있음을 눈치챕니다. 그리고 심중에 떠오르는 사람이 ‘요압’이지요. 

 

 “왕이 그 여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바라노니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내게 숨기지 말라 여인이 이르되 내 주 왕은 말씀하옵소서. 왕이 이르되 이 모든 일에 요압이 너와 함께 하였느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 왕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내 주 왕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옮길 자가 없으리이다 왕의 종 요압이 내게 명령하였고 그가 이 모든 말을 왕의 여종의 입에 넣어 주었사오니” (18-19)

 

 왕 앞에서 드고아 여인이 거짓을 말했다가는 노여움을 사서 죽을 수 있기에, 이 모든 일은 요압이 시킨 일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다윗이 권위가 있으니까, 계속해서 거짓말을 지어내서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는 왕의 종 요압이 이 일의 형편을 바꾸려 하여 이렇게 함이니이다 내 주 왕의 지혜는 하나님의 사자의 지혜와 같아서 땅에 있는 일을 다 아시나이다 하니라.” (20)

 

 역시 예상대로 요압이 꾸민 일이지요. 그래서 다윗도 압살롬의 귀환을 허락합니다. 

 

 “왕이 요압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허락하였으니 가서 청년 압살롬을 데려오라 하니라.” (21)

 

 그래서 요압이 압살롬을 데려 오지만,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잘못했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마치 자신의 할 일을 한 것처럼 당당하게 나오니까, 한편으로는 보고 싶었던 다윗의 마음이 분노와 미움으로 바뀌어 다시는 꼴도 보기 싫은 감정을 드러냅니다.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요압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왕이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입은 줄을 오늘 아나이다 하고, 요압이 일어나 그술로 가서 압살롬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오니 왕이 이르되 그를 그의 집으로 물러가게 하여 내 얼굴을 볼 수 없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 (22-24)

 

 다윗이 압살롬을 용서했지만, 화목(和睦)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들도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죄용서함을 받았지만, 화목을 이루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만약, 압살롬이 아버지께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고, 달라진 모습을 보였다면 화목을 이뤘을지도 모릅니다. 압살롬도 감정적으로 아버지께 대한 반감이 남아 있습니다. 동생 다말의 일에 대해서 어떠한 처벌도 암논에게 내리지 않았고, 다말의 상처를 보듬어 주지도 않았습니다. 가족 간에 이런 감정의 골이 깊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깊이 알고 생각해야 합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머리털이 무거우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의 머리 털을 깎을 때에 그것을 달아본즉 그의 머리털이 왕의 저울로 이백 세겔이었더라.” (25-26)

 

 이스라엘 백성들도 왕자 압살롬에 대해서 더 이상 크게 문제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중요시 하지요. 그래서 압살롬이 큰 잘못이 있어도 ‘저렇게 아름다운 왕자가 오죽했으면 형을 죽였겠나!’ 하면서 압살롬을 동정하고 편을 들어 줍니다. 압살롬은 풍성한 머리숱과 수려한 외모를 갖고, 결혼도 잘 했고, 자식도 많이 두었습니다.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27)

 

 압살롬의 딸 이름도 다말로 지었네요. 여동생 이름도 다말인데, 이 다말이란 이름이 흔한 이름같습니다. 나중에 압살롬이 쿠테타를 일으키는데, 자신을 위해서 기념비를 세웠는데, 아들이 없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에 아들 셋이 잘못된 것인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 다 요절(夭折)을 해서, 장성한 자식이 없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여기까지 읽으면 압살롬의 가정이 아들, 딸이 있는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압살롬이 이태 동안 예루살렘에 있으되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압살롬이 요압을 왕께 보내려 하여 압살롬이 요압에게 사람을 보내 부르되 그에게 오지 아니하고 또 다시 그에게 보내되 오지 아니하는지라.” (28-29)

 

 압살롬이 예루살렘에는 돌아왔지만, 아버지와는 2년 동안 계속 교류가 없습니다. 다윗 왕이 부르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을 그술 땅에서 돌아오게 도와 준 요압에게 종들을 보내는데, 어찌된 일인지 요압도 압살롬을 멀리합니다. 아마 다윗의 심기가 계속 불편해서 요압도 더 이상 압살롬에 대해 언급했다가는 자신만 손해가 될까 싶어서 거리를 두는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자기의 종들에게 이르되 보라 요압의 밭이 내 밭 근처에 있고 거기 보리가 있으니 가서 불을 지르라 하니라 압살롬의 종들이 그 밭에 불을 질렀더니, 요압이 일어나 압살롬의 집으로 가서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 종들이 내 밭에 불을 질렀느냐 하니 압살롬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일찍이 사람을 네게 보내 너를 이리로 오라고 청한 것은 내가 너를 왕께 보내 아뢰게 하기를 어찌하여 내가 그술에서 돌아오게 되었나이까 이 때까지 거기에 있는 것이 내게 나았으리이다 하려 함이로라 이제는 네가 나로 하여금 왕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하라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옳으니라 하는지라.” (30-32)

 

 요압이 자신을 외면하자 압살롬은 종을 시켜 요압 밭에 불을 지릅니다. 그래서 요압이 압살롬을 찾아오지요. 압살롬은 왜 자신을 예루살렘에 돌아오게 했는지 따집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뵙지 못하는 것은 그곳에 있으나 여기 있으나 마찬가지 아니냐 하면서, 내가 죄가 있으면 그 죄값을 치르겠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요압이 다시 한번 중재를 해서 다윗 왕과 압살롬이 만나게 되지요. 

 

 “요압이 왕께 나아가서 그에게 아뢰매 왕이 압살롬을 부르니 그가 왕께 나아가 그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어 그에게 절하매 왕이 압살롬과 입을 맞추니라.” (33)

 

 그래서 5년 만에 압살롬이 다윗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압살롬이 아버지를 보니까 이제는 연약한 늙은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다른 마음을 품게 됩니다.  

 

 다윗의 범죄로 시작된 집안의 문제들은 점점 더 재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자식을 용서하고 사랑할 마음이 있지만, 또 회개하지 않고 죄를 짓지 않도록 말려줄 사람이 없으니, 부모의 뜻과는 어긋나서 성폭행을 하고, 여동생을 버리고, 또 이복 형제를 죽이는 끔찍한 죄악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언제나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게으름과 나태함에 빠져 있으면 언제든지, 우리 속의 죄성이 우리가 죄악을 범하도록 이끕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매여 있어야 범죄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죄가 한 가정에 들어와 관계를 파괴시키고, 고통과 미움과 증오로 가득한 세상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도 늘 말씀을 붙잡고, 성령님께 우리의 모든 일들을 의탁해야 할 것입니다. 항상 우리들은 서로에게 중보하며 거룩한 공동체가 되도록 사랑의 교제 속에서 권면하고 선한 사역에 힘쓰는 아름다운 교회로써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다윗도 말려 주고 붙들어 주는 사람이 없었을 때, 범죄했고, 암논도 사악한 친구의 속삭임에 넘어갔습니다. 우리 내면의 죄성이 우리를 죄악으로 끌고 갈 때,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 주시고,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우리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인간적인 꾀와 방법으로 요압이 암논을 죽인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왔지만,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의롭게 여긴 압살롬의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같이 항상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서할 마음이 계시지만, 우리가 언제나 교만하여 ‘화’를 자초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하시고, 성령께서 도우사 진실한 회개로 아버지의 마음을 얻어 참 화목을 이루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거룩한 백성되게 하시고, 죄악으로 치닫는 이 세상에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기도와 말씀으로 진리로 바르게 인도하는 주님의 동역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늘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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