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는 다윗 >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1)
압살롬의 반역에 아주 얄팍한 수를 쓰는 악인이 나타납니다. 바로 ‘시바’이지요. 그는 사울의 종으로 있다가, 그 가문이 거의 멸절 지경에 이르니, 그 재산을 거의 독식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왕위에 올라 요나단과의 언약을 생각해서 사울의 재산과 종들을 므비보셋에게 돌려 주게 됩니다. 그때 가장 억울하게(?) 생각한 사람이 바로 ‘시바’이지요. 이 시바가 다윗에게 므비보셋에 대해 악평을 하고 이간질을 해서 그의 재산을 다시 빼앗으려고 합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2)
시바는 다윗이 곤경에 처하자 당장 필요한 먹을 것과 짐을 나를 나귀를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사실, 빵 200개, 건포도 100송이, 여름 과일 백 개, 포도주 한 가죽부대는 그리 많은 양은 아닙니다. 우리 개인으로 볼 때는 정말 엄청난 양을 가져온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은 가족과 피난하는 신하들만 600명이 넘습니다. 다윗 앞에 잇대와 그의 군사들만 600명이고 사실 다윗과 함께 피난을 하는 신하들의 이름이나 숫자는 별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적어도 1천 명 이상이 이동했을 것으로 봅니다. 천 명의 사람들에게 빵 200개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간에 기별도 안 갈 음식이지요. 그런 작은 분량의 음식을 가지고 시바는 다윗의 환심을 하려고 합니다. 다윗 왕이 사울의 재산을 자기에게서 빼앗아 므비보셋에게 주었으니, 다윗이 므비보셋에게서 빼앗아서 자신에게 줄 수 있음을 안 것입니다. 다윗이 심신이 지쳐 있으니, 당장 그런 음식도 정말 필요하지요. 사실, 이런 음식을 준비해서 가져와야 할 사람은 므비보셋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없고 ‘시바’만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다윗이 묻습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3)
시바는 다윗이 므비보셋에 대해 물어 볼 때, 므비보셋은 은혜도 모르는 아주 악한 사람인 것처럼, 거짓말을 보태서 이간질을 합니다. 므비보셋이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가 물려 받을 기회가 되겠구나!’ 라고 하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아니라 사실 ‘할아버지의 나라’지요 아무튼 시바의 말은 거짓말이지요. 다윗은 그 시바의 말을 확인할 겨를 도 없이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모든 재산은 시바가 갖도록 허락합니다. 이렇게 계략을 꾸민 것이 ‘시바’입니다. 참 영악한 사람이지요.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4)
시바는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사리분별을 못하고 작은 호의에 넘어가는 다윗입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다.’ 하는 말을 우리가 듣지만, 사실 어려운 사람을 더 빼앗고 확인 사살하고, 희롱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다윗이 이렇게 판단력이 흐려지고, 작은 호의에 넘어집니다. 시편을 쓰고, 신실했던 다윗도 이렇게 무너지는데, 하물며 우리같은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항상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귀를 2개를 주셨습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5-7)
다윗이 피난을 갈 때,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요, 사울의 친척 중에 시므이란 사람이 다윗의 일행에 대고, 계속 욕하면서 저주를 퍼붓습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살인자야! 이 불한당 같은 자야! 꺼져! 네가 사울의 집안사람을 다 죽이고, 그의 나라를 차지했지만, 이제 주님께서 그 피값을 모두 너에게 갚으신다! 이제는 주님께서 나라를 너의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겨 주었어. 이런 형벌은 너와 같은 살인자가 받아야 마땅하지!”
심지어는 돌팔매질까지 합니다. ‘시므이’는 왕의 친척이니까 상당히 유지(有志)일 것입니다. 다윗의 좌우에서 경호를 하던 용사들이 이 ‘시므이’를 처단할 지 다윗에게 묻습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니” (9)
아비새 장군이 이 패역한 시므이를 단칼에 죽여 버리겠다고 합니다. 허락해 달라고 하지요. 다윗도 이런 자에게 모독을 당했으니, 왕으로서 엄히 죄를 묻고 즉시 참수(斬首)하고 싶은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여호와께 그렇게 저주하라고 그에게 시킨 것이다 하고 맙니다. 자기 아들도 배반해서 아버지를 죽이려고 하는데 시므이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다윗은 혹시 자기가 이런 모욕을 당하고 자기 죄값을 치르면 혹시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시고, 다시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제자리에 돌아 올 수 있게 되지 않겠는지 생각합니다.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0-12)
다윗이 사리분별을 잘 못하고, 그래도 끝까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믿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복수도 하나님께 달린 일이니까 하나님께 맡깁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윗의 이런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이성이 마비되고 감정이 흥분되어서 너무 고통스럽고 하지만, 끝까지 우리가 놓치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아들의 반역도 자신의 죄 때문인데, 신하가 반역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다윗이 범죄하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시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이렇게 시므이에게 능멸(凌蔑)을 당하지요? 다윗이 시므이를 용서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용서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복음서에도 예수님께서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임금에게 용서를 받고 빚을 탕감받았는데, 100데나리온 빚진 자기 동무를 잡아 감옥에 넣은 것을 보고 임금이 다시 감옥에 빚진 종을 쳐넣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치 그러한 식으로 지금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더라.” (13)
오늘날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지탄(指彈)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성도들보다는 일부 목회자들과 교회 장로들의 문제입니다. 앞으로 상당한 시간동안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이렇게 저렇게 해명하기보다는 이렇게 다윗처럼 묵묵히 그런 비난과 손가락질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당해도 입을 다물고,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고,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했던, 봉사와 섬김과 나눔과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누구를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용서하고 남을 원망하지 않고, 탓하지 않고 다윗처럼 다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왕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피곤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압살롬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이르고 아히도벨도 그와 함께 이른지라.” (14-15)
다윗과 일행도 잠시 쉴 때, 압살롬과 아히도벨은 예루살렘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하게 됩니다.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너무나 쉽게 이스라엘의 수도를 접수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면, 모든 일이 끝납니까? 끝난 것이 아니지요. 수도를 점령했으니 그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압살롬은 군사 아히도벨에게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다윗의 모사 후새가 나타나 압살롬을 환영합니다. 마치 당연히 압살롬이 왕이 되었어야 한다는 듯이 이제 늙은 다윗 대신 자신이 압살롬을 보필하겠노라 엎드려 절합니다.
“다윗의 친구 아렉 사람 후새가 압살롬에게 나갈 때에 그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만세, 왕이여 만세 하니, 압살롬이 후새에게 이르되 이것이 네가 친구를 후대하는 것이냐 네가 어찌하여 네 친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니이다. 또 내가 이제 누구를 섬기리이까 그의 아들이 아니니이까 내가 전에 왕의 아버지를 섬긴 것 같이 왕을 섬기리이다 하니라.” (16-19)
다윗의 모사, 후새라는 사람의 말을 잘 보십시오.
“나는 여호와와 이 백성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에게 속하여 그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압살롬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여호와와 모든 이스라엘의 택한 자가 ‘자기’라고 착각을 합니다. 사실, 후새는 누구편이라는 것입니까? 다윗 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후새의 말을 들으면, 꼭 압살롬은 자기편이고, 압살롬이 여호와께 택함을 받았고, 온 이스라엘도 그렇게 택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른 바, 이중언어 플레이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정치인들의 이런 이중언어 플레이를 잘 인식을 못합니다. 한참 뒤에 당하고 돌아보니까, 그 정치인이 혹은 대통령이 한 말이 이런 뜻이구나 뒤늦게 알아챕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다보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3천 년 전에 있던 일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이뤄지고 있는데,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으니까 오해하고, 착각하고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사기꾼에게 속습니다. 정치인들도 일반 국민도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똑똑해져서 속지 않고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지킬 수 있습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다툽니다만, 중국이 제 아무리 삼국지를 읽고 논어, 맹자, 공자, 손자병법 등 아무리 많은 고전을 들이밀어도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읽는 이스라엘이나 미국에게 항상 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후새란 사람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다윗 편에서 지략을 베푸는 것이 꼭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별명이 ‘만군의 여호와’ 그 어떤 전쟁에서도 절대로 지지 않으시는 능력의 신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지 않으면 결국에는 다 멸망당하고 전쟁에 지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에게 이르되 너는 어떻게 행할 계략을 우리에게 가르치라 하니” (20)
어쨌든, 압살롬은 ‘참모가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더 낫겠지.’ 생각하며, 후새도 전략회의에 참여시킵니다. 그리고 아히도벨에게 이제 수도 예루살렘을 접수했으니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묻습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21)
아히도벨은 후궁이긴 하지만 다윗의 처들을 백주 대낮에 욕보이라고 합니다. 옛날 손녀 밧세바를 범한 다윗에 대한 보복을 지금 실현시키고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도 이런 일을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신 일도 있었습니다. (삼하12:11) 아히도벨은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하지만, 아들인 압살롬은 최소한 패륜(悖倫)을 범하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압살롬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패륜 왕이 되고, 결국에는 자신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자지간의 인연을 완전히 끊고자 아히도벨은 계략을 세웠고, 압살롬도 선을 넘는 짓을 했는데, 이것이 율법을 또한 어긴 일(레18:8)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어떤 왕이 되어야 할 명분도 없어지는 그런 잘못된 결정을 합니다.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 (22)
참,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막장 드라마를 보게 될 줄 몰랐지요?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죄악된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 왕가에 이런 불행하고 창피한 일이 다윗이 남의 아내를 범한 것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윗 뿐이겠습니까? 귀족들이나 부자들 집안에도 얼마나 많은 막장 드라마가 있을까요? 누구도 이런 문제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23)
한 때는 다윗 곁에서 충성스럽게 적을 무찌르는데 기여를 했던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원수가 되어서 다윗의 가슴이 상처를 주는 지 다윗은 시편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시 41: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범죄로 시작한 불륜이 자식을 망치고, 가정을 망치고 아내를 망치고, 친구를 망치는 큰 악으로 번졌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결단하고 죄악의 길에서 떠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다면,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시고, 곁에 신실한 주님의 사람들과 사귀면서, 악을 떠나고 항상 주님을 모시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를 계속 읽고 있습니다. 참 가슴 아픈 일들이 계속 됩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다윗에게 기회를 살펴서 자신의 이득을 챙기려는 시바 같은 사람이 나타나고, 그래서 다윗은 상처를 받습니다.
자신의 친구이자 모사였던 아히도벨은 압살롬을 충동하여서 다윗의 아내들을 간음하는 패륜을 저지르게 하였습니다. 아내도 망치고, 자식도 망가뜨립니다. 이것이 모두 다윗의 범죄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저희들도 다윗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정욕과 탐심에 이끌리어 죄악에 빠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들어 주옵소서!
항상 성령에 이끌리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전도하지 못할지라도, 아내와 남편, 자녀들을 사랑하고 믿음으로 건강하고 바르게 양육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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