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에게 모략을 베푸는 후새 >
“아히도벨이 또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사람 만 이천 명을 택하게 하소서 오늘 밤에 내가 일어나서 다윗의 뒤를 추적하여, 그가 곤하고 힘이 빠졌을 때에 기습하여 그를 무섭게 하면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도망하리니 내가 다윗 왕만 쳐죽이고” (1-2)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처음 할 일은 다윗의 후궁을 강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압살롬과 다윗 사이를 아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다가갔지만, 처음부터 압살롬의 패륜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직 압살롬이나 그 주위의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의 첫 번째 계략이 아주 좋다고 일단은 칭찬을 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아히도벨의 계략은 지금 바로 군사를 12,000명 만 주면, 다윗을 따라잡아서 백성들은 도망하게 하고 다윗만 잡아서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만 죽으면 온 이스라엘이 압살롬을 왕으로 세우는 일에 대해서 크게 반대하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실, 다윗이 죽으면 그 다음으로 민생을 살폈던 왕자가 압살롬 아니겠습니까? 위에 아비가일의 소생 중에 길르압이 있기는 한데, 그 차남에 대한 이야기가 성경이나 다른 문서에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아비가일이 현숙한 여인으로서 아들이 왕자의 난에 휘말리지 않게 손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친아들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나발 사이의 아들이었는데, 양아들로서 이름만 올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다윗의 왕위를 이을 적통은 아니겠지요. 그것도 아니라면, 애시당초 왕위를 이을 만큼 똑똑하거나 건강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전혀 압살롬의 난에도 이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윗과 함께 피난을 가거나, 아니면 군대를 지휘하면서, 동생의 난을 막든지 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모든 백성이 당신께 돌아오게 하리니 모든 사람이 돌아오기는 왕이 찾는 이 사람에게 달렸음이라 그리하면 모든 백성이 평안하리이다 하니” (3)
아히도벨의 계략은 앞장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훌륭한 생각이고, 모든 전쟁에서 통용되는 아주 최상위 지략이지요. 근래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약 3년 째 이어져오고 있는데, 젤렌스키가 푸틴을 제거하거나 푸틴이 젤렌스키를 제거하면 전쟁이 금방 끝납니다. 그런데, 쉽지 않지요. 우리 나라도 지금 북한과 대치 중인데, 가장 최고의 전략은 김정은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북한을 흡수통일하는 것이 최고의 결과지요.
중국은 전에, 북한 땅을 중국으로 흡수하기 위해서 김정일의 자식 중에 큰 아들 김정남을 보호해 주면서 데리고 있었습니다. 여차 하면, 김정은을 죽이고 중국의 꼭두각시인 김정남을 대리 통치자로 세우려고 했지만, 김정은이 형을 암살했지요. 아무튼 김정은을 대신할 사람을 중국이 또 관리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백성들 편에서는 다윗이 왕에 있든, 그 아들 압살롬이 왕으로 있든, 외부나 내부에서 전쟁이 없고 평화스러운 일상이 계속 되면 그렇게 큰 관심이 없습니다. 사실, 경제나 사회적인 혼란이 없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면, 나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일반 백성입니다. 아히도벨은 그런 것을 꿰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좀더 흐르게 되면, 다윗 편에 있는 요압이라든지, 훌륭한 장수들이 많기 때문에 다윗이 건재하는 한 이 쿠데타는 금방 제압될 것입니다.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그 말을 옳게 여기더라.” (4)
함께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아히도벨의 계략을 듣고, 아히도벨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이 후새도 다윗의 군사였기 때문에 어떻게 그가 말하는지 듣고 싶어합니다.
성도 여러분! 정보가 많다고 해서 다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보가 많을수록 헷갈립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 장애가 있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국가적인 일이나 시급한 상황에서는 빠른 정보와 빠른 판단이 오히려 좋을 수 있습니다. 물론, 심사숙고(深思熟考)해서 결정을 내려하는 일도 있지만, 빠른 판단을 해야할 때는 평상시에 대비와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진과 같은 재난이 닥칠 때 사전에 연습되고 계획된 움직임대로 행동하는 것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더 나은 방법은 평안하고 훈련상황일 때, 고려하는 것이고 당장은 빠른 실행력이 중요합니다. 아무튼 이 아히도벨의 계략이 그대로 채택되지 않고, 압살롬은 후새의 이야기도 한 번 들어보자고 제안합니다. 벌써 이 아히도벨의 계획에 차질이 생깁니다. 아무런 선견자나 선지자의 말이 없지만,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의 계획을 폐하시고 다윗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압살롬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도 부르라 우리가 이제 그의 말도 듣자 하니라.” (5)
갑자기 후새에게 기회가 생기지요. 후새는 빨리 아히도벨의 계략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좋게 보이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순발력 있게 이런 일을 시행해야 합니다. 후새가 앞으로 어떻게 압살롬이 행동할지 실행계획은 극비사항입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을 다윗에게 알려서 빠른 시간 안에 어느 정도 압살롬의 추격 범위를 벗어나야 합니다.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매 압살롬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히도벨이 이러이러하게 말하니 우리가 그 말대로 행하랴 그렇지 아니하거든 너는 말하라 하니” (6)
후새는 아히도벨의 계획을 다 듣고,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압살롬에게 더 좋게 들리는 계략을 세워야 하고, 다윗이 살 시간을 벌어 주어야 합니다. 어떻게 후새는 이 위기를 벗어나게 할까요?
“후새가 압살롬에게 이르되 이번에는 아히도벨이 베푼 계략이 좋지 아니하니이다 하고” (7)
후새가 먼저 번 아히도벨의 계략은 참 좋았지만, 이번 것은 좋지 못하다고 은근히 그 계략을 방해합니다. 후새가 아히도벨의 지금까지 해 온 일들은 참 잘한 것이라고 칭찬하면서, 은근히 압살롬이 잘 판단한 것이라고 환심을 사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번에는 내 계략을 한 번 들어보라는 것입니다.
“또 후새가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아버지와 그의 추종자들은 용사라 그들은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전쟁에 익숙한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 지금 그가 어느 굴에나 어느 곳에 숨어 있으리니 혹 무리 중에 몇이 먼저 엎드러지면 그 소문을 듣는 자가 말하기를 압살롬을 따르는 자 가운데에서 패함을 당하였다 할지라.” (8-9)
그리고 압살롬을 ‘왕’이라고 하고, 다윗을 ‘왕의 아버지’라고 합니다. 다윗의 용사들은 지금 갑자기 피난을 나왔지만, 분명히 다시 예루살렘을 기습하여서 빼앗으려고 할 것이라고 은근히 겁을 주지요. 그래서 매복에 걸려서 12,000명의 군사들 중에 일부가 패하게 되면, 이제까지 기세가 좋았던 군사들의 사기는 금방 떨어질 것이라고 압살롬을 설득하지요. 사실, 압살롬이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지금은 이렇게 예루살렘 성을 빼앗았지만, 언제 또 수많은 군사들이 들이닥칠지 염려가 됩니다.
“비록 그가 사자 같은 마음을 가진 용사의 아들일지라도 낙심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무리가 왕의 아버지는 영웅이요 그의 추종자들도 용사인 줄 앎이니이다.” (10)
압살롬도 사실, 요압 장군이라든지, 잇대라든지, 다윗의 용사들의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더 많은 장군들이 자신을 따르면 좋겠지만, 처음 쿠데타를 일으킬 때, 영문도 모르고 쫓아온 사람들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반역하는 일이 커지니까, 이리 저리 분위기를 살피다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 붙은 자들입니다. 사실, 다윗처럼 동고동락한 군사들이 아니라 이득을 따라 움직이는 소인배들 뿐입니다.
“나는 이렇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온 이스라엘을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바닷가의 많은 모래 같이 당신께로 모으고 친히 전장에 나가시고” (11)
이제 후새가 다윗을 살릴 계략을 알립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 계략이 꼭 자기를 위한 계략인 것처럼 느낍니다. 어느 부분에서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에 넘어갔을까요? 후새는 압살롬이 직접 온 이스라엘 군대를 모아서 싸우러 나가라고 합니다. 후새가 이스라엘의 최남단 브엘세바에서 최북단 단까지 온 군대를 진두지휘 하는 그림을 압살롬에게 넣어줍니다. 압살롬은 솔직히 전쟁에서 자신이 없으니, 쪽수에서 이기고 들어가자는 말이 좋게 들립니다.
곧 전쟁터에 나서면 깨닫겠지만, 일반 백성들은 이기는 편이 우리편입니다. 이 싸움은 아버지와 아들의 싸움이지, 남의 가정사에 끼어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압살롬을 따르는 군사들이 많아 보일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압살롬이 다윗의 장수들과 싸워서 이길 실력이 될까요? 역전의 용사들 앞에서는 압살롬은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후새의 계략에는 분명히 다윗에게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사들을 소집하려면, 12지파에게 많은 파발(擺撥)을 띄우나 혹은 통신병들을 보내고 해야 할 텐데, 하루 이틀에 되겠습니까? 어림도 없지요. 그런데 압살롬은 이 후새의 계략이 아히도벨보다 더 좋게, 더 낫게 들립니다.
“우리가 그 만날 만한 곳에서 그를 기습하기를 이슬이 땅에 내림 같이 우리가 그의 위에 덮여 그와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요.” (12)
후새는 아주 이미지 묘사에 능합니다. 이슬이 땅에 내리듯이 기습을 한다고 합니다. 그 새벽녘에 이슬이 언제 맺히는 지도 모르게 맺히는 이슬같이 하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윗의 군사들은 완전히 쓸어버려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않는 확실한 승리를 거머쥘 것처럼 말합니다. 이 후새의 계략은 참으로 멋져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군대를 보내어 다윗을 쫓는 것이 기습이 되지, 전열(戰列)을 재정비하면 다윗의 군대가 그렇게 쉽게 당할 수 없습니다.
“또 만일 그가 어느 성에 들었으면 온 이스라엘이 밧줄을 가져다가 그 성을 강으로 끌어들여서 그 곳에 작은 돌 하나도 보이지 아니하게 할 것이니이다 하매” (13)
후새의 마지막 말은 너무도 과장되어 웃음이 나올지경입니다. 다윗이 어느 성에 들어가도 밧줄로 그 성을 강으로 옮겨가지고 몰살을 시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압살롬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 혹(惑)합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14)
그러니까 압살롬에게는 제대로 판세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히도벨 한 사람 말고는 없습니다. 압살롬이나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전쟁의 전략과 전술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전쟁에 대해서는 무지한 자들입니다.
후새의 계략이 채택된 것이 사무엘서를 기록한 주석가가 해석하기를 이렇게 후새의 계략이 채택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의 계략을 폐하신 것이고 압살롬을 심판하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관(史觀)이지요. 우리들도 신앙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겨야 합니다. 어떤 정치적인 사건이나 이벤트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무슨 일을 행하시려고 하는지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에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이르되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고 나도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으니, 이제 너희는 빨리 사람을 보내 다윗에게 전하기를 오늘밤에 광야 나루터에서 자지 말고 아무쪼록 건너가소서 하라 혹시 왕과 그를 따르는 모든 백성이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 (15-16)
궁궐을 빠져 나와 후새는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극비사항을 전달하면서, 이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게 합니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들이 대신 심부름을 가겠지요. 어째든 다윗과 신하들이 가능한 한 요단 강을 건너서, 몸을 피신하게 합니다.
“그 때에 요나단과 아히마아스가 사람이 볼까 두려워하여 감히 성에 들어가지 못하고 에느로겔 가에 머물고 어떤 여종은 그들에게 나와서 말하고 그들은 가서 다윗 왕에게 알리더니” (17)
두 제사장이 자기 아들들에게 소식을 전달할 때, 이름 모를 여종이 개입이 되었습니다. 요즘 영화들을 보면, 이렇게 여성들도 첩보원이 되어서 기밀들을 전달하는 일이 나오는데, 벌써 3천 년 전에도 이렇게 여성들이 활약을 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때에도 라합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튼 주님의 일에는 남성, 여성이 없습니다.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이렇게 돕고 있습니다. 이런 것도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한 청년이 그들을 보고 압살롬에게 알린지라 그 두 사람이 빨리 달려서 바후림 어떤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뜰에 있는 우물 속으로 내려가니, 그 집 여인이 덮을 것을 가져다가 우물 아귀를 덮고 찧은 곡식을 그 위에 널매 전혀 알지 못하더라.” (18-19)
여종이 요나단과 아히마아스에게 무슨 기별을 하는 것을 한 청년이 보고 압살롬에게 보고합니다. 그래서 급하게 이 두 사람을 예루살렘 성 밖에서 찾는데, 바후림의 어떤 집에 둘이 숨고, 압살롬의 사람들이 그 집 여자를 추궁하게 됩니다. 마치 여호수아를 다시 읽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찧은 곡식을 숨은 곳 위에 널어서 찾지 못하게 만들지요. 그리고 전혀 못 봤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시내를 건너가는 것 같더라고 잘못된 정보를 줍니다.
“압살롬의 종들이 그 집에 와서 여인에게 묻되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어디 있느냐 하니 여인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시내를 건너가더라 하니 그들이 찾아도 만나지 못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20)
위기의 순간을 넘어서 다윗에게 후새의 메시지가 전달이 됩니다. 이렇게 정보가 잘 소통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날은 얼마나 더 소통이 잘 됩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손 안에 휴대폰 안까지 들어오지 않습니까? 수많은 설교와 동영상도 퍼져 나가는데,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가서 다윗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이러이러하게 계략을 세웠나이다.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까지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21-22)
다윗은 그저 예루살렘으로부터 오는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가 살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빨리 요단을 건너 피하라는 소식을 듣고, 그는 건너게 됩니다. 이렇게 피할 수 있음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기에 우리 성도들의 유비(類比)가 있습니다.
세상 멸망 때에 우리는 이 땅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고, 하늘 나라로 피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다만 하늘 나라의 소식을 듣고 피했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소식을 믿지 않거나, 세상의 향락에 취해서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때에 함께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입니다. 제 아무리 왕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어도, 피하라고 할 때는 도망쳐야 합니다. 다윗처럼.
“아히도벨이 자기 계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의 조상의 묘에 장사되니라.” (23)
자기 계략이 끝났음을 보고 아히도벨은 앞으로 무슨 일(쿠데타 실패)이 일어날지 훤히 내다보고 이제 압살롬 곁을 떠나서 고향으로 가서 집안을 정리하고 자결합니다. 살아 있어서 반역의 괴수로 몰려서 온 가문이 멸족을 당하는 것보다는 자기 한 사람이 희생하는 것이 낫지요. 그는 다윗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고 이 반역에 가담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복수를 완전하게 실행되지 않게 막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마하나임에 이르고 압살롬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과 함께 요단을 건너니라.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지휘관으로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그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머니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24-25)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처럼, 자기 사람들을 세워서 조직을 갖추지만, 역시 다윗과 다 인연이 있고 친분이 있는 친지가족 간의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무리와 압살롬이 길르앗 땅에 진 치니라. 다윗이 마하나임에 이르렀을 때에 암몬 족속에게 속한 랍바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로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 생각에 백성이 들에서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 함이더라.” (26-29)
다윗은 요단을 건너가서 길르앗 땅에서 재정비를 하고, 다시 예루살렘에 있는 압살롬과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모든 나라의 비극도 사실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가정이 바로서지 않으면, 나라도 쪼개지고 갈라집니다. 다윗이 율법을 제대로 알고 이렇게 많은 아내로부터 자녀를 낳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은 시작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또 다른 남의 아내까지 탐을 내다가 결국에는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습니까?
다윗이 이렇게 당하지만,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기사회생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인생들도 이 세상에서 모진 아픔과 슬픔을 겪어야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하고 마음 속에 새겨야 하는 것이지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그래도 우리는 늘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기에서 건지시고 지키시며, 사람들을 통해서 도움을 손길을 베푸시는 것을 늘 감사하며, 우리도 서로 돕고 아끼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손이 되어 괴로움과 고통 속에 있는 영혼들을 돕고 건져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히도벨의 계략을 폐하시고, 다윗을 살려 주시고, 다시 재기할 수 있게 하심을 말씀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한 가정이 바로 서지 못하니까 온 나라가 어지럽고 쪼개지며, 전쟁의 고통 속에 빠지는 것을 봅니다. 온 나라와 지도자들과 우리 성도들이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순종해서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온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할 수 있게 도우시며, 성도들이 아름다운 가정생활을 하고, 이웃에게 본이 되어서, 세상을 이끌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11월의 첫 주를 주님 앞에 예배 드리며,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2025년도를 잘 준비하고 계획해서 더 낳은 신앙과 성숙한 가정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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