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최후 >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1)
요단 강을 건너서 그곳의 백성들에게 다윗이 도움을 받습니다. 17장 27절에 보면, 마하나임에 이르러서, 바르실래를 비롯한 여러 유력자들이 많은 음식과 재물을 들고 와서 다윗을 영접하고 군사들을 보충할 수 있게 돕습니다.
사실, 이 ‘마하나임’ 이란 곳이 원래 다윗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던 지역이었습니다. 사울이 죽고, 사울의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데리고 이곳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세우고 이스라엘 왕국을 다스리게 했던 곳입니다. 그런 곳인데, 어떻게 해서 이 지역 백성들이 다윗을 맞아주고, 환영할 뿐만 아니라 군사를 재편해서 압살롬의 군대와 내전을 치를 수 있게 도와 줍니까? 그냥 모른 척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나요?
다시 이스라엘이 유다와 갈라져서, 압살롬의 유다와 이스라엘의 다윗 하는 식으로 두 나라로 쪼개질 일이 생긴 것 아닙니까? 그냥 다윗을 잡아서 압살롬에게 갖다 바칠 수도 있었을 텐데, 어떻게 다윗에게 충성을 다 할까요?
예전에 다윗이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투에서 죽고 적들이 사울의 목을 벧산 성벽에 걸어두었을 때에 길르앗 사람들이 특공대를 조직해서 그 시신을 수습해서 가져오고 길르앗 땅에서 장사를 지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다윗이 훗날 왕이 되고, 그 길르앗 사람들을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보상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 만약 사울이 자기 원수라고 해서 그 시체를 수습한 길르앗 사람들을 탄압하고 보복을 했다면, 이처럼,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 때에 살아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다윗이 그동안에 정치를 참 잘했던 것이 지금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게 된 결정적인 보상이 된 것이지요. 길르앗 사람처럼 옛날 사울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았던 사람들은 다윗의 선정(善政)도 기억한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 일은 모르는 것입니다. 다윗이 보상을 해 주었던 것이 결국에는 자신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가능한 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탄에게 매여서 조종을 받는 사람들이 괜히 미워하고 괴롭히는 일이 있어서 쉽지는 않지만, 누구에게나 사랑과 은혜를 베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최소한 은혜를 받았으면 보답을 하려고 해야 합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롬 12:18)
다윗의 이런 어려움에 처했을 때, 요단 동편 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아버지를 배반하고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을 징벌할 때에 많은 군사를 지원해 주게 된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이렇게 해서 내전이 벌어집니다. 주변 나라들의 침략의 가능성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다윗이 그동안에 주변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도록 얼마나 많은 전쟁을 했는데, 왜 이런 시기에 암몬이라든지, 아람나라든지, 에돔이나 모압이 침략하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놀랍지 않습니까?
다윗이 위기에 있을 때,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일을 인과관계로 다 따져서 살필 수는 없습니다. 저의 견해로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외적의 침입은 막아 주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동안에 다윗이 얼마나 전쟁을 많이 치러왔는데요. 당장 블레셋이 덤벼야 하는데, 조용합니다.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2-3)
약 1만 명의 군사들을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나누어서 지휘하게 합니다. 다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해서 출정을 합니다. 다윗도 나가서 싸우려고 하지만, 휘하(麾下)의 장수들이 볼 때, 이제 다윗은 전쟁에 직접 나가서 싸울 수 없는 상태인 것입니다. 아마도 다윗이 60세가 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만류를 하고 싸움은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다고 하지요.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4)
다윗의 직속 장수 말고도 백부장, 천부장을 세웠으니까, 우리 편제로 하면 중대, 대대, 연대 이렇게 편제를 짜서 부대별로 임무를 주고 출정을 합니다.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5)
다윗이 장군들과 군사들에게 부탁을 합니다. 압살롬은 반역을 했지만, 죽이지 말라달라고 말이지요. 참 맥빠지는 소리지만, 어쨌든 다윗을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6-8)
압살롬의 군대가 더 숫자가 많습니다. 그래서 요압이나 다윗 편의 장수들은 전면전을 하지 않고, 일종의 지형지물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을 펼칩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수풀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압살롬 편에 선 군사들을 2만 명을 죽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칼에 죽지 않고 수풀에서 죽었다고 나오니까, 아마 진흙 구덩이나 모래웅덩이 같은 곳으로 유인을 한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하나님께서 죽이셨다고 까지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알려 이르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하니” (9-10)
압살롬도 멋모르고 이 수풀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의 부하들이 나타나니까 급하게 도망치다가 나뭇가지에 걸려서 대롱대롱 매달리게 되지요. 앞에 14장에서 압살롬이 머리카락이 굉장히 많고 풍성하다는 이야기가 있었지요? 아마도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엉킨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됩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압살롬이 에브라임 수풀에 들어와서 꼼짝없이 잡히게 됩니다.
“요압이 그 알린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냐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하는지라.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젊은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11-12)
다윗의 부하가 아마 요압의 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고 요압에게 보고하니까, 당장에 죽이지 그랬냐면서, 책망을 합니다. 부하들이 다윗 왕이 죽이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죽일 수 없었다고 하지요.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의 생명을 해하였더라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하니” (13)
그 요압의 부하가 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만약에 자기가 압살롬을 죽였으면, 요압이 그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지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보고하지요. 참 잘한 것입니다. 만약에 왕의 명령을 어겨도 요압이 어겨야지 자신은 왕의 명령을 어길 수 없다고 합니다.
성도들도 세상에 살기 때문에 악한 자 밑에서 일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정치나 경제나 어느 조직에서 상사가 불의한 일을 지시할 때에,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가장 큰 권위는 예수님께,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명령이나 오더(order)가 떨어질 때, 직접하지 말고 확실히 그 악한 일을 지시한 상사에게 가서 보고하고 그 사람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합니다.
“요압이 이르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무기를 든 청년 열 명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 (14-15)
이 요압이 압살롬을 잔인하게 죽이고 그의 부하들이 왕자의 시신을 훼손하게 합니다. 아주 요압이 분풀이를 제대로 하지요. 아마 압살롬의 반역에 자기를 끌어들이지 않아서 였을까요? 아무튼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렇게 합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최후입니다. 전쟁이나 전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군사들을 지휘하다가 2만 명의 무고한 생명을 잃게 만들고 자신도 어이없게 죽지 않습니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냥 숫자로 밀어 붙이면 쉽게 승리할 것으로 착각한 것이지요.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에게 그치게 하니 그들이 이스라엘을 추격하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그들이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그를 던지고 그 위에 매우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16-17)
압살롬이 죽었습니다. 압살롬을 따르던 군사들이 그 소식을 듣고서 더 싸울 수 있습니까? 이제는 다윗 왕을 반역하는 꼴 밖에 되지 않습니다. 어떤 전쟁의 명분도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갑니다. 의외로 손쉽게 전쟁이 끝나버렸습니다. 안타깝게 압살롬을 따르던 2만 명의 군사들만 죽임을 당한 것이지요.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마련하여 세웠으니 이는 그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내게 없다고 말하였음이더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을 기념하여 그 비석에 이름을 붙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그것을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18)
cf. “압살롬이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딸의 이름은 다말이라 그는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더라.” (삼하 14:27)
삼하 14장 27절에는 아들이 셋이나 있었다고 기록했는데, 18장 18절 말씀에는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성경이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아마도 압살롬이 아들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아버지를 배반하고, 나라를 어지러운 지경으로 몰고 가니까 그 사이에 아들들이 모두 이런 저런 사고나 질병으로 모두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이런 난해한 구절들이 더러 있지만, 이것이 우리의 구원의 문제와는 크게 연관된 것이 아니기에 자세한 해답은 천국에 가서 확실히 아는 것으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이르되 청하건대 내가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요압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요압이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아뢰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19-21)
반역의 수괴, 압살롬이 죽었고 우리 군사들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아히마아스가 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그를 보내지 않고 구스 사람에게 이 소식을 전하게 하지요. 그런데도 아히마아스가 다리가 워낙 빠르다 보니까 자기가 가서 전하겠다고 나섭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하건대 아무쪼록 내가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려가게 하소서 하니 요압이 이르되 내 아들아 너는 왜 달려가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말미암아서는 너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그가 한사코 달려가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이르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가니라.” (22-23)
아히마아스가 승리의 소식을 전해서 다윗 왕께 상을 받으려 한다고 요압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히마아스가 그런 생각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좋은 소식은 전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소식을 늘 기쁜 마음으로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아 있더라 파수꾼이 성 문 위층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외쳐 왕께 아뢰매 왕이 이르되 그가 만일 혼자면 그의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그가 점점 가까이 오니라.” (24-25)
다윗은 마하나임 성에서 소식을 기다리고 있지요. 성 문 위에 파수꾼이 좀더 멀리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성 문 사이에서 초초하게 소식을 기다리는데, 파수꾼이 한 사람이 달려 오고 있다고 다윗에게 전합니다. 다윗은 무슨 소식일까 점점 더 궁금해 집니다.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려오는지라 파수꾼이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려온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파수꾼이 이르되 내가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하니라.” (26-27)
파수꾼이 다윗에게 한 사람 뒤에 또 한 사람이 달려 오는데, 마치 아히마아스가 달리듯이 달린다고 보고합니다. 참 눈도 좋지요? 아히마아스가 일반 사람들이 달리는 폼과는 좀 다르게 달리는데, 더 빠른 것 같아요. 다윗은 아히마아스가 오면은 좋은 소식을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아뢰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이르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의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28)
구스 사람보다 늦게 출발했는데, 아히마아스가 먼저 도착을 해서 다윗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해 줍니다. 그러나 압살롬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빼고 전하지요. 사실, 다윗의 군대가 이겼다는 것은 압살롬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압살롬이 죽지 않았는데, 어떻게 다윗의 군대가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압살롬이 살아 있다면, 계속해서 반란의 여지가 있거나, 그냥 여러 전투 중에 한 전투에서 승리한 것일 뿐이지요. 물론, 압살롬을 생포했다는 것도 전쟁의 승리라고 말할 수는 있지요.
“왕이 이르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하니라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물러나 거기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서 있더라.” (29-30)
다윗은 전쟁의 승패보다 더 궁금한 것이 압살롬이 어떻게 되었는가 입니다. 즉, 살아있는지, 아니면 전쟁통에 죽었는지. 다윗이 바라는 것은 압살롬이 살기를 원한 것이지요.
“구스 사람이 이르러 말하되 내 주 왕께 아뢸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하니,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젊은 압살롬은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31-32)
아히마아스의 뒤에 구스 사람이 와서 다윗 군대의 승리를 전하며, 압살롬이 죽었다고 보고합니다. 다윗은 승리의 소식보다 아들의 죽음의 소식에 대해서 크게 애통하며 울게 됩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33)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해서, 결국에는 망하고 죽었다는 것이 사무엘하 18장의 내용입니다. 다윗 왕가의 이러한 비극적 사건이 왜 성경에 기록이 되었을까요? 그냥 역사책에 기록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성경에 자세하게 이 반역의 흐름과 과정과 결말이 나와 있습니다.
이 압살롬의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를 배반하고 등지고 살아가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 지구 상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바르게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께서는 잠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떠나 계십니다. 지금은 공중 권세를 잡은 마귀와 그 졸개들인 귀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었지요. 만약 계속 이런 식으로 나가면, 이 지구는 멸망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다윗 왕처럼, 애통하시고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하는 다윗의 울부짓음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인간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담당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받을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점점 세상이 종말을 향하여 가는데, 세상 끝에도 압살롬처럼 끝까지 반역하다가 멸망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우리처럼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자식들이 있겠지요. 하나님은 세상 종말을 앞두고도 아버지의 승리를 마냥 기뻐하실 수가 없습니다. 정말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다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쉽지 않은 결론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완악하여서 끝장을 보려고 하는 무지와 오해와 타락한 우리의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아버지의 심령을 잘 살펴서, 우리도 예수님을 닮아서 지옥으로 향해 가는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며 희생하며 아버지께로 그 마음을 돌릴 수 있게 ‘제사장(다리를 놓는 사람)’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압살롬의 죽음을 슬퍼하며 마음 아파하는 다윗처럼 하나님 아버지도 아버지를 등지고 멸망길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시며 애통하신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봅니다. 그래서 다만 얼마간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들이 이 큰 은혜를 입은 자들인데, 우리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보내심은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심인 줄로 깨달아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는 연약하오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이기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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