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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사무엘상] 26장 다윗이 또 사울을 살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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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936회 작성일 2024-06-27 06: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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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도피여정>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1)

 

 갈멜 지역에서 얼마 있다가 다윗이 다시 북쪽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전에도 십 땅에 있을 때에 사울 왕에게 다윗의 정보를 주었던 사람들이 다시 다윗이 숨은 지역에 대한 보고를 합니다. 지난 번에 다윗에게 죽을 수 있었는데, 다윗이 자신을 죽이지 않았다면, 더 이상 사울도 다윗 쫓기를 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시 군사 3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겠다고 나섭니다. 

 

 참 염치도 없고, 은혜도 모르는 사울입니다. 그를 따르는 군사들은 왕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요? 십 사람들은 또 무슨 생각으로 다윗을 사울이 잡을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합니까? 다윗이 무슨 큰 범죄자도 아니고,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웠던 충신이요, 애국자를. 마치 친일파가 연상되지 않습니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싸운 장군을, 국가유공자를 잡으려고 하는 이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할까요?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2-3a)

 

 

위의 사진들은 하길라 산 앞입니다. 첫 사진은 우기 때 조금 풀이 있을 때이고, 그 아래 사진은 건기 때, 말 그대로 “바짝 마른 땅” (광야)일 때의 사진입니다. 전혀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이런 곳에 다윗이 숨어 있는데, 왠만큼 눈이 좋은 사람들은 사람들 600명이 이동하면 다 보이겠지요? 이런 곳까지 사울이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군대 막사를 임시로 지었겠지요?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3b-5)

 

 다윗이 위에서 보니까 사울 왕이 진을 편 곳이 다 보입니다. 가운데 사울 왕의 막사(幕舍)가 있고 그 주위에 원형으로 다른 군사들의 병영(兵營)을 에워쌉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은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의미의 포석입니다.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6) 

 

 다윗이 사울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가면 쉽게 눈에 띌 수 있으니까 경호할 사람 한 명을 선발하려고 합니다. 그 때,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함께 가겠다고 합니다. 다윗도 그렇지만, 아비새도 참 용맹한 사람입니다. 사무엘서를 계속 읽어보면, 아비새가 굉장히 날쌔고 빠르다고 나옵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7)

 

 다윗이 사울 왕에게까지 접근하려면 그 진영의 중심까지 뚫고 가야 하는데, 다윗이 가서 보니까 군사들이 모두 잠들어 있습니다. 심지어 사울의 최 측근, 경호대장 격인 아브넬까지 잠들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깊이 잠들어 있을까요? 심지어 다윗과 아비새가 접근한 것도 모른 채. 군대 격언 중에 ‘전쟁에 지는 것은 용서할 수 있으나 경계에 실패는 용서할 수 없다.’ 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 중에 기본이 경계를 확실하게 서는 것인데, 여기에 실패를 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경계’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데, 왕과 군대장관이 모두 경계에 실패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좀 있으면 성경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의 군대를 깊이 잠들게 하셔서, 다윗이 지나가도 모르게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을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고, 이번에는 사울 뿐만 아니라 그의 군대장관과 다른 군사들까지 더 이상 다윗에게 죄를 물을 수 없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8)

 

 아비새는 다윗을 알기 때문에 자신이 다윗을 위해 사울 왕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보통 윗사람들이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으니까 아랫사람을 시켜서 악한 일을 실행하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지난 번과 같이 아비새를 막습니다. 동일한 이유를 대면서.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9-10)

 

 다윗이 미래를 보고 왔는지, 사울 왕의 결말을 내뱉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까, 우리는 손을 대면 안 된다고 아비새를 막아섭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11-12)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만, 다윗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어도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유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까지 미워하고 증오하고 심판하면 안 됩니다. 모든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다윗은 그저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사울의 진영을 빠져 나옵니다.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13)

 

 

이제 다윗이 진영에서 좀 떨어진 언덕에서 군사들과 아브넬 장군을 깨워서 소리칩니다.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14)

 

 잠에서 깬 아브넬이 “너는 누구냐?” 하면서, 다윗에게 대답하지요. 아마 다윗이 사울 왕도 불렀던 것 같습니다. 아마 고함을 쳤을 것입니다. 밤중에 누군지 잘 모르니까 큰 소리에 허둥대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15)

 

 다윗이 아브넬 장군에게 호통을 칩니다. 네 왕을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뭐하는 것이냐면서 책망을 하지요. 군사 진영에 한 사람이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으니까 직무유기를 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들어갔었지요. 아비새가 죽이려는 것을 다윗이 막았다고 하지 않고, 마치 자기 한 사람이 왕의 막사에 갔다가 온 것처럼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16)

 

 다윗이 아브넬을 죽일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분명, 다윗을 잡으려고 하길라 산까지 와서 군대 진영을 짰는데, 경계에 실패해서 까딱하다가는 왕이 암살을 당할 뻔 하지 않았습니까? 이 책임은 아브넬이 져야 맞는 것이지요. 그 증거로 사울 왕의 창과 왕의 물병을 보입니다.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17)

 

 아브넬과 다윗이 이렇게 말하는 동안,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그러면서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고 부릅니다. 다윗이 그렇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아들로 부르는 것이 가당하기나 합니까? 사람이 염치도 없고, 은혜도 모르고 그렇습니다. 사탄에게 사로잡히면 인간성이 상실됩니다. 그럼에도 다윗을 아들로 부르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18-19)

 

 여기 참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지금 다윗이 사울 왕의 손에 잡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목숨을 제물로 드리겠다고 다윗이 고백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왕을 충동질하여서 다윗을 쫓아낸 것이라면, 그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지금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기 때문에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해서 절기나 안식일이나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께 나오는 길을 방해하고 막는 그 사람들은 저주를 받아야 한답니다. 그 사람들이 앞에 ‘십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는 이야기를 왜 이렇게 반복해서 기록했을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사울이 또 다윗의 은혜를 잊고 배은망덕하게 하길라 산으로 다윗을 추격하다가 또 죽을 위기가 있었는데, 다윗이 죽이지 않았다고 요약적으로 기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상당히 비중있게 또 기록하고 있는 이유를 깊이 묵상해 보세요! 

 

 다윗의 생명을 찾아 사울에게 갖다 바치려는 자들은 결국에는 다윗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방해하고 막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실, 사탄이나 귀신이나 이들이 하는 일의 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요. 예배를 방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이간질하고 오해하게 만듭니다. 이런 일은 큰 죄로써 저주를 받을 일이고, 종말에 가면 심판을 받을 일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혹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오지 못하여서,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섬기도록 하는 일에 기여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 죄악으로 떠났던 인간들이 돌아오도록 설득하고 인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래서 죄값을 독생자에게 치르게 하셨는데, 그 은혜를 외면하고 거부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일에 방해를 하는 자들에게 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20)

 

 다윗은 자기를 해하지 말 것을 호소하고, 또 왕이 자기를 짐승과 같이 사냥하지 말 것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끝까지 다윗을 속이려고 하고 죽이려고 거짓을 늘어놓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21)

 

 사울은 끝까지 다윗을 속이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곧 심판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고, 아브넬도 생명의 빚을 지게 만들도 항상 은혜를 베풀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성령에 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22-24)

 

 다윗은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지켜 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운 종을 살렸으니, 자기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사무엘서를 읽으면 다윗이 범죄하고 자기 부하를 죽이도록 살인교사를 해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이지 않습니다. 큰 은혜를 입게 됩니다. 사실, 다윗의 왕위가 계속 이어지는 것도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25)

 

(기도) 하나님! 사울은 얼마 전에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지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고 다시 십 사람들에게 다윗의 위치 정보를 얻어서 군사를 이끌고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은혜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사울처럼 악한 일에 피흘리는 일에 열심히 나서는 저희들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사탄에 매여서 죄 중에 거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직접 남을 해치거나 상처를 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나아오는 일에 방해하고 예배를 막는 일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말과 행동을 조심히 살펴서 이런 악한 일에 동참하지 않게 도와 주옵소서! 오히려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이웃들이 나오도록 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처럼 희생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우리 모두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함부로 원수를 갚고 보복하지 않게 하시고,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대하게 하옵소서!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와 용서와 사랑을 우리에게 내리실 줄 믿습니다. 다윗의 좋은 점을 우리도 본받아 관용하며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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