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사무엘하서를 시작합니다. 우리 지난 주일까지 사무엘상서 다 끝냈고, 이번 주부터 사무엘하서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1-3)
1절부터 16절까지는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머물던 시글락이 아말렉의 침략을 받았었지요. 모든 사람들과 재물을 빼앗겨서, 다윗이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버림을 받을 수 있는 큰 위기에 처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여서 모든 것을 되찾아 와서 여러 전리품을 유대 여러 성읍과 나눴습니다. 시글락에 다시 돌아온 다윗은 2~3일 정도 시글락을 복구하는 중에 있었겠지요.
그런 때에 아말렉 출신 한 사람이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놀랍게도 사울 왕의 진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과 아말렉 간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 자가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소식을 전합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4)
다윗은 이스라엘 군대가 패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왕과 고위 장성들은 퇴각을 해서 목숨을 보전하는 일이 일반인데, 이 자가 어떻게 이스라엘의 왕이나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을는지 심문합니다.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7-10)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 사무엘상 31장과는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무엘상에는 사울이 블레셋 군대에게 욕을 보기 전에 자기 칼을 세워서 스스로 자결(自決)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무엘하에는 아말렉 사람이 사울 왕의 요청으로 살인한 것으로 나옵니다. 2가지 설인데, 사무엘의 기자는 전자를 지지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말렉 사람이 사울의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어떻게 획득했는지가 전자의 죽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이 아말렉 사람은 다윗과 사울의 사이에서 이제 사울은 죽었고, 사울의 왕관이나 그의 팔고리 같은 것을 예물로 받치면 다윗에게 신임을 받고 한 자리라도 얻을 것을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도 아니면, 고도의 술수를 써서 아말렉을 진멸한 것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아말렉 사람의 생각에는 다윗이 사울을 원수처럼 여길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 원수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그의 신하들이 그 소식을 듣고 저녁까지 금식하면서, 슬퍼하면서 울었습니다. 다윗도 그렇고 그의 부하들도 그렇게 지금 누구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 기뻐하기는 커녕 울고 옷을 찢어서 자기들의 슬픔을 표현하고 먹을 것을 먹지 않습니다. 참 놀랍지 않습니까? 오히려 할례받지 않은 이방 사람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을 함부로 죽였다는 것에 대해서 크게 노하여 당장에 그 아말렉 사람을 죽입니다.
“이에 다윗이 자기 옷을 잡아 찢으매 함께 있는 모든 사람도 그리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여호와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 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하니라. 다윗이 그 소식을 전한 청년에게 묻되 너는 어디 사람이냐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 곧 외국인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 다윗이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이르되 가까이 가서 그를 죽이라 하매 그가 치매 곧 죽으니라.” (11-15)
그리고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을 위해서 애가(哀歌)를 지어서 노래를 부릅니다.
오, 이스라엘이여, 이 일을 블레셋 사람들에게 말하지 말아라. 오, 길보아 산들아, 요나단의 활은 반드시 적의 피와 기름을 적셨고 사랑스럽고 아름답던 사울과 요나단, 오, 이스라엘의 딸들아, 용사들이 전쟁터에 쓰러졌구나. 내 형제 요나단이여, - 현대인의 성경 번역본, (19~27) |
요나단의 죽음은 다윗에게 큰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요나단 같은 친구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이어 받을 수 있는 왕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편들어주고 보호해 주었습니다. 정말 이해할 수 없지요. 그런 다윗을 그렇게 아껴주었던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서 다윗은 당연히 슬펐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애가도 짓고 했을 텐데, 그러나 저는 또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입니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지요. 다윗이 분명히 슬펐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울의 죽음에 대해서도 요나단의 죽음과 똑같이 취급하면서, 슬퍼하고 노래를 지을 수 있습니까?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죽었으니, 그의 죽음을 명예롭게 치장해 주고 치하해 주는 정도까지는 자기 본심과 다르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울이 죽은 소식을 블레셋 사람들의 딸들이 즐거워하기 전에 다윗이 기뻐하면서 축배를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이 죽었단 소리를 들으면 환호할 것입니다. 개가를 부르고 춤출 것입니다. 사실, 그 마음이 다윗에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즐거워하지 않았습니다. 박수치지 않았어요.
다윗은 사울의 죽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슬퍼했어요. 다윗이 훌륭한 사람이니까 예를 갖추는 것까지는 할 수도 있겠지만, 사울의 죽음에 예의를 갖추고 그 죽음을 명예롭게 치하해 준 것까지는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다윗이 사울의 죽음을 슬퍼까지 할 수 있었을까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 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실, 저도 그렇습니다 시기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남 잘되는 것이 은근히 싫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모습을 내가 스스로 볼 때 참 못마땅 했습니다.
‘참 못났다. 평생 예수 믿고 살았는데, 사촌이 땅 산 것이 배 아파프고 은근히 시기하고.’ 그런 것이 저는 참 못마땅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되는데, 그 정도에 만족이 안 됩니다.
‘하나님! 사촌이 땅을 사도 배 안 아픈 정도 말고, 사촌이 땅을 사면 내가 땅을 산 것처럼 기쁘고 감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 아량 있는 덕 있는 사람 되면 좋겠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수가 땅을 샀을 경우는 어떨까요? 우리는 사촌이 땅만 사도 배가 아픈데, 원수가 땅을 사면 하나님 앞에 따질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한테는 저런 복을 주시냐고. 우리는 불평하고 원망하고 얼마나 힘들어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원수가 땅을 사도 배가 안 아플 수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차원인데, 다윗은 원수가 땅을 사도 기뻐할 수 있고 원수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슬퍼할 수 있는 이런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참 다윗은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원수를 갚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까지도 얼마나 힘듭니까? 원수는 죽이고 싶은 것이 우리의 본성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원수 갚지 말라’ 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라.’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도 어려운 데 ‘그 원수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이것이 기독교의 정수(精髓)입니다. 기독교의 사상이고 기독교의 정신입니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면 속옷도 주는.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인데, 그것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합니다! 가능합니다! 가능하니까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해 놓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습니까? ‘다윗이 이렇게 하는 것을 봐라! 꿈같지? 다윗이 했으면 너도 할 수 있어!’ 이 말씀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도전하라’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픈 사람에서 배 안 아픈 사람, 그다음 단계로 가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하고 축하할 수 있는 사람, 거기서 더 나아가서 원수가 어려운 일을 당하면 슬퍼할 수 있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지경까지 이르라!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의 딸인 너희들이 도달해야 할 삶의 수준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할까요? 성령으로 거듭나면 가능하겠습니다. 변해서 딴 사람이 되면 가능합니다. 우리 옛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면 가능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말을 쓰는데, 성령이 충만하면 가능합니다. 원한과 미움이, 시기가 은혜보다 크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성령이 원한보다 미움보다 시기보다 크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말씀, 그 은혜가 크면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질 것입니다. 그만큼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사랑하며 은혜받고 감사하고 산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인 줄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힘든 사람이 있지요? 솔직히 미운 사람도 있지요? 마음으로는 ‘그가 잘 안 되면 좋겠다’ 하는 그런 미움의 대상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있는데, 한 주간 그 사람을 떠올리면서 하나님께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그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그 힘을 말씀 속에서 얻게 하여 주십시오. 은혜가 미움보다 크게 해주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으로 성령의 은혜가 원수를 사랑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정말 미션 임파서블이야.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어?’ 이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 주시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사로잡으면, 우리의 삶은 거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증인이 아닙니까? 다윗을 배우면 뭐 합니까! 다윗은 그랬다더라 그것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 봐야지!' 하는 거룩한 욕심내어 도전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의 승리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은 정말 우리에게 도전이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될 수 있겠습니까? 다윗이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사울이 죽었는데 슬퍼했다? 요나단이 죽은 것을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사울이 죽은 것을 그저 명예롭게 잘 예우해서 안장한 것만으로도 훌륭할 텐데, 다윗은 사울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아버지, 우리도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인데, 예수님을 믿고 받은 은혜의 힘으로 거기까지 미칠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고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우리에게도 힘든 사람, 미운 사람, 원수가 있습니다 그 미운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저희들에게 내려 주옵소서! 악에게 지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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