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1)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파송하셨고, 당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사역은 단 한 줄로 요약이 됩니다. 그들(제자들)의 여러 동네에서 복음을 가르치셨고, 전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셔서 똑같은 사역을 계속하신 것이지요. 이쯤되면, 예수님의 사역을 감옥에서 듣던 세례 요한이 조바심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열매맺지 않은 나무마다 찍어서 불에 살라야 하는데, 예수님은 전혀 심판하실 생각이 없으신 듯 보입니다.
가장 원수처럼 생각되는 로마인들에게도 아무 저항이나 어떤 보복이나 심판을 행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 백성들은 좀 그렇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종인 요한을 위해서 어떤 힘을 좀 써 주셔서, 구금되어 있는 것을 구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2)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를 보내서 예수님께 직접적인 질문을 합니다.
“당신이 정말 ‘그’ 메시야가 맞습니까? 아니면 당신은 메시야가 아니고 진짜 메시야를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고, 성령의 비둘기 같이 임하심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소개하는 하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메시야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감옥에 갇히고, 예수님의 행적을 들으니 자기처럼 하늘 나라 복음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어떤 군대를 이끌거나, 엘리야와 같은 권능을 가지고 로마와 그 정복자들과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이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기는 아는데, 불완전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 성령님을 부분적으로 알기 때문에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약간의 지식과 자신의 신앙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 전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목회자나 신학자나 신앙 서적을 통해서 일부분 하나님께 들은 지식이 있습니다. 그것조차도 불완전할 때가 많습니다.
그 오해와 불완전한 이해 때문에 잘 믿다가 낙심하고 예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요한도 마찬가지였고, 본문 속에 예수님을 따르는 12제자들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냥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깊은 교제 속에서 점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분도 ‘내가 어려서는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다.’ 라고 고백합니다. (고전 13:11)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初臨)했을 때의 사역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오셔서 이 땅에서 하실 일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항변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랑하심을 알게 하려고 하는 일입니다. (cf. 말1:2, 요3: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4-5)
예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어떻게? 성육신하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보게 합니다. 참 놀라운 것은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예수님이 하나님인지 전혀 인지를 하지 못합니다. 오늘날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보지 못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시각장애인들을 고치셔서, 잘 볼 수 있게 했다는 말씀으로 오해를 하는데, 그런 면도 있지만, 예수님의 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람들이 눈으로 직접 보게 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요한서신에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언급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1:1)
또,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그 옛날 구약시대, 시내산에서 빽빽한 구름과 연기 속에서, 큰 우뢰와 같이 들리던 하나님의 음성이, 이제는 예수님의 입으로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 속에는 ‘은혜’도 있고 ‘진리’도 있는데, 그것들이 전부인 것입니다.
‘나병’은 요즘 말로, 악성 피부병들을 다 포함하는데, 율법적 사고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들이 받는 징계 또는 심판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나병은 고치심은 이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풀렸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오셔서 저주와 심판을 거두시고 자비와 은혜를 내려 주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현현으로 확실하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사람의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거룩하고 특별하게 구별된 사람에게, 예언자와 같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꿈’이나 ‘이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전혀 못 알아 듣는 사람도 있고,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명확하게 말씀하셨고,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을 통해서 확실하게 기록까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성경시대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는 핑계되지 못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항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나 선생 말보다 위에 있고, 권위가 있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실제로 죽은 사람 몇을 살리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사람들의 속사람, 영혼이 깨어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게 죽은 자가 살아난 증거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왕궁이나 귀족들이 모인 곳에 전하신 것이 아니고, 말 그대로 일반 사람들이 사는 곳곳마다 다니면서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먼저 나올 수 있는 기회를 가난한 사람들부터 주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정말 부자인 사람들도 마음이 가난하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신분이나 부귀 영화를 버리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지요.
한 마디로 차별이 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면, 예수님께 나아와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거나 어떤 특별한 공연도 보고 듣고 싶어도 너무 많은 비용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학비나 무슨 입장료를 받지 않고서 천국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마음만 먹으면, 성경을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고, 또 성경이 없어도 인터넷이나 휴대폰으로 성경 앱을 설치해서 말씀을 읽을 수 있고, 유튜브 같은 SNS 상에 수많은 목사들의 설교를 공짜로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 예수님 덕분입니다. 공개는 되어 있지만, 전혀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없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땅에 살면서도 전혀 창조주를 찾지 않고, 자기 쾌락과 즐거움에 빠져 사는 자들은 여전히 천국 복음은 멀어져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 즐거움과 쾌락과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면, 하나님 말씀보다는 전혀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에 빠져서 인생을 낭비하고 어쩌면, 영원한 생명을 도둑맞을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6)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세히 알려 주어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구원받을 기회를 놓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른 바 ‘실족’한다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일이 발생하니까 우리도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7-9)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오실 메시야를 증거하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이 세례 요한을 보고자 광야로 나갔던 자들이 있었지요. 세례 요한이 오늘날처럼 무슨 패션리더도 아니고, 아니면 무슨 청탁을 할 만큼 권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인식에는 요한을 ‘선지자’로서 믿은 것입니다. 이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긍정하시며,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로 인정하십니다.
지금 비록 감옥에서 순교를 기다리지만, 진리를 전한다는 면에서는 선지자와 동급이고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권력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촉구하는 일을 했지만, 다른 선지자가 하지 못한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서 소개를 한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도록 말씀도 전하고 세례도 베푸는 일을 했지만, 다른 선지자들과 가장 차별적인 일은 예수님을 소개한 일입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10-11)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극찬을 합니다. 한 마디로 이제까지 출생했던 모든 사람들보다 낫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성자라고 부르는 석가모니나 마호메트나 공자, 맹자 같은 사람들보다도 더 위대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훌륭해도 영생을 얻는 길을 소개한 사람이 이때까지는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앞으로 들어올 사람이 많은 데, 천국에 오는 모든 사람은 이 세례요한보다 다 큰 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말을 돌려 말하면, 천국에 오는 사람은 예수님을 바르게 소개해서 많은 생명을 구원하고 영생을 얻도록 길잡이를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은 예수님이 주시지만, 그 복음의 통로가 되는 성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너무나 귀한 보배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른 구제나 봉사나 섬김의 사역을 많이 할 수 있지만, 우리가 결론적으로는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이끄는 것이 가장 주님께 인정을 받고 크게 상급을 받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확실하게 영생을 보장받습니다. 많은 일반 사람들이 저 혼자 예수 믿고 구원받겠다고 신앙생활하지만, 어느누구도 그가 구원받았다고 보증하지 못합니다. 그 보증하는 일은 ‘성령’님의 고유권한입니다. 많은 목회자들인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하면서 자꾸 믿으라고 믿으라고 강조하지만, 죽기 직전까지는 모르는 일입니다. 가장 구원의 확신을 확실히 갖는 방법은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의 일하는 곳에 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곳이든지 주님이 계실 수 있지만,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함께 하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계시며, 주님을 찾는 자에게 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누릴 수 있습니다. (롬8:14)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신분이 바뀌고, 창조주의 양자가 됨으로 천국에서 신분이 이 땅의 선지자와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종이고, 양자는 아들인데 어찌 비교가 됩니까!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2-15)
예수님께서 도전하십니다. 우리들이나 예수님 당시에 말씀을 듣는 백성들에게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면서, 침노하여서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구약의 율법을 통해서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길은 세례 요한까지입니다. 불가능했습니다. 이제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한 길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하나님께서 보내실 엘리야가 요한인데, 요한이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려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면, 요한이 전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복음은 아주 단순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모시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말로만,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세상 법이나 율법이 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그 가르침을 주인의 명령으로 알아듣고 순종하는 자가 곧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의 인침을 주십니다. 마치 정육점에 진열된 고기들에 등급을 표시하는 도장이 찍혀 있듯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 성도들의 이마에 성령의 도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6-19)
참 안타까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회개를 강조해도, 예수님께서 오셔서 많은 기적과 권능을 행해도 아무런 관심도 없고, 각자 자기 길로 갈 뿐입니다. 사실 둘 다 필요합니다. 우리 죄와 허물에 대해서 애통함도 필요하고 우리 자신이 구제받을 수 없는 큰 죄인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가 우리의 구원자를 갈급하게 구하고 찾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복음은 진정한 회개와 애통하는 자에게 참 기쁨과 자유를 줄 것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0-24)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은 고을들, 여기에는 벳새다, 가버나움 등이 나오는데,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다 망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5-27)
참 놀라운 결론인데, 하나님께서 선택한 자들, 예수님께서 선택한 자들이 아니면,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만, 가장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들이 앞으로 우리 자녀들과 어린 아이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이나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어떤 자아가 생기면,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기 힘들 것입니다.
또 하나의 루트나 경로가 있다면, 세상에서 실패와 좌절을 맛본 사람들, 교만하다가 세상에서 그 교만이 꺾이고, 겸손하게 된 자들, 큰 질병과 질고로 인해서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쩌면 예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8-30)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례 요한은 초림에 대한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우리들도 불완전한 지식과 오해와 제 고집으로 하나님을 오해하고 비뚤어진 마음이 있는지 돌아봅니다. 모든 꽃들도 흔들리면서, 바람과 비를 맞으면서 아름답게 꽃을 피듯이, 우리의 의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더 굳센 믿음과 체험을 허락하셔서, 성숙한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맹인이 보게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들려 주셨습니다. 죄와 정욕에 속박된 사람에게 참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 오늘도 우리에게 성령으로 임하셔서, 주님의 진리로써 참 자유함을 얻게 하옵소서! 세상은 여전히 주님을 거부하고, 복음을 배척하지만,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우리게 복음의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많은 기적과 이사를 보았던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강팍하게 되지 않도록 도와 주시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주님을 참 구주로 인정하여 예수님을 주인받게 영접하게 하옵소서!
주님 나라에 우리도 들어가게 하시며, 천국에서는 누구라도 세례 요한보다 크다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복음을 전하며, 생명을 살리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많은 영혼을 구원하여 아버지의 나라에 함께 들어가는 놀라운 은혜와 은총을 우리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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