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
예수님과 제자들이 여러 마을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시니까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주목하여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작은 것까지도 시비를 겁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예수님을 직접 걸고 넘어지기보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행동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출애굽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출 31:14)
안식일을 더럽히고 그 날에 일하는 사람을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매우 엄격한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더럽히고 그 날에 일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안타까운 것은 이 안식일에 일을 한다는 것의 세부 규정을 종교인들이 정하여서 그것을 가지고 권력을 삼았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3-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둔하시는데, 제자들이 ‘먹은 일’ 자체에 대해서 반론을 펴십니다. 역시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성경으로 풀어야 바르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급히 놉 땅의 제사장에게 가서 빵을 구했습니다. 일반인들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었고 마침 하나님께 드렸다가 새 빵을 구워 올리고 이전에 있던 빵을 내왔던 것이 있었습니다. 아히멜렉 제사장은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이 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율법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예시로 드셨습니다. 즉, 다윗이 평상시에는 그런 빵을 절대로 먹으면 안 되었지만, 굶주림이 심해서 지금 생명을 잃게 될 위기에 있으면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예시를 드신 것은 아마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러 여러 마을을 다니면서 상당히 시장하고 배가 고팠던 것 같습니다. 남의 밭의 이삭이라도 낫을 가지고 일부러 추수를 하지 않으면 손으로 조금 떼어서 먹는 정도는 그 당시 관습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필이면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런 일을 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지요.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5)
안식일에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빵을 만들어 굽고, 하나님을 위해 베푼 상에 가지런히 12덩이를 놓습니다. 벌려 놓는다고 해서 한자로 진설(陳設)이란 말을 씁니다. 즉, 안식일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서, 과연 누구에게 대접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위해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처럼 하나님의 아들을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겠습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6)
마지막으로 성전 안에서 행해진 일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전을 위한 일보다 직접적으로 성전보다 크신 하나님의 아들을 섬기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반론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선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7-8)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서 자신들은 권위를 갖고 일반 백성들을 착취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바르게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사보다 더 선행해야 할 것이 자비와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정하신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권위를 인정치 않으시며, 다른 구약 성경의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자,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워 하거나 회개하지 않고 더욱 예수님을 미워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9-10)
바라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어떻게든 예수님을 헐뜯고 비방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려고 하는데, 매수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다시 하려는 것이지요. 당시의 관행은 바로 죽을 사람이 아니면, 안식일이 지나서 다음날에 오게 합니다.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안식일에 의료행위 조차도 ‘죄’라고 보고, 그러한 자가 있으면 율법으로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11-13)
예수님은 그 당시의 목자들의 문화를 가지고 대답을 하십니다. 양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어도 사람들은 그 양을 건져서 구원했습니다. 양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큰 재산입니다. 그 양을 가지고 젖을 내어 우유(?)로 마시기도 하고 치즈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양을 구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양보다 더 귀한 사람은 안식일에 고치는 것을 문제 삼는지 오늘날 우리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기준이, 잣대가 한결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양보다 더 귀하고, 그렇게 예수님께 데려온 한 손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예수님이 또 계속 이동하면서 다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러 가실 텐데, 예수님을 만난 날이 안식일이라고 해서 인류 최고의 의사이신 분을 그냥 보내야 되겠습니까? 안식일이라도 붙잡고 고쳐주십사 애원해도 모자랄 판에 예수님을 정죄하고 심판하려는 저 악한 자들의 죄는 정말 큽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4)
예수님 때문에 자신들의 권위가 다 무너지게 생겼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아예 죽여버릴 생각을 갖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15-16)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논쟁하거나 다투기보다는 조용히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십니다. 계속 복음을 전하는데 집중할 수 있게,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말 것을 부탁하셨는데,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지요. 그래서 자꾸 방해꾼들이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조용히 일하시는데,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이미 예언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7-21)
예수님은 조용히 복음을 전하시고, 다툼을 하지 않는데, 문제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시비를 자꾸 걸어옵니다. 피하시지만,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역을 하시다 보니 끝내는 이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 주시게 되는 것이지요. 다투지 않고 진리를 선포하시면서 결국에는 승리하십니다. 그 승리는 역설적인 승리지요.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방 나라와 백성들까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기게 됩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2)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이렇고 저렇고 따지기는 하지만, 영적 권위와 권세는 전혀 없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은 예수님 뿐입니다. 때로는 말 못하는 것과 귀를 못 듣는 것이 귀신의 영향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근본 원인을 치료하심으로 장애인도 고치셨습니다.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3-24)
주님을 훼방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는 예수님을 오히려 귀신의 왕이 덮여 씌웠다고 신성모독을 합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 (25-27)
예수님께서 좋은 말로 타이르시지요. 일반 상식을 가지고 생각해 보면, 사탄끼리, 귀신끼리 서로 싸우고 다투면 어떻게 처음부터 사람이 귀신들려서 행동을 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탄을 힘 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말도 안 되지요. 또, 예수님 외에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바르게 되어 있는 사람은 귀신을 쫓아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레위인들이나 제사장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도 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일하는 것입니까? 왜 예수님만 물고 늘어지고, 자기들 가운데 일어나는 축귀(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제기도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들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 이런 저런 궤변을 늘어 놓으면서까지 예수님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탄이나 귀신들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비방하는 일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8-30)
예수님은 이 모든 일을 성령과 함께 하심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사람은 예수님, 인자를 말하고 강한 자는 ‘귀신’입니다. ‘집’은 사람의 몸뚱아리를 말하지요. 그래서 귀신이나 악한 영은 사람을 자기 집으로 삼아 들어가서 마음대로 조종을 하려고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셔서 참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이런 귀신의 일을 막고, 영혼을 자유하게 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반대자요, 예수님을 헤치는 사람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느 편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참 자유와 해방이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영혼 구원에 적극적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 편에 서서, 귀신을 쫓아내고 어둠의 일을 물리치고, 예수님의 주인되심, 그리스도 되심을 선포하면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31-32)
일단, 예수님께서 이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는 무지하고 오해와 자기 편협한 생각 속에 예수님을 바르게 인지하지 못한다고 해도 용서하시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뒤에 성령을 보혜사로서 보내실 때, 그 성령님의 음성을 거역하면, 그 때는 다시 기회가 없음을 엄중하게 선포하십니다.
오늘날은 성령의 시대입니다. 더 이상 육신적인 예수님의 모습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의 말씀이 들릴 때에 기회를 놓치지 말고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33-37)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하는 말을 하지 않으셨는데, 이 말은 예수님을 잡아 죽인 자들에게 대한 분노가 가득한 마태나 제자들의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한 열매를 맺지만, 바리새인들은 악하기 때문에 악한 말만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들이 예수님께 접붙여지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을 것입니다.
훗날 예수님 앞에 우리 모두 설 텐데, 주님을 훼방하는 악한 말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8-42)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주가 맞는지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많이 보고 들었음에도 현장에서 확인하고 혹시 속임수는 없는가 의심의 눈으로 보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표적을 보여 주지 않겠지만, 마지막에 한 가지를 보여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을 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마태복음의 결론을 가 보면, 역시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대에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 특히 솔로몬에게 지혜를 얻으려고 솔로몬에게 왔던 남방 여왕처럼 그런 자가 나타나서 믿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복음 전하는 자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가 남방 여왕처럼, 지혜로운 자이며, 하나님 나라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험해서, 주님과 함께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43-45)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 주셨지만, 그 영혼에 주님이 오셔서 계시지 않으면 다시 더 많은 귀신들이 그 사람에게 들어올 것이라고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도 믿는 도리를 끝까지 지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항상 인도함을 받고 보호를 받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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