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 요한의 머리를 받는 헤로디아의 딸>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1-2)
예수님이 태어났을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왕은 헤롯인데, 그 아들 헤롯과 구분하기 위해서 대왕이란 말을 붙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여러 아내를 통해 낳은 아들 넷이 헤롯 대왕이 다스리던 팔레스타인 땅을 나누어 다스리게 됩니다. 그 중에 14장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 BC20- AD39)입니다. 그는 이복 동생인 분봉왕(실질적으로는 영주의 개념) 필립이 죽자, 본처와는 이혼하고 자기 동생 필립 왕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을 합니다. (동생이 통치하던 땅까지 통합한 분봉 왕이 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일을 유대인들의 비난을 했는데, 당시 영향력이 컸던 세례 요한도 자신을 비난하자,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죽이게 됩니다. 분봉왕 헤롯은 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베풀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자, 예수님이 자기가 죽인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했습니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무리가 그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을 두려워하더니” (3-5)
사실, 제수씨를 아내로 맞이한 것보다 더 비난 받아야 할 문제는 ‘본처를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세례 요한처럼 날선 비판을 하지 않은 것은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때가 오지 않았기에 그러한 것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율법을 어긴 죄에 대해서 강도 높게 비판을 하자 헤롯은 세례 요한의 입을 막으려고 했지만,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 무리에게 반란의 빌미가 될까 염려했습니다. 당시 유대인을 잘 통치했다는 인정을 받아야 앞으로 선대에 통치했던 팔레스타인 지역을 온전히 자신이 통치할 왕으로서 로마 황제에게 신임을 얻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헤롯 안티파스는 세례 요한을 제거하고 싶지만, 감옥에 가두는 정도에서 자신의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지 못하게 막은 것입니다.
“마침 헤롯의 생일이 되어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거늘” (6-7)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헤롯 안티파스는 자신의 생일 잔치를 엽니다. 수많은 하객들 앞에서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서 헤롯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헤롯이 양녀(다른 문서에는 양녀의 이름이 ‘살로메’라고 나옴)에게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많은 하객들 앞에서 약속을 합니다. 무슨 금이나 보석이나 아니면 땅 같은 재산을 달라고 할 줄 알았는데, 이 헤로디아의 딸은 엄마에게 가서 무엇을 구할 지 의논합니다.
“그가 제 어머니의 시킴을 듣고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 때문에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서 그 소녀에게 주니 그가 자기 어머니에게로 가져가니라.” (8-11)
헤로디아도 요한을 증오했던 것 같습니다. 딸에게 일부러 왕 앞에서 춤을 추게 했을까요? 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어미에게 가서 무엇을 구하는 것이 좋을 지 말하는 것을 보면,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살로메도 굉장히 악하고 잔인합니다. 사람의 목숨을 달라고 요구하고 헤롯 왕은 자기 체면(體面) 때문에 자신의 권력으로 악행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아뢰니라.” (12)
이런 악한 짓을 한 헤롯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떠한 논평을 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셨지만, 마태가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일까요?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런 사악한 지도자를 제거하고 빨리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실 어떤 방책을 내놓을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13)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면서도 침묵하십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본디오 빌라도 앞에서 서게 되셔도 별다른 저항 없이 군중들에게 떠밀려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앞으로 우리 성도들의 미래에도 정치적인 박해나 억울한 재판과 희생을 당할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충분히 능력이 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하거나 아니면 본인의 신성한 능력을 가지고 악인들을 벌할 수 있지만, 그렇게는 쓰지 않으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14)
예수님은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배고픈 이들을 먹이실 뿐, 어떤 정의와 공의를 위해서 군사력이라든지, 심판주로서 권위를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 마지막 부분에 왜 그렇게 하셨는지 밝히십니다. 우리는 당혹감을 갖고 읽어 나가지만, 중단하지 않고 복음서를 읽어 나가겠습니다.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15)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않고 있습니다. 보통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준비하던지,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나눌 텐데, 아직도 예수님 곁에는 수많은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정에 돌아가도 딱히 무슨 저녁을 나누거나, 해야 할 일들이 있지 않았겠지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어찌 보면, 오늘날 노숙자나 걸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 줍니다. 제자들은 이들을 돌려 보내려 했습니다. 저녁이 되었으니 각자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잠을 자고 다음 날에 예수님께 찾아오든지 말든지 하라고 했을 텐데, 이들은 예수님 곁을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16)
제자들도 사람들을 보내고, 자기들과 예수님이 함께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먹을 것을 제자들보고 대라고 합니다. 제자들도 살림이 빠듯한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17)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먹을 것도 부족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르셨겠습니까?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제자들에게 먹을 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18-21)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자 마자 그 물고기와 떡덩이(빵이겠지요.)가 엄청나게 갯수가 늘어납니다. 그래서 무리들을 세면서 주니까, 성인 남자만 5천 명이 먹고도 남게 됩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숫자에 치지도 않았는데, 합하면 대략 1만 명 이상이 배부르게 먹고 남기게 됩니다. 이 기적을 보통 오병이어(五餠二魚-떡 5개 물고기 2마리)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이 나타난 사건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비유적으로 해석을 하면, 제자들을 향해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신 명령은 예수님께 받은 영의 양식을 베풀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진 작은 말씀, 복음이 수많은 사람을 먹이고 배 부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을 이웃과 나눠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니 목회자처럼 성경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해도 우리가 가진 작은 복음을 나눌 때,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셔서, 수많은 사람들의 영적인 결핍을 채우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2-23)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다른 복음서에도 모두 기록이 되어 있는데, 요한복음에 따르면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 때문에 배고픔을 해결하니까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오늘날도 대통령이나 고위 지도자가 되는 것은 일반 국민들의 ‘경제 문제’를 해결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단지 세상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보다 높은 차원의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 많은 사람들의 바램과 인기를 뒤로 하고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 산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제자들이나 우리 성도들이 모두 배워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세상의 경제문제 해결을 위해서 선택된 자들이 아닙니다. 물론 나누고 베풀고 섬길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세상의 인기나 부귀 영화를 위한 삶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사명을 바르게 인지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늘 하나님과 교제가 필요합니다. 모든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세상의 왕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이런 기적을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들도 영의 양식, 복음과 성경 말씀을 나눴다면, 그 나눈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을 전하기보다 자신이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주님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입니다. 계속 그 사명을 확인하고 겸손하게 그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기도하지 않고는 우리의 목적과 사명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4-25)
예수님께서 산에 가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 떠났습니다. 그 장소가 ‘벳세다’ 근처였는데, 예수님께서 홀로 산에 가실 때에도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셨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른 것이지요. 그런데, 바람이 불어서 풍랑이 이니까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뱃사람이 몇 명 있어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십니다.
우리들이 진실로 주님을 따르면, 세상의 풍랑이 우리를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망하거나 죽지 않습니다. 반드시 구원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먼 산에서 제자들이 고난 당함을 보시고 물 위를 건너 제자들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찾고 찾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입니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6-27)
예수님은 제자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데,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주님을 ‘유령’으로 오해합니다. 그래서 더욱 두려워하고 떨고 소리지릅니다. 설마,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을까 제자들은 믿지를 못했습니다. 믿지 못하면, 자기들만의 상상으로 예수님을 유령으로 단정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바른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도우러 오셔서, 예수님인지 귀신인지 분간을 못합니다. 우리에게 바른 믿음이 필요합니다. 담대함과 용기도 필요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28-29)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는 주님처럼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합니다. 베드로도 참 용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처럼 자신도 똑같이 물 위를 걷겠다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예수님처럼 잠시 동안 물 위를 걷습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 같은 사람도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 (30-32)
베드로가 예수님을 볼 때에는 물 위를 걸었는데, 예수님이 아니라 바람과 출렁이는 물결을 보니까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볼 때에는 믿음으로 기적을 만들고 놀라운 일을 경험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볼 때, 시험에 들고, 세상 속에 파묻혀서 믿음과 신앙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하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건져 주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들도 늘 세상에서 허우적 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약한 것을 아시고 늘 붙들어 주시고 세워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할렐루야!
때가 되면,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모든 바람이 사라질 것입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33)
이 이적을 기록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환란 속에서 구원을 받을 때, 우리도 역시 예수님을 참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34-36)
예수님께서 벳새다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산에 계시다가 풍랑이는 갈릴리 바다의 제자들을 향해 오셔서 함께 배를 타시고 게네사렛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많은 병자들이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낫겠다고 믿은 사람들에게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한 일은 많은 병자들을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믿음을 가지고, 많은 병자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주님은 역사하십니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 문제이지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신 말씀을 깊이 새기며, 어떻게 주님께 인도할 수 있을지 기도하며,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며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불의를 비판하고 지도자를 책망하면 목숨을 잃는 참 어려운 시대였는데, 오늘날은 그래도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언론이나 우리 시대의 양심들이 정의를 바르게 선포하고 또 그렇게 사회가 변하여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이 시대에도 불의와 불법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주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하고, 예수님처럼 정의와 공의를 행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도와 주옵소서!
갈릴리 바다 물결의 풍랑 속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헤매는 제자들을 구해 주신 예수님! 저희들도 여전히 세상 속에서 흔들리며, 방황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곁에 오셔서 주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함께 하옵소서! 길을 잃은 양이 되지 않게 하시고,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따라 우리도 가게 하옵소서!
주님은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하늘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저희들도 주님을 따를 때에 주님께로 많은 사람을 먹이고 주님께로 인도하는 참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주님! 오늘날도 영혼의 상처와 육적인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들이 많은데, 주님 앞에 믿음으로 나올 때, 치료하여 주시고, 강건케 하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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