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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15장 장로전통 논쟁과 가나안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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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69회 작성일 2024-09-25 15: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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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을 위해 간구하는 가나안 여인>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1-2)

 

 마태복음에는 잘 묘사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5병2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러한 무리들의 움직임에 편승하거나 내버려 두셨다면, 큰 사단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과 산헤드린 공의원들에게 들렸을 텐데, 기득권을 가졌던 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책잡아서 그 명성을 깎아 내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여론을 만들기 위해서 공작을 폅니다. 가장 예수님께서 자기들의 규율을 어기는 부분을 가지고 논쟁거리를 만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장로들의 규칙과 규율을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규칙이었는데, 이 규칙이나 전통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작은 문제를 시작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를 깎아내는 것이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3)

 

 예수님은 더 큰 하나님의 계명을 가지고, 그들의 규율과 규칙이 잘못 적용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즉, 예루살렘의 기득권 층은 사소한 규칙을 가지고, 유대 백성들을 가혹하게 지배하고 착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그 문제를 언급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4-6)

 

 당시 예루살렘 종교지도자들은 유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보다 자기들에게 더 많은 제물들이 바쳐지기를 원했습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고 모시는 것보다 그저 하나님께 제사를 많이 바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떤 죄를 짓던지, 예배당에 와서 그저 헌금이나 많이 드리고 가는 것을 원하는 목회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로만 카톨릭, 천주교에는 사제에게 고해성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옛날 이탈리아의 마피아들이 온갖 나쁜 짓은 다하고서 고해성사를 하면, 신부가 그 죄의 댓가로 성당을 지어 바치거나, 많은 헌금을 내게 하면서, 용서를 해 주곤 했습니다. 

 

 사실, 목회자라면, 예배당에 헌금을 내게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위를 고치고, 돌이키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가르쳐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돈 만 내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합니다. 이런 죄악은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 기득권자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혹은 일반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들이 거둬들일 재물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이야 권력을 가지고 자기 배만 채운다고 한들, 대다수는 필요악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지만, 종교 지도자들 만큼은 거룩하고 깨끗하길 바랍니다. 하나님도 최후의 보루로써, 이들을 세웠는데 하나 같이 자기 욕심에 빠져 있으니, 바르게 지도해 줄 지도자가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시고, 어떤 것부터 우리들이 실천하고 따라야 하는지 이런 논쟁을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7-10)

 

 저를 비롯해서 진실한 주님의 종이라면, 어떤 사람에 아부하거나 공갈협박해서 자기들을 따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전달하고 적용하는 것은 헛되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11)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몸이 죽을 수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사람을 악하게 만들거나, 죄인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과 마음으로 품었던 것이 입으로 드러날 때, 우리가 정말 악한 사람임을 드러내게 되지요. 그런 악한 말을 듣게 되면, 같이 물들지 않겠습니까? 그 장로들의 전통 때문에 악한 자들이 하나님께 물질을 가져다 바치면, 모든 죄가 용서되는 줄 알고, 마음 놓고 죄를 짓지 않겠습니까? 더욱 죄악이 판을 치게 됩니다. 

 

 꼭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권력자나, 부자나 함부로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하거나 무시하면, 그런 수치를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증오나 미움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은 말을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일반적인 말에도 그러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사람의 말은 얼마나 더 신중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말로 예수님까지 해하려고 하는 이들은 참 사악한 자들이지요.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2)

 

 예수님과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의 대화를 듣고 제자들은 안절부절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과 자기들이 어떤 정치적인 탄압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인 줄 알면서, 그런 기득권층에게 바른 말을 하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공권력을 동원해서 자신과 가족들을 해할까 염려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진리 편에서 옳은 말씀만 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3-14)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바리새인들이 영적으로는 맹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들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도 역시 동일하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가다가 멸망받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의 비유를 베드로는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십사 부탁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5)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합니다. 그것은 정말 몰라서라기보다는 어쩌면, 어정쩡하게 예루살렘의 기득권층과 척을 지지 않으려는 태도에 대해서, 진리를 바르게 선포하지 않는 우유부단함을 책망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16-20)

 

 예수님은 이스라엘 지역에서 이방 땅으로 자리를 옮기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박해를 피해 잠시 몸을 피신하는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곳에 구원하실 이방인이 있기 때문에 가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만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온 이방 민족에게도 은혜를 베푸시는 참 구세주십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1)

 

 예수님의 소문이 두로와 시돈에도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소문이 돌자 한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이스라엘 지경이나 유대인들만 있었다면, 감히 이방인이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도록 제자들이 길을 터 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2)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은 왜 두로와 시돈 지역을 가시는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이 가나안의 여인이 소리지르면서, 도움을 요청할 때, 아무런 응답이 없이 무시하시는 태도를 당연한 듯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3)

 

 제자들이 저지(沮止)하려고 했지만, 막무가내로 예수님께서 나아오는 여인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직접 쫓아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제자들이 12명이 되는데도, 이 한 여인을 감당을 못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한 어머니이지요. 자기 딸을 고치고 살리려는 그 모성애(母性愛)가 12명의 남성들보다 강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4)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대로 쌀쌀맞게 이 가나안 여인에게 대답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면, 난 돕지 않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거절을 당하여도 이 가나안 여인은 굴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5)

 

  여인은 예수님께 ‘절’합니다. 그냥 허리를 숙이는 인사정도가 아닙니다. 이런 ‘절’은 당시 로마 황제나 총독, 아니면, 신으로 믿고 있는 우상에게 절하는 태도입니다. 예수님을 그 정도로 본다는 의미지요. 그렇게 절을 했음에도 예수님은 더욱 쌀쌀맞게 모욕(侮辱)을 줍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6)

 

 예수님은 심지어 그 여인과 그 딸까지 ‘개’라는 모욕을 줍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일반 유대인들의 생각과 문화가 예수님에게도 동일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일부러 이렇게 가나안 여인을 시험하십니다. 만약에 처음부터 예수님께서 고쳐 주실 마음이 없었다면, 두로와 시돈 땅을 가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모욕을 받았지만, 그런 수치와 모욕을 무릅쓰고, 간구하는 가나안 여인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7) 

 

 ‘예수님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토라져서 떠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면서 ‘개들’도 자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그러니 부스러기 은혜라도 내려 주세요 합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장하는 자세를 취하는데, 이 여인은 참 겸손합니다. 자신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개나 돼지를 취급하더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사람 취급을 못 받더라도, 애완견 같은 입장이어도 좋으니, 주님의 은혜를 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이 얼마나 겸손한 자세입니까! 사실, 우리들도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입니까?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람들, 심지어 목회자라고 하더라도 평상시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을 하대(下對)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28)

 

 예수께서 이 여인의 자세와 태도에 감탄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믿음을 칭찬한 일이 별로 없습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에 믿음을 칭찬 받는 경우가, 이방인 백부장이나 이 가나안 여인 정도입니다. 우리들도, 이 여인처럼, 작은 일에 불평과 불만을 갖지 말고, 주님께 겸손히 간구하여 응답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딸을 고치시고는 그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유대인들 중에 병든 자, 귀신들린 자를 고치십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 (29-31)

 

 오늘날도 큰 병원, 유명한 병원에는 환자들이 몰려들지 않습니까? 용하다는 의원, 의사를 찾아서 지금도 수많은 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데, 예수님 시대에는 무슨 의사들이 많았겠습니까? 또, 혹 있다고 해도 가난하고 돈 없는 사람들은 가서 상담이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공짜로 치료해 주시고, 말씀 한 마디에 그냥 병이 낫게 되니까, 사람들이 너도나도 가까이 계실 때에 병자들을 데려오기까지 하니까, 수 천 혹은 수 만까지 예수님 곁으로 몰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광야에 있어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 떡을 얻으리이까” (32-33)

 

 갈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병을 고치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곁에 머무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는데, 제자들은 먹을 데도 없고, 우리가 그만큼 비용을 치를 수도 없다고 하지요. 얼마 전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의 의도를 잘 모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 하거늘” (34) 

 

 예수님께서 다시 ‘오병이어’처럼 기적을 베푸실 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눈치도 없고 참 센스도 없습니다. 눈치가 있는 제자들 같으면, 떡과 물고기를 예수님께 들고 와서 “예수님 축사해 주십시오” 할 텐데, 여전히 부족합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명하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와 그 생선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일곱 광주리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이 외에 사천 명이었더라.” (35-38)

 

 이번에는 예수님이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지요. 그 전보다는 사람이 적지만 그래도 4천 명 이상 아마 어린이, 여성들까지 포함하면 1만 명 이상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4천 명이나 1만 명이나 혹여 1만 명이나 10만 명이나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예수님은, 하나님은 다 먹이실 수 있습니다. 사실, 지구상에 70~80억 인구가 먹고 사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까? 그 시절, 그때 만 기적이 아니라. 

 

 우리들을 오늘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그 은혜를 깊이 감사하며, 항상 감사와 찬송을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견제하고, 그 권위를 무너뜨리려,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리새인들을 보낸 종교 지도자들을 봅니다. 그들은 사람의 교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저들의 행태를 따르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날 우리 교회와 많은 목회자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 되어, 바른 말씀을 선포하게 하시고,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왜곡시키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이 진리를 행하며, 주님의 바른 뜻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예수님의 작은 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수로보니게 가나안 여인을 위해 몸소 행하신 주님! 주님을 만나 간절히 절하며 간구했던 그 여인의 자세와 태도를 본받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시험할 때에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낮춰서 주님께 은혜를 간구했을 때, 칭찬과 구원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들도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라, 겸손히 주님을 간절히 바라고, 사랑하는 참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체험하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주님께 나아오는 자들에게,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들의 믿음이 자라게 하시옵고, 거룩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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