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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18장 서열(序列)논쟁과 교회의 권위, 용서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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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0,370회 작성일 2024-10-16 20: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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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간청하는 종>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1)

 

 제자들과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십니다. 공생애 3년 간을 보내시고, 마지막으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때에 제자들 사이에는 이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로마의 군대를 물리치시고, 다윗처럼 왕의 자리에 오르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유대 총독과 로마의 군대를 물리칠지 기대와 결연한 의지를 가졌겠지요. 한편으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의 위치는 어디쯤 될 것인지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서로 자기가 더 기여한 바가 크다고 높은 자리에 있을 것으로 착각합니다. 

 

 결국, 제자들끼리 서로 서열(序列)이 정해지지 않자, 예수님께 어떤 기준으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될 지 물어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3)

 

 그런데, 예수님께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인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느냐 마느냐에 대한 답변을 주십니다. 이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예수님이 정치적으로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올 것을 믿는데,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보이시며, 너희가 어린 아이들처럼 되지 않았고, 현재는 어린 아이들보다 못하다는 의미입니다. 

 

  어린 아이에 대한 수많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의 해석이  분분(紛紛)합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 아이처럼 겸손한 것을 의미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때묻지 아니한 순수함을 주장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해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로 이어서 예수님의 해석을 듣고, 의도하신 바 대로 읽으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4)

 

 어린 아이의 다양한 특성이 있겠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라고 하십니다. 아마 제자들도 자기가 다른 제자보다 잘났다고 자랑한 모양입니다. 이들이 지금 누구 앞에서 자랑질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천국가는데는 우리의 공로가 단 1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기준으로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면, 제자들도, 믿음의 후진들도, 오고 오는 모든 세대도 구원받을 인간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누구 앞이라고 떠들고 있습니까!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5-6)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태도와 자세를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런 보상을 해 줄 수도 없고, 그저 받기만 해야 하는 어린 아이를 따뜻한 사랑으로 돌보고 섬기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어린이를 상처주고 큰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죄를 지을 바에야 그냥 바닷속에 쳐박혀 죽는 것이 낫을 정도라고 비유하십니다. 

 

 성도라면, 우리가 해 온 일이라든지, 학벌, 지위, 명예, 재산 등 자랑할 것이 없을 뿐더러,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어린 아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며, 도우며,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 삶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 후에 하나님 나라에 이르렀을 때에 어떤 상급이나 보상을 주시는 것은 주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7)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 반이 넘게 계속되고 있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헤즈볼라 전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느 편이 되었든, 어린 아이들이 가장 큰 비율로 희생이 되고 있는데, 이 점에 대해서 하나님의 준엄한 말씀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명분으로도 어린이를 죽일 권리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그냥 무시하고 자기들의 증오와 복수심으로 그렇게 전쟁을 하지만, 그 심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아주 엄정하게 집행일 될 것입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8-9)

 

 어떤 면에서는 죄를 지을 수 없게 원천 봉쇄된 ‘장애인’들이나 ‘가난한 이들’이나 힘 없는 자들이 ‘복’을 받은 것인지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들은 온전한 몸으로 죄를 짓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건강한 지체를 가지고 연약하고 불쌍한 이들을 섬기며 봉사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그 일에 매진할 때에 죄를 지을 시간이나 헛된 생각이 떠나게 될 것입니다. 

 

 “삼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10)

 

 유대인의 ‘천사 사상’이 어느 정도 맞는 것이 예수님께서 성도를 돕는 천사들에 대해서 확인해 주시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주의 백성들을 위해서 하늘의 천사를 붙여 놓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장애인이라고 어린다고 가난하고 낮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깔보거나 업신여기면, 그 상황이나 언행에 대해서 하늘나라로 보고가 올라갑니다. 그런 죄를 짓고 있다면 회개하시고, 더 적극적으로 섬기시기 바랍니다. 혹시 주님께서 용서해 주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교만하게 굴면, 천국에 갈 수는 없겠지요. 이 땅에서는 잠시 잠깐 부귀영화를 누릴 지 모르나, 이 땅의 인생은 잠깐이고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데, 어리석은 사람은 이 땅만 바라보다가 망할 것입니다. 

 

 개역성경에는 11절이 없음으로 나오지만, 다른 사본에는 ‘인자가 온 것은 잃은 자를 구원하려 함이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의 참 제자는 주님의 일을 계승받아서 해야할 사람입니다. 주님의 일을 가장 잘 받든 자에게 주님께서 하늘의 자리를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12-14)

 

 예수님은 제자들이 누가 더 큰지 다투기보다는 예수께서 이 땅에서 이루고 계신 사역들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며, 적극적으로 그 사역을 감당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메시야는 비유적으로 양을 돌보는 ‘목자’로서 표현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은 길을 잃은 양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 양을 찾아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까지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 일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단 한 영혼이라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애쓰시고 일하시는데, 제자들은 본질적인 일을 놓아두고 서로 누가 높은 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5)

 

 예수님의 제자와 우리 성도들이 해야할 교회의 사명입니다. 죄 지은 형제에게 권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죄 지은 형제에게 가서 저주를 퍼붓고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죄인이 돌아오게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알고 마땅히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하는 것이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는 십계명의 첫 번째와 같지요. 우리가 살인이나 간음이나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를 창조하신 분께 마땅히 예배하지 않는 것이 큰 죄입니다. 

 

 또, 참 신이요, 창조주를 버리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도 큰 죄입니다. 만약에 자식이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아빠, 엄마 그러면서 따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완전히 눈이 뒤집혀질 일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창조주 하나님께는 인사도 안 올리면서, 귀신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데, 온갖 정성을 쏟는다고 해 보세요.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할지…

 

 우리가 이 외에도 살인이나 간음하거나 도둑질하거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지고 악한 일을 도모한다든지, 약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착취한다는 것도 잘못이지요. 이런 죄도 성도라면 마땅히 짓지 말아야 하고 그런 죄 가운데 있는 세상 사람들도 우리가 깨우쳐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6-17)

 

 그리고 이 사역은 혼자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두 세 사람이 필요하고 교회가 힘을 합해서 함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은 우리의 영향력을 벗어난 것이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슴 아프고, 안타깝지만 지옥불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18-19)

 

 이 말씀이 보통 교회에서 중보기도의 능력에 관해서 많이 인용되는데, 사실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의 치리에 관한 말씀입니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 제멋대로인 성도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서도 배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모든 교회의 결정이 그대로 되느냐(?) 그것은 다음 구절에서 설명이 됩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20)

 

 교회의 치리 과정에 예수님께서 영으로 내려오셔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종 결정은 예수님께서 하십니다. 교회 당회가 있고 교회 위에 노회가 있고, 그 노회들 위에 총회가 있지만, 모든 일이 총회 뜻대로 된다는 것이 아니라, 최종 권위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과정들을 보시고 적절하게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최종 권위는 오직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1-22)

 

 치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죄를 지은 형제에게 몇 번까지 넘어가 주어야 하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유대 전통으로는 3번까지만 잘못을 구하면 용서해 줄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한 7번 정도까지는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신의 관용을 자랑하려는 듯이 예수님께 묻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도가 없이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려고 하는 마음과 생각이 있다면… 

 

 교회의 목적은 정죄하고 판단해서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죄인을 회개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보통 한 인생에 대해서 그의 평생을, 약 80년이 넘도록 지켜보시며 용서해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실수할 때가 있지만, 다시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는다고 해서 거리낌이 없이 죄악을 행하다가 한 순간에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긴장하고 죄에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23-34)

 

 예수님께서 ‘용서’에 관한 교훈을 주실 때, 재미난 이야기를 통해서 깨닫게 하십니다. 23절부터 나오는 비유는 어쩌면, 예수님의 조크일 수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임금의 비유는 굉장히 과장이 되어 있다고 보지만, 이 이야기를 일반 피지배층인 식민지 백성의 이야기가 아니라, 고위층, 귀족이나 나라 대 나라의 이야기로 풀어 볼 수도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임금에게 달란트 정도의 빚을 질 수 있는 어떤 개인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야 하는 이스라엘 분봉왕의 세금인 것입니다. 헤롯 빌립이나 안티파스 같은 왕이 세금을 로마에 갖다 바쳐야 하는데, 그럴 능력이 되지 않습니다. 

 

 국내 정치를 잘 못한 것이지요. 갈릴리 지역이나 사마리아, 이두매 지역에서 모든 세금을 거두어 들여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분봉왕은 정치,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한 책임을 지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황제가 은총을 베풀었지요. 그 만큼의 세금을 다 거둘 수 없더라도 계속해서 분봉왕 노릇을 할 수 있도록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이제 분봉 왕으로서, 자기 백성들에게 100데나리온의 세금을 거두어 들여야 하는데, 그 세금이 충족이 되지 않으니까 백성들을 가혹하게 통치를 합니다. 너무 심하게 악한 정치를 하니까 백성들이 자꾸 봉기를 일으키고, 로마 황제에게 투서를 넣어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자는 자비와 긍휼로써 다스리지 않음을 고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통해서 먼저 가혹한 세금과 수탈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놓아주고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신 것입니다. 23절부터 34절까지의 이 비유는 이것 말고 전통적으로 ‘용서’에 대한 메시지로 해석을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해석도 되지만, 개인적 윤리에서의 ‘용서’의 개념보다 가진 자, 기득권 층, 권력자, 힘 있는 자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긍휼로 통치할 때,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질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35)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자녀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주님을 따를 때, 서로 다투거나 누가 높은 지 서열을 따지지 않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가 항상 서로를 돌아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며, 협력하게 하시고, 죄악에 빠져 주님과 멀어지는 형제를 보면, 다시 주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권면하게 하옵소서! 그럴 때라도 항상 온유하며 겸손하게 하시고, 언제든지 용서할 마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우리 지도자들이 주님의 성품을 닮아서, 항상 자비와 긍휼을 가지고 연약한 이들을 세워주고 살리는 정책들을 펼치게 하옵소서! 세금과 무거운 짐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없기를 원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 때에 슬기롭게 잘 이겨내며, 삶을 포기하거나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이 없도록 살피게 하옵소서! 우리의 북녘 동포들에게도 악한 정권으로부터 자유함을 얻도록 도와주시고, 남북이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우리 지도자들이 잘 준비하고 좋은 정책을 펼칠 수 있게 주님께서 지혜를 주옵소서! 

 

 감사하며, 재림주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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