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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19장 이혼과 영생에 관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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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회 작성일 2024-10-23 22: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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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청년의 비유>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1-2)

 

 예수님은 공생애의 마지막까지 병자들을 고치시고, 십자가로 점점 나아가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그런데, 마지막까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성도들의 삶도 죽는 날까지 시험과 유혹이 있습니다. 이번에 바리새인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이혼에 관한 사항’입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여성이 남성을 버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남자가 자기 아내를 버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들은 우리식으로 말하는 이혼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어떤 경우에 아내를 버릴 수 있는 지 묻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4-5)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의 선입견을 깨시고 시작하십니다. 즉, 이혼이라는 것을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 한 몸이 된 것을 나누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권위는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은 남자를 말하고 아내에게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 이 결혼에 원칙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가르치십니다.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6)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혼하는 일이 벌어지고 재혼하는 일도 있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종,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할 수 있다는 반론을 제시합니다.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7)

 

 신명기 24장에 따르면, 모세는 ‘수치되는 일’이 있을 경우에 한 해서 이혼증서를 써주고 이혼을 할 수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수치되는 일은 당대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였을까요? 율법의 학파에 따라서는 아주 엄격하게 규정하는 경우도 있고, 좀 포괄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샤마이 학파에 의하면, ‘간음’이라는 윤리.도덕적 기준을 제시하고, 힐렐 학파의 경우에는 음식을 하다가 태우는 일 같은 사소한 문제도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8-9)

 

 우리가 죄성이 있어서, 작은 실수나 허물을 가지고 남편이 아내를 버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지적하십니다. 작은 실수를 가지고, 남편이 아내를 매질하고 폭행과 폭언을 일삼으며, 아내들은 견디기 힘들겠지요. 그렇게 고통을 받고 사느니 차라리 ‘이혼 증서’를 써 주어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해 주라는 의미입니다. 이혼도 못하고 집 안에서 고통만 받다가 죽으면 아내의 인생이 참 불쌍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바에, 다른 사람에게 가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하라는 의미지요.

 

 그렇게 아내를 버리는 남성들의 큰 이유는 다른 여자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내를 내쫓고 새 장가를 드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율법적으로 무죄하게 다른 여인과 잠자리를 가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악한 의도를 가진 남성이든지 혹은 여성은 다 ‘간음’한 것이라고 하십니다. 십계명의 제 7번째 계명을 어긴 것이지요. 유대인들 사고 속에는 십계명을 범하면, 이스라엘 백성에서 제외됨을 의미하고 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 취급을 받습니다. 

 

 또, 여성의 입장에서 그냥 남편으로 쫓겨나면 어떻게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의 가부장주적 사회에서 이혼으로 버림받은 여인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여  살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혹여 이혼위자료를 많이 받거나 성년이 된 자녀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살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되면, 살기 위해 다른 남자에게 몸을 의탁하거나 창녀로 몸을 파는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이혼은 아내로 간음하게 만드는 죄로, 버린 남편이 한몸이기 때문에 역시 간음한 것에 해당됩니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10)

 

 예수님의 제자들도 남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매여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11)

 

 어떤 성욕에 이끌리지 않고, 금욕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아무래도 여기서는 ‘예수님’ 자신을 염두해 두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성경을 읽다보면, 바울 사도 같은 분이 어떤 가정이나 자식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는 분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억지로 바벨론에 끌려가는 다니엘과 세 친구들 같은 사람들이 원치 않지만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그런 일을 겪었고, 그런 상태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2)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우리 같은 기혼자들보다 미혼으로 인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이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오늘날처럼 자신의 인생쾌락을 위해서 비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죄만 짓고 불의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결혼하는 사람들은 자녀들을 경건하게 잘 길러 내면 하나님 나라에 숨은 공신들이 됩니다. 오늘날처럼, 전도와 선교가 어려운 이 때에 자기 자녀 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경건하게 길러낸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일을 잘 감당하면 하나님께 큰 상이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는 귀중한 보배니까요. 

 

 바로 이어진 말씀에 그렇게 부모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애들은 가라!’ 합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매우 분노하셨다고 나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13-15)

 

 예수님은 전에도 천국은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천국이 이런 어린 아이의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특별히 다른 어린 아이의 특징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는 단지 누구든지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천국이 주어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구원의 보편성과 은혜를 뜻합니다. 단 우리가 생각해 볼 문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도 다른 이가 주님께 나아오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서 아이들을 막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 성도들도 자만하거나 교만해서 어린 아이든지 누구라도 예수님께 나아와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는 자가 되어야 지, 걸림돌이 되면 안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6)

 

 마태복음에는 어떤 사람으로 나오지만 누가복음에서 보면, 부자고 관리인데 청년입니다. 젊어서 부귀영화를 다 가졌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 가지가 그의 생각에 걸림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 묻지요.

 

 “선한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눅 18:18)

 

 예수님께서 이 청년의 전제에 대해서 한 가지 잘못을 정정해 주시는데, ‘선한 이’는 하나님뿐이 없다고 하십니다. 아마 이 부자 청년의 마음 속에는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을 알아본다! 예수님을 선하다고 하면 나도 선하다고 인정을 받겠지…’ 하는 은근한 기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선하시지요. 그러나 그 청년이 선해서 예수님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언급된 부분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7)

 

 예수님께서 이 부자 청년이 율법을 잘 따르는 자인 줄 아십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자신이 없고, 또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도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짚어 내시고자 대화를 이어 가십니다.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18-19)

 

 십계명 중 5번째 계명에서 9번째까지 그리고 율법의 대강령을 주십니다.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0)

 

 이 청년이 정말 부족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21-22)

 

 이 청년에게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강했습니다. 십계명 중 10번째 계명을 일부러 예수님께서 빼시고 말씀하시다가 마지막 정점에 가서 네가 가진 부귀를 가지고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라고 하시니, 청년이 이 말씀은 도저히 따를 수 없겠다고 하면서 떠나갑니다. 

 

  사실, 탐심에 관한 문제는 이 사람만의 문제일까요? 모든 권력자와 힘있는 자들이 그렇게 탐심에 노예가 되어 있고,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조차 한탕으로 크게 돈을 벌고 싶어서 ‘로또’ 복권을 매주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진짜 본의는 사람의 어떤 수고와 노력으로는 영생을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그냥 놓아두면 자연스럽게 지옥에 들어갈 영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살 길이 있습니다. 은혜로 받는 영생입니다. 주님의 희생과 용서와 자비와 긍휼 때문에 죄사함을 받고, 죄를 버리고 선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3-24)

 

 유대인들은 부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복을 받아서 된다고 믿었는데, 예수님께서 정반대로 이야기 하십니다. 그당시에 부자가 되는 방법은 로마에 기생하거나, 권력을 가지고 착취하는 일이 다반사가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도 어쩌면, 이 부요함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데 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어차피 가난했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밑저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부자는 자기 재물을 바쳐야 하고 포기해야 하니까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어렵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25-26)

 

 오늘 우리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기에 아무공로 없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27-30)

 

 제자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는데, 무슨 보상이 없냐고 묻습니다. 주님께서는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이고, 이 땅에서 손해를 본 것의 갑절 이상으로 받으며 영생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먼저 되고 나중이 될지는 하나님의 뜻에, 예수님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혼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혼인을 귀하게 여기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정을 지키고, 거룩한 자녀를 길러내는 성도들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짝지어 주신 부부마다 이혼과 간음으로 범죄하지 않게 하시고, 신실하게 아름답고 거룩한 가정을 세우도록 은혜를 주옵소서!   

 

 우리 교회가 주님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제지하거나 막지 않게 하시고, 어린이든지 노인이든지 누구라도 주님께 나와 예배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을 잘 지도하고 섬기며 도와 주는 아름다운 교회 되게 하옵소서! 

 

 우리는 탐심에 이끌리어 살고 있습니다. 주님!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간 부자청년의 이야기가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게 하시고, 죽는 날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참 제자의 삶, 성도의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하며, 끝까지 사랑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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