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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주인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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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43회 작성일 2024-10-30 11:5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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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 품꾼의 비유. 크리스티안 빌헬름 디트리히 작>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1)

 

 예수님은 천국에 대해서 많은 비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0장의 말씀에서 천국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주인’을 소개합니다. 천국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표현하지 않고 마치 노동자와 사용자(혹은 자본가), 소작농과 지주의 개념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십니다.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2)

 

 2절만 읽으면, 여느 지주나 주인과 다를 바가 없이 하루 품삯, 1데나리온의 계약을 맺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1데나리온은 보통 성인 남성의 1일 품삯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시장의 가치에 따라서 통상적인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 구절 부터입니다.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3-4)

 

 주인이 왜 또 장터에 나갑니까? 품꾼들을 더 들여보내기 위함입니다. 이 주인은 장터에서 놀고 있는 품꾼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들에게 왜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어가서 일하라고 제안합니다. 왜 이 품꾼들은 아침부터 나와서 일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오전 9시가 되어서야 장터에 나온 이들을 불러들이는 주인입니다. 그만큼 일손이 부족했을까요? 분명한 것은 이들이 일할 것이 있을 정도로 포도원이 상당한 규모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5)

 

 주인은 또 다시 낮12시에 그리고 오후 3시에도 장터에 나가서 품꾼들을 부릅니다. 대체 이렇게 늦게 장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주인은 앞에서 오전 6시부터 계약을 맺고 일을 시키는 품꾼들이 어떻게 일을 잘 하고 있는지 관리하고 감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일을 잘 못하는 품꾼들은 일을 가르쳐야 하고, 야단을 치고 책망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시간에 주인은 단지 장터에 나가 전에 보았던 품꾼들이 놀고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지 계속 불러들이기만 하고 있습니다.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6)

 

 심지어 오후 5시에도 주인은 장터에 나갑니다. 그런데 이들은 분명히 주인이 오후 3시에 장터에 나와 보았을 때, 없었을까요? 주인은 이들을 오전 9시에도 낮12시에도,  오후 3시에도 장터에서 보았는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이 ‘일하고자 하는 자는 내 포도원에 들어오라.’ 하는 권면의 말을 들었을 텐데, 그 때는 무시하고 그냥 놀고 있었을까요?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7)

 

 이들에게도 주인은 포도원에 들어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제공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러운 품꾼에게까지도 포도원에 들어오게 할 수 있으며, 더 충격적인 것은 이들의 품삯을 동일하게 지급할까요?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8-10)

 

 그래서 먼저 와서 포도원에서 일을 했던 품군들이 주인을 원망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가 있습니까?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주인의 대답은 정말 주인다운 말씀이지요.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3-15)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16)

 

 이 예수님의 비유를 20장만 떼어서 볼 것이 아니라 19장에서 제자들이 주님을 위해서 가정을 버리고, 생업도 버리면서까지 따랐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서는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지 서열논쟁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모습들에 대해서 여기 20장에서 예수님의 비유에 간접적인 답이 들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포도원(천국)으로 들여 보내는 것은 주인이지 품꾼이 아닙니다.  이 주인의 열심을 보십시오. 아침부터 시작하여서 일을 마치기 직전(오후6시에 하루 노동을 마무리함)까지 계속 장터에 나가 품꾼들을 들여보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스스로 교회에 나오고,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일을 한 것 같지만,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한 일이라고는 주인의 인도를 따라 포도원으로 들어간 것 말고는 없습니다. 이 비유에도 품꾼들이 어떻게 일을 했는지에 대한 기사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까지 우리의 수고와 열심은 없었으며, 오직 주인의 노고와 초청만이 있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열심히 일한 품꾼들은 포도원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포도 열매입니다. 포도송이를 광주리에 한 가득 담았겠지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 무슨 대단한 수고를 하는 것 같아도, 우리가 얻는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따고 소유하는 자가 기쁨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 포도원 안에서 성실히 일하는 사람은 많이 누릴 것이요, 적당히 주인의 눈치를 봐 가면서 설렁설렁 일한 사람은 열매를 많이 거두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참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면 다른 사람이 그것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누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장터에서 놀고 있는 사람들처럼, 하루 하루의 생존을 위해서 근심하고 염려할 때에, 주님의 부름을 받고, 책임을 져 주는 상황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늘 불안하고 불평하고 남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앞에서 저는 이 주인이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십니다. 세상의 어떤 주인이 자신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일을 시키며 일한 것보다 풍성한 품삯을 치르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세상의 자본가나 지주와는 전혀 다른 가치 판단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일을 잘하고 효율성이 높은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듣고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품삯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17-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핵심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여러 번 듣기는 들어도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십자가에 달리시고 모든 인류의 죄를 담당하시고, 구원의 길을 여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이 가장 핵심인데, 예수님께서 고초를 받으시고 죽으셔야만, 우리가 치료를 받고 나음을 입고, 모든 죄로부터 용서를 받는 근거가 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만 믿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지 않으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고, 자신들의 꿈과 희망이 파괴될까 두려워서 감히 예수님께 더 여쭤보지 못합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0)

 

 예수님께서 굳은 결의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신데,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치맛바람을 일으키는 여인이 있습니다. 바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이지요. 남편은 세배대인데, 복음서에는 ‘살로매’라고 나옵니다. 샬롬의 여성형이지요. 그래서 뜻은 ‘평화’입니다. 남자로 이름지으면, ‘솔로몬’이 되고, 여성형으로 하면 ‘살로매’가 됩니다. 

 

 아무튼 이 살로매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 즉 임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들을 꼭 예수님 곁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해달라고 청탁을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21)

 

 참, 야망도 크지요.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그들이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22)

 

 내가 마시는 죽음의 잔, 순교의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묻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야고보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합니다. (cf. 행12장)

 

 “이르시되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23)

 

 예수님은 자리를 약속하지 않으시면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다른 제자들이 이 일을 놓고 분하게 여기고 시기가 가득하게 됩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24-27)

 

 하늘 나라에서 높고 낮음은 이 세상의 가치와 판이하게 다릅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가장 손해보고, 가장 희생하고 섬긴 사람이 천국에서는 대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8)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 가장 낮게 제자들과 모든 인류를 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원래도 가장 존귀하시고 위대하시며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시지만, 우리가 받은 한없는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가 마땅히 예수님을 가장 존귀하게 높이고 섬겨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들이 여리고에서 떠나 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르더라.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29-30)

 

 예수님께서 여리고를 지나가시는데, 시각장애인 두 명이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고 소리를 치며, 자기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눈을 보게 해달라고 간곡히 외칩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즉 그리스도로 알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31)

 

 예수님을 곁에서 따르는 사람들은 길가에 걸리적 거리는 시각장애인들을 귀찮아 하고 쫓아내려 합니다. 참 아쉬운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무리가 그러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은 예수님을 따르지만, 다른 사람은 예수님께 은혜를 받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도와 주십사 함께 부탁을 드렸다면 얼마나 그 모습이 아름다울까요?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들을 불러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우리의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 (32-34)

 

 비록 예수님 곁에 있는 무리는 무시하고 지나가려 했지만, 예수님은 머물러 서서 그들의 간청을 들으시고, 응답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믿는 사람이 신앙에 방해가 되고 걸림돌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부르고 찾는 일에 포기하지 않는 용기와 인내와 실천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만 바라고 믿고 찾으며 인내하며 견고히 서는 참 성도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를 계속해서 찾으시고 부르시는 그 음성에 기쁨으로 응답하게 하시고, 주님 나라의 일꾼으로 산다는 것을 행복과 기쁨으로 알고 항상 감사하며 일하게 하옵소서! 

 

 어떠한 방해와 장애물이 있더라도, 오직 주님의 음성만을 듣고, 주님을 찾은 두 맹인처럼, 용기와 담대한 믿음과 실천력을 주옵소서!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고 버릴지라도 주님만은 자비하시고 은혜롭습니다.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참 성도요, 소망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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