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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의 비유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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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50회 작성일 2024-11-14 06: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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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게오르그 플라처, "혼인 잔치의 비유", 1737년>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1-2)

 

 성전에서 예수님은 다시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복음의 핵심은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임금 즉 하나님의 잔치를 배설(排設)하심입니다.  그런데, 하늘나라 잔치의 비유를 이 땅에서 가장 비슷하게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혼인 잔치’라고 하십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어떤 신부를 염두해 두고 혼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혼인 잔치를 열어도 대게 하루 정도라고 하지만, 혼인식을 하고 한 끼 식사대접을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일가 친척들도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예식장에서 한 번 보고 끝나는 경우가 대다수라서 무슨 큰 잔치처럼 인식되지 않는데,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보통 7일 동안 잔치를 엽니다. 상당히 음식준비 뿐만 아니라 초대된 손님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 데까지 신경을 써야 됨으로 예산도 많이 듭니다. 

 

 우리나라는 신랑 신부의 신혼집 준비에 가장 많은 돈이 든다면, 유대 사회에서는 이 손님들 접대에 가장 많은 돈이 듭니다. 그리고 7일 동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 꽃을 피우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제대로 한 번 놀아보는 것이지요. 오늘날에는 평상시에도 음식이 풍족하지만, 옛날에는 이런 잔치가 있지 않고서야 고기나 풍성하게 먹었겠습니까? 그 비용이 비싼데… 그래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때이고, 7일간 일 하지 않고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오늘날의 노동보다 옛날에는 농사 짓는 일이나 목축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들텐데, 이 혼인 잔치 기간에는 그런 노동에서 해방되는 것에도 기분이 아마 가장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기쁨의 잔치를 하나님께서 여신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아들을 위해서’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의 주인으로 그 왕위를 넘겨 받음을 기뻐하며 성대하게 잔치를 베푸는 것입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3)

 

 하나님께서 종들(예언자, 제사장, 복음전도자 등)을 보내서, 이 잔치에 초대합니다. 먼저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었고, 유대인들이며, 후에는 우리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초대장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마음으로부터 싫어하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 싫다는 생각과 마음입니다. 대게는 자기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어떤 이들은 귀신이나 사탄에 매여서, 거짓 신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절하지요.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그들이 돌아 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4-5)

 

 하나님께서 한 번 초청하고 그만두지 않습니다. 한 종을 보내고 또 다른 종도 보내고, 계속 권면하지요. 이 잔치에 많은 음식이 준비되었고, 마음껏 즐기며 기뻐할 수 있다고 해도, 무시하면서 대꾸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이 마음에는 자기 밭이나 자기 사업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믿는 것보다 세상에서 돈을 벌고, 자기 성공과 출세가 더 관심이 있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 것은 없습니다. 온 세상의 땅도 다 하나님의 것이요. 모든 식물과 동물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으니까 자기 것이라고 믿고, 자기가 돈을 주고 샀으니까 자신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6)

 

 아주 일부의 사람들은 임금이 보낸 종을 잡아서 감옥에도 가두지만, 모욕과 비난을 하면서 때리고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자들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임금은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7-8)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사도들의 복음을 듣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꼭 예언이 되고 맙니다. 그 뒤에 역사적으로 AD 70년에 예루살렘은 로마 티투스 장군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되고, 약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앞으로 우리 인류가 당한 심판의 모형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인들만 이렇게 일부가 심판을 당했지만, 역사의 종말에는 거의 모든 인류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이 성경의 말씀은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고, 교훈을 주기 때문에 과거의 한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준비해야 하고 맞이할 미래에 대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때 유대인들처럼 동일한 잘못을 그대로 답습할 것입니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9-10)

 

 임금이 어느 한 동네를 지정해서 사람들을 초대했었는데, 이제는 그 동네를 제외한 다른 곳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혼인 잔치에 초대를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들이 나가서 악한 사람이든지 그냥 일반 사람이든지 가리지 않고 누구든지 초대를 해서 잔치의 자리를 가득 채우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발생합니다. 초대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임금이 요구하는 한 가지는 있어야 했습니다.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1-12)

 

 임금이 초대받아 온 손님들을 보러 왔습니다. 그런데, 잔치의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손님에게 옷을 내어 주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분명히 종들이 예복을 준비해 주었을 텐데, 이 손님은 그 예복을 거절하고 자기의 입은 옷 그대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손님은 잔치 자리에 입장이 불가하게 되었지요. 오늘날로 생각해 보면, 청와대에 몸 수색을 거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몸에 암살용 무기를 숨겨 가지고 올 수 있는데, 그냥 들어갈 수 없지요. 그것과 비슷합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13-14)

 

 한 사람이 그냥 잔치에 참여하려다가 붙잡혀서 감옥에 갖히게 되었지요. 이처럼, 많은 사람이 초청을 받지만, 한 번 더 걸러지는 상황에서 택함을 받지 못하여 문 앞에서 쫓겨날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잔치에 참여할 예복은 무엇입니까? 성경 안에서 이 예복의 답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초청을 받고, 그리고 가고자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생각지도 못하게 길을 가다가 초청을 받을 수도 있고, 어디 갈 데도 없고 환영받지도 못할 가난하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초대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초청을 받아서 하늘 나라에 들어오려고 하지만, 자기의 ‘의’로 나오는 사람은 천국의 문에서 거절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예복을 더럽힌 자들도 역시 하늘 나라에서 쫓겨날 것입니다.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시 132:9)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계 19:8)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성전에서 말씀을 가르치시며 선포하실 동안에,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도록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을 로마의 앞잡이로 만들어서 대중의 분노의 표적이 되게 하든지, 아니면 로마인들에게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게 만들려는 교묘한 언어플레이를 합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5-17)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는 말도,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는 말도 다 예수님이 박해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악의적인 질문입니다. ‘세금’이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그 틀 안에 예수님을 가두어 두려고 합니다. 세상의 거의 모든 정치적 이슈가 이런 식입니다. 어떻게 하든 비난과 악의적인 비방을 피할 수 없게 교묘하게 말을 만듭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18-22)

 

< 예수님 당대에 사용된 은화의 한 종류인 아우구스투스 데나리온 >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너는 가이사의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것이냐?’ 하는 반문(反問)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것입니까? 아니면, 어느 다른 사람의 노예입니까? 예수님은 각자 바칠 사람에게 바칠 것을 바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것이면,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그 날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일렀으되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 들어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장가 들었다가 죽어 상속자가 없으므로 그 아내를 그 동생에게 물려 주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그들이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23-28)

 

 사두개인들이 자신들이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들이대며,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혼법 문화가 있습니다. 대(代)를 잇기 위해서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형의 아내에게 동생이 씨를 제공합니다. 그렇게 결혼을 시켜서 아들을 낳으면 대를 잇는데, 7형제가 다 한 형수와 결혼을 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고 해 봅시다. 만약 부활이 있다면, 이 여성에게 남편이 7이나 있었는데, 누구의 아내로 되어야 하는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이 발생이 안 되려고 하면, 부활이 없어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예수님은 부활 때에는 생전에 맺었던 인간관계가 그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님을 설명합니다. 천사와 같은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처럼, 상하의 관계는 있는데, 인간 사이에서는 형제처럼 되고 맙니다. 인간관계의 끈보다는 수직적 관계가 가장 중요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9-30)

 

 사두개인들이 사독의 후손들인데, 제사장 그룹들이 가장 많습니다. 평생을 율법을 읽고 성경을 배워왔는데, 아는 지식은 오해와 편견이 가득한 모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 무리가 듣고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더라.” (31-33)

 

 사두개인들은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성경 속의 인물인 줄로 알았는데, 지금 하나님 곁에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꼭짚어서 말씀하시니까 그 말씀 안에 있는 많은 의미들을 백성들이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도, 성령께서 역사하셔야, 성경의 진리의 말씀들이 우리 가슴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4-36)

 

 계명 중에도 경중(輕重)이 있습니다. 거기까지 율법사가 알고 있는데, 그 계명 중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묻습니다. 신명기에 모세가 10가지 계명을 설명을 하고, 6장에서 보다 계명의 근본적인 의미를 밝히는데, 예수님도 역시 같은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 사랑이지요.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37-40)

 

 예수님께서 한 가지 덧붙이는 것이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밝히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의 관점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섬기는 그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순위는 성도와 성도들의 가정을 도와 주고 먼저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좀더 확장되면, 가족이 되고, 친척이 되고 이웃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41-46)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결코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다윗의 후손 중에 나셨지만, 성령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에 혈연적으로는 후손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윗이 성령으로 깨닫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시려 천국 잔치를 준비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기뻐하며, 감사와 찬송을 올려 드립니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예배하는 삶을 살며, 성도 안에서 아름다운 교제 속에서 주님 사랑이 더욱 깊어지게 하옵소서! 

 

 주님은 다윗의 후손 중에 오셨지만, 결코 다윗의 아랫 사람이 아니라 ‘주’십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기를 원하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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