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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23장 바리새인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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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131회 작성일 2024-11-20 18:5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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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이 사용하던 경문(tefilin) 왼쪽 2개는 이마에 오른쪽 2개는 팔뚝에 차는 것>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1-2)

 

 예수님은 제자들과 무리에게 ‘바리새인의 행위’에 대해서 잘못을 지적하시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선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는다고 비유하십니다. ‘모세의 자리’란 무엇일까요? 출애굽기 18장에 보면, 모세가 장인 이드로를 만나서 대화를 나눕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이집트에서 구원하셨는지 그 이적과 기사를 말하지요. 장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함께 제사를 올립니다. 그런데, 그 뒤에 잠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지내면서, 수많은 무리가 모세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하는 일을 봅니다. 

 

 시시콜콜한 작은 일까지 모세가 다 여호와께 기도를 올리며 묻고 재판하는 것을 보면서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충고를 합니다. 진실되고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자들을 세워서 작은 송사 사건을 맡기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사법조직이 생겨나지요. 이 때 기준이 어느 정도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체로 레위인들이 많이 포함이 됩니다. 

 

 그렇게 모세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율법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판결하여 죄인은 그에 상응하는 보응을 받도록, 오늘날로 치면 판사에 해당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 율법에 대한 지식과 해석입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 이스라엘 나라가 멸망 당하고 바벨론으로 유배를 갖다고 돌아온 후 이런 정치적인 질서가 재편이 됩니다. 레위인이거나 모세로부터 권위를 받은 사람들도 아닌 자들이 율법을 가지고 이런 권위를 가지려는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상당수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처음에 하나님의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를 가지고 굉장히 금욕적이며,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했는데, 점차 자신들 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 유대사회 전반에 걸쳐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고 했지만, 권력의 맛을 본 이들이 점차 그 힘을 가지고 백성을 억압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데 쓰기 시작하지요.  

 

 누가 허락한 것도 아닌 데, 남의 일에 간섭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스스로 재판관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착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3-4)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을 모두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율법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실천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의 하는 말 중에는 상당히 맞는 말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듣고 배울 만한 것이지만,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을 담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명령하고, 따르게 하지만, 정작 본인들은 실천하지 않는 모습을 예수님은 지적하십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5)

 

 우선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집중할 뿐 하나님 때문에 행동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로 경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는 상자인데, 다른 일반 사람들보다 큰 상자를 이마나 팔뚝에 하지만, 실제로 그 말씀을 따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저 큰 상자에 하나님의 말씀도 많이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 뿐이지요.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6-7)

 

 바리새인들은 ‘선생’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할 뿐,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나라의 지식인들이 자신의 학벌을 내세워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모습과 아주 흡사합니다. 정작, 국민들을 위한 봉사와 바른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과 자기 패거리의 성공만을 위해 일할 뿐입니다. 

 

 우리 나라 언론과 금융권과 건설사와 정치를 보시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 줘가면서 아파트에 투기를 하라고 조장을 했습니다. ‘폰지 사기’처럼, 계속해서 부동산 시장에 들어와서 소위 ‘영끌’을 부추기면서 빚쟁이를 만든 다음에 금융노예가 되게 해서 일평생을 돈의 노예가 되어 이자를 갚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아파트 값은 떨어져서 파산 상태를 만들지요. 이런 일이 10년마다 반복이 되면서, 수많은 가정들을 파멸로 이끌었습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지식인들이 말리지 않고 이런 것으로 돈벌이를 하고, 다른 이들의 피를 빨아먹으려는 행태를 보입니다. 말리는 사람들을 여론으로 호도하고, 악한 사람으로 프레임을 씌워서 입을 막아 버립니다. 나라의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금융사나 건설사에 뒷돈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식으로 온 국민들이 투기를 일삼는데, 정책적인 지원을 합니다. 오늘날 이런 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 너희의 아버지는 한 분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이시니라.” (8-9)

 

 바리새인들이나 오늘날의 지식인들이나 국민들과 백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고, 노예나 짐승처럼 여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평등하고, 존엄한 인격을 가진 자들이라고 하십니다. ‘형제’란 말은 한 아버지 밑의 자녀들로 모두가 아버지를 닮은 존귀한 자들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본적인 인간의 이해가 그렇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어떻게 우리를 형제로 생각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이것이 은혜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입니다.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의 지도자는 한 분이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0-11)

 

 예수님은 지도자는 한 분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은 “나만이 그리스도고 지도자다.” 이렇게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으셨지만, 겸손하게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진짜 지도자는 ‘섬기는 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섬겨 주시고, 자기 목숨을 내 주셨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지도자라고 불리는 자들은 자기 사람들에게만 이익이 되게 했지, 모두에게 도움이 되거나 섬기지 않았습니다. 역사를 보면, 예수님 빼고 거의 모든 지도자들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자기를 낮추는 것은 상대가 유익이 되도록 어떤 면에서 손해와 희생이 따릅니다. 그것을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자세로 감당하는 자가 진실로 섬기는 자이며, 예수님께서 인정하시는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이란 말이 있습니다. 꼭 좋은 본보기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 반대로 하거나 자기도 똑같이 실수하는 것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다면, 반면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저주와 책망을 듣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행위를 반대로 하면, 예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지 않겠습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책망을 듣는지 살펴 봅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3)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쁜 것은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가려 하지 않고, 남도 못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 가르침에 순복하려고 하지도 않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를 막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저주를 선포하십니다. 

 

 14절의 내용은 없는데, 어떤 사본에는 막12:40과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막 12:40)

 

 이들은 과부의 재산을 뺏었습니다. 어떻게 빼앗을까요? 남편을 죽게 만든 원흉이라고 하면서 협박을 하거나, 율법의 조문을 드리대면서, 희생제물을 강요했지요. 예수님께서 두 렙돈을 성전헌금으로 내는 과부를 언급하신 일이 있는데, 사실 그만큼 과부의 조그만 생활비 조차도 헌금을 강요하는 유대종교의 위선과 탐욕을 고발하신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15)

 

 바리새인들이 한 사람을 유대교인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것은 본받아야 하겠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통을 따르게 하니까, 위선적인 인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서기관 한 명을 양육하기 위해, 어린 아이를 아주 율법에 통달 하도록 외우게 만듭니다. 그리고 율법보조 교사(탈미드 하캄)가 되게 합니다.  율법 뿐만 아니라 율법 해석과 자기들의 전통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서 40세가 되면, 율법교사(하캄)가 되게 합니다. 이 서기관들이 대부분 바리새파에서 나옵니다. 이 서기관이 되면, 새로운 전승을 만들거나, 종교 규칙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따르게 합니다. 또 재판관이 되어, 민형사상의 최고 지위를 누립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키는 그런 조직이 되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예물이냐 그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16-22)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얼토당토 않은 맹세에 관한 교훈을 예수님께서 지적하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산상수훈 가르침에서 맹세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세’에 대해서 성전이나 제단보다도 그 물질에 대한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의 기득권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지요. 성전으로 맹세하는 일보다 성전에 드리는 예물이 더 그들의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성전은 어차피 사두개파들이 관여하는 몫이고, 자기들은 예물을 어떻게 취할 방도를 찾게 되면, 제사드리는 사람의 제물에 대해서는 꼭 봉헌하고 드리기를 잊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옳다, 그르다 하는 정도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맹세까지는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쁜 의도가 아니더라도. 그래서, 무슨 재산이나 목숨까지 걸면서 맹세하고 재판을 하는 일들은 악한 의도거나, 지나치게 무지한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큰 죄를 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좀 손해보고, 빼앗기더라도 송사하거나 싸우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23-28)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소득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율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판과 교육과 행사와 예식에 관해서 관여하고 소득을 얻었을 것입니다. 어찌보면, 목회자면서 재판관이지요. 그러니까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정죄를 할 때, 뇌물이나 예물을 받고서 눈감아주고 죄가 없다고 인정을 해 주는 것을 이익의 수단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선을 넘어선 탐욕과 방탕함이 이들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목회자와 사법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어떤 잉여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근로자나 생산자들보다 높은 소득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사회에 분쟁과 갈등을 조장하면, 중간에서 조정자의 역할을 하면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치인들이나 변호사들이 일거리가 많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회 갈등을 유발시키면 됩니다. 이상한 법(?)을 만들고, 국민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여러 가지 행정이나 민원에 관한 비용을 국민들에게 부담지우게 하면 됩니다. 그런 식으로 했던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분량을 채우라.” (29-3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심지어 자기 조상들을 욕하지만, 사실 이스라엘 조상들이 선지자와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데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조상을 욕하면서, 자기들 스스로는 옳게 여기지만, 그 행동하는 꼬라지는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들도 성경을 읽으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욕할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더 완악한 사람들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겠습니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서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따라다니며 박해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3-35)

 

 이 말씀을 읽으면, 상당히 예수님께서 격앙된 말씀을 하시는데, 아마도 마태를 따르는 마태공동체가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했기 때문에 그런 시대적 감정을 가지고 훗날 저주하듯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하면서 아주 조용하게 숨을 거두셨는데, 마지막 유월절-무교절 기간에 이렇게 저주하시고 책망하시는 듯이 말씀하셨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는 역대하에 나오는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말하는 듯합니다.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별명이 ‘주께 복을 받은 자’, 즉 ‘바라크-야’ 인데 줄이면 ‘바라갸’가 됩니다. 요아스 왕을 세우고 다윗 왕조를 구했던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요아스가 우상 숭배에 빠지고 죄악을 범하는 것을 더는 지켜볼 수 없어서 요아스 왕에게 직언을 했는데, 요아스가 성전 곁에서 그를 죽여 버립니다. 

 

 아무튼 유대인들은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 라고 하면, 아벨처럼 ‘의인’으로 여깁니다. 이런 사람을 죽인 것처럼,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의인들을 정죄하고 죽이는 데 많은 관여를 한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6-39)

 

 예수님께서 곧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게 됩니다. 그 뒤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온 예루살렘이나 유다나 사마리아를 거쳐서 복음을 증거하게 되는데, 얼마 뒤 AD 70년 경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그 안에서 유대교를 따라 유월절을 지키러 왔던 많은 유대인들이 몰살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예언이 실현이 된 것입니다. (36) 

 

 그리고 재림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예루살렘에서 더 이상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종말 때에 다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타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처음에는 율법대로 말씀대로 살아 보려고 바리새파가 되었지만, 어쩌다가 세속에 물들고, 탐욕과 정욕대로 살아가는 변질된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주님! 저희들도 역시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주님의 성령을 부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고 항상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배워야 하지만, 그 행실을 따르지 말라 하셨사오니, 우리들도, 외식을 버리고 겉과 속이 온전히 주님을 따르게 하여 주옵소서! 열심으로 주님을 섬기며, 주의 백성들을 섬기게 하옵소서! 모든 영광은 주님께 돌리고 언제나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하오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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