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1)
24장에 이어서 예수님은 종말의 때에 벌어지는 일들을 이야기로 풀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와 사건 중에는 혼인에 관련되어서 많이 풀이되고 있는데, 종말 때에 일어나는 일도, 마치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났던 사건들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설명하십니다.
여기 처녀 10명은 신부가 아니라 신부를 돕는 들러리입니다. 신랑은 혼인 잔치를 준비하고 신부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옵니다. 신랑집으로. 그런데, 들러리 가운데에도 전혀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야기가 흥미롭게 진행됩니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2-6)
반은 준비성이 있어서 등잔과 기름을 모두 준비했는데, 5명은 등잔만 준비를 한 것이지요. 그 때 등잔이 매우 작아서 기름통을 따로 들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시간이나 불을 키면 곧 기름을 넣어주어야만 했던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미련한 자라고 여기 번역이 되었는데, 개역개정 성경은 아무 점잖게 번역한 것이고, 어떤 성경은 ‘얼빠진 사람’이란 뜻으로 해석을 합니다. 아무튼, 그 미련한 들러리들은 신랑집이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것이고, 설마 신랑이 밤늦게 올까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밤중에 신랑이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부와 함께 신랑을 따라가야 하는데, 자신들의 등잔에 기름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합니다. 그래서 준비된 슬기로운 들러리들에게 나눠쓰자고 했는데, 그만큼의 분량이 없기에 빨리 가서 기름을 사오라고 준비된 들러리 친구들은 말하지요.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7-10)
이 얼빠진(?) 친구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은 준비된 들러리와 신부와 함께 신랑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기름을 이제 사서 신랑집에 들어가 함께 혼인잔치를 누리려던 그 들러리들은 문전박대를 당하고 맙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11-13)
예수님 때에도 대제사장, 사두개인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심지어 유대인들이 전혀 천국에 대해서 준비되어 있지 않았음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자기들에게 임했음에도 그 나라를 맞이하지 못하는 유대백성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크게 실망하셨습니다. 말로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기다린다고 하면서, 율법을 연구하고 여러 가지 규칙들을 만들어서 실천하려고 했으면서도 실제 하나님 나라가 임했을 때 그들은 그 나라를 거부했습니다.
예수님 부활승천 이후, 이 마태복음을 읽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려고 엄청난 희생과 노력을 했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때로는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곧 오신다는 예수님의 재림이 속히 이뤄지지 않자, 서서히 세속주의에 빠지고, 안일한 삶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 때 마태는 자기 공동체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고 권면하기 위해 예수님의 이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로, 아직도 오시지 않은 예수님의 재림을 그래도 잊지말아야 한다는 것에 강조점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때 그시대의 성도들의 등불을 밝히듯이, 오늘 우리의 시대에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빛을 비춰야 할 것입니다. 기름을 다양하게 은유하지만, 진리를 밝히는 에너지, 힘으로써는 성령을 의미하고, 또 신랑을 본다는 관점에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랑집으로 안내하고 함께 간다는 의미에서는 성도들의 선한 행실(복음증거, 봉사, 섬김, 구제 등)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이 모두를 의미하겠지요. 외형적으로만, 빛을 비추지 못하는 등잔을 가진 들러리가 아니라 깨어 할 일은 하는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14-15)
이제 우리가 많이 들었던 ‘달란트 비유’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종말 때에 관한 비유와 계속 연관지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제 얼마 있으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늘로 올라 가실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그리면서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겠지요. 그 종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소유를 맡기십니다. 그리고 각 사람에 따라서 금액이 차이나게 큰 돈을 맡기지요. 사실, 달란트는 원래 무게 단위입니다. 1달란트는 약 30kg 정도입니다. 금 30kg이면 엄청난 금액입니다. 오늘날로 환산해도 수십 억 내지 수백 억이 될 수 있는 금액입니다.
그러나 저는 돈으로 보기보다 우선 ‘무게’로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돈’을 맡기셨습니까? 돈이 아니지요. 소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소유, 그것은 무엇일까요? 아무튼, 그 소유는 무게감이 다릅니다. 그 소유를 맡은 종은 세 부류로 나오지만, 꼭 3명일 필요도 없고, 꼭 5, 2, 1달란트일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자 다른 무게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새” (16-19)
아무 무거운 소유를 받았던 종은 즉시 가서 장사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사꾼이 되었습니까? 이 말은 꼭 장사해서 이문을 남기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종은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헤아려서 성실하게 일했다는 의미입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역시 그렇게 했고요. 이 사람이 꼭 첫 번째 종처럼 많이 남겨야 하는 의무는 없습니다. 그냥 주님의 뜻을 잘 알고 있기에 성실하게 일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땅에 파묻었습니다. 당시 전쟁이나 피난 등으로 땅 속에 재물을 숨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식으로 주인이 다시 오기까지 그냥 보관만 하고 자기가 해야할 일들은 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얼마 후에 돌아왔습니다. 그 기간이 얼마인 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인은 종들을 불러서 어떻게 일했는지 결산을 합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그것입니다. 반드시 돌아와서 결산을 보겠다는 것이지요.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20-23)
성실했던 두 종류의 종들은 자기 주인에게 그동안에 일했던 성과를 자랑하고 공개합니다. 주인은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새로운 임무를 부여하지요. 그러나 한 종류는 그냥 주인의 것을 흙에서 꺼내어 돌려 줍니다. 그리고 그 종은 자기가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지요.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24-25)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 대해서 오해와 편견과 불신을 갖고 있습니다. 모든 게으름과 불성실함을 주인의 탓으로 돌리며, 자기는 주인이 맡긴 소유를 그저 손해를 끼치지 않고 잘 보관하였다가 돌려 드린다고 합니다.
주인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26-30)
한 달란트 맡긴 종을 책망하고 모든 지위를 박탈하며, 주인의 집에서 쫓겨남을 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하신 것은 우리가 예수님이나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거나 불신과 편견을 갖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고 할 때, 그저 신앙 생활만 열심히 한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각자에게 주신 재능과 능력대로 서로를 섬겨야 하며, 성실과 근면으로 일해야 합니다.
그 일과 직업과 여러 가지 상황이 다 다릅니다. 무게도 다릅니다. 우리 같은 보통 시민과 수많은 범죄자들을 재판해야 하는 법관과 삶의 질이나 무게가 다르듯이 말입니다. 그 맡겨진 일에 주인의 뜻을 헤아려서 성실하게 사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물론, 성도니까 복음도 전해야 하고, 예배도 드려야 합니다. 그런 모든 것을 포함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주님의 뜻을 헤아려서 각자 맡은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셨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고 믿고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결산하십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의 재림이 오지 않더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죽어 주님 앞에 이를 때에라도 반드시 결산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2, 5달란트를 받은 사람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1-33)
세상 끝날에 주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2 그룹으로 분리를 시키는데, 한 쪽은 양이라고 하고, 한 쪽은 염소라고 합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유목을 할 때, 평상시에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해서 풀을 뜯게 해도, 집으로 데리고 와서는 양의 우리와 염소의 우리를 구분해서 넣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양의 편이 이른 바 천국에 들어갈 사람들이고, 염소 편의 사람들은 지옥에 갈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심판의 기준이 ‘예수님’입니다. 이들에게 구분된 모습은 어떤 외형이나 외모가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겼는지를 따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땅에 계시지 않았으니 문제입니다. 두 편 다 자기들은 예수님을 돌봐 드리거나 외면했거나, 예수님께 무언가 잘했거나 잘못하지 않았다고 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34-39)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1-45)
양쪽다 예수님께 잘못한 것이나 잘한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아 생전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에서 하시는 말씀을 잘 새겨 봅시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0)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5)
임금님이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곧 예수님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님을 우리가 지금은 만나뵈올 수 없지만, 오늘 우리 주변에도 가난하고 헐벗고, 약하고 외면받고, 소외된 분들은 많습니다. 그런 분들을 돌보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예수님을 외면하고 멸시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단지 예수 믿었다고 교회만 들락거린다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이라면, 가난하고 소외되고 약한 사람을 예수님으로 여기고 잘 도와주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창세기에 보면,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라’ 하신 말씀도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거짓된 것이고 그 믿음도 거짓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 때에 이 모든 것들을 드러내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좋은 일하고 선한 일을 해도 인정을 못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아무런 유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도움 받은 사람에게서 고맙다는 말조차도 받지 못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선을 베풀 수 있을 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천군천사들 앞에서 그의 선행을, 예수님을 섬긴 것을 만 천하에 드러내어서 칭찬하시고, 천국도 허락하시고, 영생도 주시고, 잔치를 배설해서 기쁨도 즐거움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착한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혹시 잠들어 있지 않은 지 두렵습니다. 깨어 등불을 밝히며 주님을 기다리게 하시고, 빛을 비추며, 주님을 맞이하는 신실한 다섯 처녀들이 되게 도와 하옵소서! 준비하지 않는 미련한 다섯 처녀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또,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소유가 무엇인지 각자 찾게 하시고, 주님의 뜻을 헤아려 맡은 바 임무와 사역을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각자 삶의 무게는 다르지만,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님께서 주셨음을 믿고, 신뢰하며 일하게 하옵소서! 이 땅의 지극히 작은 자에게 관심을 갖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돕고 섬기게 하옵소서! 장애인, 가난한 사람들, 마음 속에 울분을 갖고 죄를 범한 죄수들. 그들이 우리의 예수님입니다. 관심이 없었다면, 이제부터는 관심을 갖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선한 행위와 돕는 손길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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