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요기도회

[마태복음] 1장 예수님의 계보(系譜)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071회 작성일 2024-05-29 14:38:03

본문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제자요, 12 사도 중에 세리(관세를 받던 관원)였던 마태가 전하는 기쁨의 소식(복음)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지탄을 받는 식민통치 시대의 로마의 관원이었지만, 그 모든 부귀와 영화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가 이 복음서를 쓴 것 나사렛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야이심을 전해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섬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특히 당대의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로마 황제를 넘어서는 진정한 세상의 왕이자 하늘 나라의 왕이심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유대적인 특징이 있으면서, 동시에 반 유대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말씀대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증거합니다. 이방 민족의 왕(헤롯대왕)이나 로마의 총독이 아무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방해하고 저지하려고 해도, 궁극적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선포하며,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열렸음을 장험하게 선포합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예수님의 계보(족보)로 시작합니다. 그냥 일반 사람의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시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가장 강한 나라를 이뤘던 다윗 왕의 혈통을 가진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의 증표로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심을 성경에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 

 

  예수는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는 메시야의 헬라언어 표현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인데, 이스라엘은 ‘왕, 예언자,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고 그 사역을 시작합니다. 원래 구약성경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한 가지 직무를 전적으로 담당했습니다. 왕이면 왕으로, 예언자면 예언자로서 일을 했는데, 앞으로 마태복음을 읽어나가게 되면,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무를 다 담당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3가지 직무를 모두 담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2절부터 17절까지는 정말, 유대인들이 아니면, 읽기가 싫을 정도로 계속 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있습니다. 위 계보의 그림을 참조하면서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2)

 

 인류의 역사도 그렇지만, 계보도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다음 세대가 그 다음세대를 “낳고 낳는” 역사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42대를 걸쳐 누가 누구를 낳았다고 기록합니다. 인류 역사도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다가 누구를 낳고 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지요. 한 조상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한 인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고 또 그 인간은 또 다른 이를 낳고, 길러서, 그가 또 낳고 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계보를 우리 나라와 비교하면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족보를 기록할 때 장자를 기준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는 단순한 혈통적인 장자로 대를 이어오지 않았습니다. 혈통의 장자를 따라 족보를 기록했다면, 아브라함의 장자는 '이스마엘'이 됩니다. 또 이삭에게는 에서가 맏이이지요. 야곱도 맏아들은 르우벤입니다. 왜 혈통의 장자를 따라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성경을 통해서 유추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은 이러하니라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가서 족보에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되지 못하였느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에게서 났으나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 (역대상5:1-2)

 

 르우벤은 장자지만 그의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야곱)의 아들 요셉 자손에게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침상을 더럽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불이나 베개를 더럽게 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창세기 35장을 읽어보면, 르우벤이 그의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근친상간을 범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 지은 죄로 인해 르우벤은 장자의 직분을 상실했고 장자가 받을 수 있는 유업과 혜택을 빼앗깁니다. 르우벤에게 돌아가야 할 야곱의 재산 중 12아들에게 할당될 몫의 2배를 요셉이 물려 받습니다.그래서 성경에 요셉지파라고도 하지만, 요셉의 두 아들이 에브라임 지파, 므낫세 지파로 12지파의 한 분깃이 됩니다.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돌아갔지만, 또 다른 장자의 권리인 가문의 ‘대표자의 권리’는 유다에게 갔습니다. 이 권리를 ‘왕권’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야곱의 가족들이 어느 작은 부락이나 촌락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후 유다 지파에서 왕국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다윗 왕이 나오고 또 다윗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합니다.

 

 장자의 권리 가운데 제사를 주도해서 집례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도 셋째 아들인 레위에게 돌아가 훗날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시고, 만민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즉, 자신을 희생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하도록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의 역할을 하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은 이미 친히 담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서의 내용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명령인 율법과 그 계명들을 일반 성도들에게 제시하시고 친히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언자의 직무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3)

 

 2절과 다르게 3절에는 아내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말’입니다. 이 다말의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한참을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대신에 유투브 링크를 하나 소개합니다. 시간을 내셔서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cf. 로고스커뮤니티, 유다의 며느리 다말에 대한 새로운 평가

    <https://youtu.be/qGfHrlIYUQc?si=GnIV0uF-N5T3WUCi>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5)

 

 4절은 건너뛰고, 5절에 보면, 이방 여인의 이름이 두 명이나 언급됩니다. 굉장히 배타적인 이스라엘 문화에서 이방 여인이 그리스도의 계보에 등장합니다. 그 여인들의 자세한 이야기는 룻기(모압 여인)와 여호수아서(라합은 가나안 여인)를 통해서 살펴 보십시오. 마태가 전하는 이 복음에 유대인들에게만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이 아님을 이 계보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즉,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온 이방 세계에도 주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이 계보를 통해서 증명합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6)

 

 6절에도 한 여인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이름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야의 아내인데, ‘밧세바’로 사무엘하에 나옵니다. 우리야가 헷 사람인 것으로 봐서 아마 밧세바도 이방 여인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이 여인은 다윗의 간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아내가 되었는데, 다윗은 자신의 간음죄를 숨기기 위해서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 장수 우리야를 암몬과의 전쟁의 최전선에 내 보내어서 함정에 빠뜨려 죽게 합니다. 그리고 밧세바를 다윗이 아내로 취했는데, 그 때 임신한 아들은 하나님께서 죽게 하시고 그 다음에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다윗이 훌륭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인간적인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을 짓도록 허락하시지 않고 솔로몬이 그 대업을 이어가게 하십니다. 이 부끄러운 이야기가 있는 우리야의 아내를 여기 그리스도의 족보에 마태는 왜 넣었을까요? 이름도 뺐다면, 아예 언급자체를 하지 말고, “다윗이 솔로몬을 낳고” 하면서 넘어갈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훌륭한 다윗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원래부터 죄의 노예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심은 이 죄 많은 인생에게 영원한 소망과 용서와 사랑을 베푸시기 위한 것임을 극적으로 드러냅니다. 죄 많은 사람도 이 계보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깨끗하고 착하고 선한 사람만 이 계보에 들 수 있다면, 누가 어떤 사람이 가능하겠습니까? 죄로 점철된 우리 인간의 세계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심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7-14)

 

 7절부터 14절까지 다윗부터 요시야까지는 그야 말로 다윗 왕조의 왕들입니다. 물론, 그 다음 15절의 여고냐도 왕위에 등극했지만, 얼마 안 있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 갑니다. 그리고 요시야의 장남인 여호야김도 여호아하스 뒤를 이어 왕이 되었지만, 그는 악한 왕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의 계보에서는 제외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1-15)

 

 11절부터 15절은 바벨론 포로기에서 이어져 온 메시야의 계보입니다. 어떤 환경과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계보는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시고 진노 중에라도 은혜를 베푸신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 숭배를 했고,  하나님의 계명과 명령들을 어겼습니다. 마땅히 심판을 받아 멸명 당하고 지구상에 그 민족의 이름이 사라져야 할 것이지만,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가 예수님까지 이어져 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6)

 

 이제까지 기술된 남자에게서 또 아들이 태어났는데, 16절에는 요셉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 기독교 신조의 ‘동정녀 탄생’이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냥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의 씨로 태어난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되셨지만, 하나님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입니다. 태초부터 계셨지만, 이 땅에 오실 때는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계속됩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17)

 

 이 족보에 14대, 14대, 14대 이렇게 시대를 3분할 해서 다윗 왕조 전과 다윗 왕조 시대와 바벨론 포로기 시대로 나누었는데, 이 14라는 숫자는 ‘다윗’의 히브리어 철자의 숫자 변환의 합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아라비아 숫자 대신에 히브리어 자음으로 숫자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히브리어 철자를 숫자로 바꾸면 14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유대인들은 ‘게마트리아’라고 해서 히브리어 알파벳의 숫자값을 가지고 연산을 하곤 했습니다. 

 

 14, 14, 14는  다윗, 다윗, 다윗. 예수님은 회복될 이스라엘의 메시야이며 왕이심을 선포하는 뜻입니다.  사실, 가운데 다윗이 두 번 들어가 있고, 족보에서 명단을 뺀 사람도 있어서 어거지로 맞춘 듯한 문제는 있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기다려온 메시야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한 것 같은데, 마태가 강조하든 하지 않든, 예수님은 메시야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억지로 여러 가지 상징들이나 단어를 맞추고 여러 글들을 인용하는 것도 중요해 보이지만, 이런 인위적인 것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잘 하는 것이 아니고, 진실되게 우리에게 깨우쳐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리가 잘 전달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아쉬운 대목입니다. 

 

 18절부터 마지막 25절까지는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서 어떻게 나셨는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8-19)

 

 유대인 사회에서 결혼 풍습은 참 신기합니다. 가문 대 가문으로 혼사가 결정되면, 예식부터 올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정혼을 합니다. 정혼을 하면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입니다. 그러나 신부가 신랑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남편될 사람은 아버지 밑에서 집을 짓고, 농사지을 곳을 준비합니다. 신부는 약 1년 간 시댁의 문화와 가풍을 익히고 요리하는 것이라든지 살림을 배우게 됩니다. 

 

 신랑이 집을 완성하고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게 되면, 그제서야 신부 집에 가서 혼인 잔치를 합니다. 약 7일간 이어지는데, 그 잔치를 마치고, 신부를 신랑집으로 데려옵니다. 이 때부터 이 부부는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신부에게 문제가 있으면, 모세의 시대에는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고, 이혼증서를 써 주고 이혼하게 됩니다. 

 

 마리아의 정혼한 남편이었던 요셉은 공개적인 이혼 대신에 마리아를 생각해서 그런 상황에 이르지 않고 조용히 이별을 하려고 했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이 모든 일들이 마리아의 부정(不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을 알게 하지요.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0-21)

 

 예수님은 우선, 다윗과 같은 정치적 메시야로 보내심을 받은 분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로마와 같은 이방 나라로부터 구원할 다윗 왕과 같은 분이 아니기 때문에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한 메시야십니다. 

 

 오히려 세상 나라의 임금이 되는 것이 쉬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천군을 데려 오실 수도 있는 분이요,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은 말씀으로 로마 군대를 한 순간에 쓸어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우리의 죄로 인한 심판의 문제는 당장에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노예가 되어서 그 기본적인 노예습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고치는데는 우리의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무엇이 선인지 알아야 하고, 그 선을 위해서 연단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2-23)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셨고, 지금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지만, 우리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성령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날마다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선을 배워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성화되기를 축복합니다.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24-25)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마태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다시 배웁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속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아름다운 삶이 되기를 소원하고, 말씀을 되새기며, 말씀 가운데 계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마태와 같이 우리도 복음을 잘 듣고 이해하고 믿음이 생기고, 복음의 증인이 되길 원합니다. 

 

 살아계셔서 지금도 일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끼며, 우리도 주님의 도구가 되어 새 생명을 얻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사명을 알고,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로그인 회원가입

방문자 집계

  • 오늘 264
  • 어제 230
  • 최대 1,086
  • 전체 49,166

Copyright © metabible.or.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