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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가복음] 예수님은 누구신가? (안식일의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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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414회 작성일 2025-01-09 11: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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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를 말씀하시더니” (1-2)

 

 예수님께서 항상 관심을 가지고 제자들에게나 사람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십자가의 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의 윤리, 도덕으로 실천적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내용이었습니다. 아마 그 내용은 마태복음 5장부터 7장에 나오는 핵심적인 가르침의 내용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3)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집으로 한 사람이 오게 됩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나아오는 한 병자. 그는 침상에 누워있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예수님께 자기 친구를 데려오면 반드시 고쳐 주실 것이란 믿음으로 온 것이지요. 보통 예수님이 이런 저런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니까, 한 번 가보자 하고 말만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친구들은 자기들이 꼭 데리고 가겠다고 침상 채 메워 가지고 데려갑니다. 이 중풍병자는 친구들을 참 잘 두었습니다. 이런 친구들 넷이나 있다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4)

 

 예수님이 집에 계시다고 했는데, 그 집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운집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문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병원에 가면, 응급실이란 것이 있어서 급한 환자들은 그리로 먼저 들어가는데, 지금 환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데, 양보해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건강한 사람만 예수님을 만나려고 줄을 서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풍병자 외에도 수많은 병자들이 대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양보할 생각이나 있었을까요? 

 

 어떤 목회자는 ‘무리들’을 우리 같은 신자라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이런 가난하고 상처입은 영혼들에게 장애물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설명합니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친구들은 이런 장애를 극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올 때에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같은 먼저 믿은 신자들일 수 도 있고,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성인 중 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수많은 사상이나 글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올 때에 이런 저런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채, 편협한 생각과 주장에 빠지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사람 만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그 집의 규모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는 문제도 있겠지요. 

 

  이 친구들은 유대인들의 집 구조를 잘 알고 있기에,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고 줄을 매달아 자신의 친구를 달아 내리기로 결단하고 실행에 옮깁니다. 남의 집 지붕을 뜯겠다는 것은 그 수리비용이나 집주인에게 금전적인 손실을 보상할 것을 각오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5)

 

 예수님께서 ‘도’를 전하시다가 지붕을 뚫고 내려온 그 중풍병자에게 집중하시면서, 이 병자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이 사람의 중풍병은 ‘죄’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께서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교회공동체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병자를, 그것도 죄로부터 생긴 병자를 구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생기게 합니다. 마가복음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죄인을 구원할 때, 그 죄인의 믿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주변 친구들의 그 간절한 믿음과 행위를 보시고 그 죄인을 용서하시며, 그 증거로 중풍병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죄 때문에 옴싹 달싹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구원할 수 있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그를 끌고 예수님께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의 방해가 있고, 장애물이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물질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실천력이 있어야 합니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는 안 됩니다.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6-7)

 

 보이지 않는 죄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용서하셨는데, 이 죄의 문제에 대해서 삐딱하게 바라보는 시선들이 존재했습니다. 놀랍고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가르치는 자들인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에 대해서 반감을 갖고, 예수님을 박해하는 세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어떤 행위나 다른 신에게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든 사람들, 사상가들이나 다른 종교가들이 오늘날의 서기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일부 맞게 알고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신성을 그대로 소유한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구약성경이 있었음에도 예수님을 몰라 보았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보면서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완악하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8-9)

 

 예수님은 이 서기관들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는 말과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쉬운 지 묻지만, 사실 서기관들은 둘 다 쉽지 않습니다. 육체의 질병을 고칠 능력도 없을 뿐더러,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용서할 권한은 더더욱 없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둘 다 불가능한 말을 예수님은 행사할 수 있음을 증명하시기 위해 던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고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성경학자들의 관점에서는 예수님이 육체를 고쳐주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심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10-12)

 

 예수님은 보이는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심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죄의 문제를 용서하실 수 있음을 증명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지금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자기 눈 앞에 계신 예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3)

 

 병든 자를 고치신 예수님은 이제 집과 같은 한정된 장소가 아니라 더욱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바닷가로 나가셔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4)

 

  중요한 예수님의 사역 중에 하나는 제자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여기 ‘레위’는 연합이란 뜻의 히브리 이름입니다. 이 레위의 헬라식 이름이 ‘마태’입니다. 마태복음을 쓴 마태. 다른 제자들은 그를 ‘레위’라 불렀지만, 레위는 스스로 마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을 위해서 일했던 세리였던 자신의 죄악스런 과거를 항상 기억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입니다. 그는 히브리말과 헬라어를 구사할 정도로 실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갈릴리 세관에서 관세를 받는 레위는 충분히 부유하게 잘 살 수 있을 텐데,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니, 미련없이 자신의 모든 지위와 부를 내려 놓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6-17)

 

 예수님께서 레위를 제자로 삼으셨기에 항상 예수님의 별명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일반 유대인들은 세리를 혐오했는데, 우리가 오늘날 매국노(賣國奴)라고 부르는 그런 부류로 인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시리아 쪽에서 이집트로 가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그런 일을 하려면, 머리도 좋아야 하지만, 세리 곁에서 공권력(?)을 행사할 용역깡패도 역시 필요합니다. 그들을 묶어서 ‘죄인들’로 기록되었는데, 레위는 자기의 지인들을 불러서 자기 집에서 식사를 베풀고 이제 자신은 예수님을 따라 살 것임을 천명(闡明)합니다.  그리고 그의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일을 한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함께 레위의 집에 온 바리새파 서기관들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사는 바리새인들은 절대로 이런 매국노 같은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함께 앉지도 않고 식사는 더더욱 함께 하지 않지만, 예수님은 그런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들도 거리끼지 않고 어울리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17)

 

 예수님은 죄인인 줄 아시면서, 어울리신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먹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은 환영해 주시며,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는 더 이상 세관의 세리의 일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일꾼이 됩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환영하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배척하면, (스스로 건강한 자라고 믿고, 의인이라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통해서 치유와 회복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8-20)

 

 서기관들, 바리새인들만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힐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교제에 대해서 의문을 품습니다.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거룩하게 생각하는 종교 행위가 있는데, ‘금식’입니다. 나라를 잃고 빼앗긴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으로 생각하는데, 이 금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시고 아들을 보내주셨는데, 요한의 제자들은 그것도 모르고, 예수님께 왜 금식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문제삼는 투로 말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예수님에게 비난을 돌려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는데, 계속 슬퍼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최선인 양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의 제자들의 한계이지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애통하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예수님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있는 사람들은 그야 말로, ‘축제’이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애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때는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모시고 살았던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자들이 있습니다.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믿음을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찾아야 합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21-22)

 

 예수님의 복음은 새로운 포도주와 같습니다. 구약의 율법의 틀을 가지고 예수님의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낡은 생각과 이념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다 버리게 될 것입니다.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23-24)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손으로 밀이삭을 따 내는 것을 ‘추수’로 본 것이고,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을 ‘탈곡’으로 본 것입니다. 어거지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은 어디가서 대접받고, 얻어먹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말씀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기 바쁘시니까, 제자들이 음식점을 찾든 지, 먹을 것을 구하는 일에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5-28)

 

 다윗이 사울을 피해서 도망갈 때,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몸만 빠져 나와서, 거의 기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놉 땅의 제사장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지요. 그 때 제사장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진설병을 받아서 먹게 됩니다. 율법으로 하면, 분명히 잘못인데, 다윗의 생명이 중요하기 때문에 제사장도 허락해서 먹게 했습니다. 이 사건을 예로 드시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그래서, 율법보다 생명이 우선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굉장히 배가 고팠을 것입니다. 안식일이 되도록 먹을 것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것이지요. 일부러 안식일을 어기고 싶어서 어긴 것이 아닙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문제삼지 않는데, 바리새인들이 문제삼을 수 있습니까? 일부러 안식일을 범하면 안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육체의 연약함도 고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예수님께 죄인 된 병자를 데려와서 고침을 받게 했던 이름 모를 그 친구들을 우리가 닮게 하옵소서! 저들의 일이 교회의 사명인 것으로 알고,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실 수 있는 주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의 어둡고 미련한 눈과 마음을 열어 주옵소서! 주님의 일을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시고,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일을 보게 하옵소서! 말씀을 들을 때, 읽을 때 깨닫게 하시고, 기쁨으로 순종하며 따르게 하옵소서! 

 

 레위처럼, 주님이 부르실 때, 지체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안식일에도 복음을 전하시며 생명을 주시는 주님의 사역에 우리도 함께 동참하게 하옵소서! 주님 나라가 가까워짐을 볼 수록 더욱 주님을 위해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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