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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가복음] 6장 고향에서 배척 당하심, 세례 요한의 죽음과 오병이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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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316회 작성일 2025-02-12 11: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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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병이어 기적, 그림출처: https://blog.naver.com/gomtinghouse/221506025742>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고향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따르니라.” (1)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픈 상처나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반면에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고향을 자주 자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무언가 얻어낼 것을 바라기 때문이지요. 어찌 되었든 누구나 고향에 돌아갈 때는 자신의 성공한 사회적 모습을 가지고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유대지역과 차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만약,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보이며, 제자들을 앞세우고 자랑하시기 위해 가셨다면, 온갖 이적으로 고향 사람들을 놀래키고 칭송을 받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담담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2)

 

 예수님의 말씀은 그동안 익숙하게 들어왔던 어느 랍비들과는 전혀 다른 놀라운 소식입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소식일 것입니다. 정말 이해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고, 가난과 질병의 고통 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고 있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니, 믿을 수 없는 소식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을 육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고 지식으로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사건입니다. 단지 일반 사람들 중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예수’ 뿐입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3)

 

 고향 사람들이 즉, 갈릴리 나사렛 지역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어릴 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동생들과 어머니를 보살피며 살았던 청년 예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메시야라고 하니, 도무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예수님 탄생의 비밀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어릴 적 아버지 요셉을 도와 가난한 노동자(목수?)의 삶을 산 젊은 청년이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도 될 수 있는지 의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딱 ‘사기꾼’이지요.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이비, 이단들이 많듯이 저들도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한 번 권세를 누려보겠다는 악한 자로 낙인을 찍어서 예수님을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선입견이란 것이 참 무서운 장애물이지요. 그러나 훗날 예수님의 육신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는 결국에 예수님을 참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로 인정하고,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4-6)

 

 예수님은 기적이나 이적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을 전해 들은 자들의 말을 믿는 자에게 능력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의 일하시는 방법의 원칙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것을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구원하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믿는 사람만을 구원하십니다. 누구나 병든 자를 고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만을 고치십니다. 누구나 귀신을 쫓아내어 주실 수 있지만, 누구나 자유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누구에게나 천국이 열려 있지만, 누구가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천국에 들어옴을 허락하십니다.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7)

 

 예수님께서 앞에 3장에서 열두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시 부르시고 계십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앞에서는 배움으로의 초대라고 한다면, 6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으로의 초대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배우고, 하나님을 알아가고, 주님의 뜻과 계획과 생각을 알아갑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일들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으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한 사역으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을 알면, 이러한 부름을 받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전혀 두 번째의 부르심을 받지 못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설프게 알거나 그냥 예수님을 관찰하고 피상적으로 알 뿐이지, 예수님과 참 교제가 일어나면, 주님의 일에 부름을 받게 됩니다. 

 

 또, 제자들을 둘씩 둘씩 짝을 지어서 보내심은 홀로 사역을 할 수 없고, 합력하라는 의미입니다.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두 사람이지만, 사실 그 둘에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셋’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홀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 교회와 성령이 함께 사역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교회가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이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이지요.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8-10)

 

 예수님 당시에는 복음을 받은 자들이 마땅히 제자들의 필요를 채워야 하는 의무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모든 비용과 필요들을 어느 한 개인이 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감당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모여서, 주님의 사역을 전념할 직원을 세우고, 그 부담을 함께 나눠지는 것입니다. 이른 바, 헌금을 통한 교회의 재정을 감당하는 조직을 세우게 되지요.  그 재정으로 ‘하나님의 집’, ‘예배당’을 세워서 지역 선교와 봉사와 구제 등 여러 가지 일을 합니다.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1)

 

 고향에서 예수님께서 배척을 받으셨듯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배척을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니 아주 크고, 배척을 받지 않는 일이 드물지요. 사실, 오늘날 수많은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지만, 기독교가 왕성하게 흥왕한 곳은 많지 않습니다. 다행히도 우리 나라는 비교적 기독교가 잘 정착하고 부흥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으면서 복음을 전했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선교사님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이 희생을 했고, 선교사 곁에서 일을 돕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배척하고 박해하고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이나 지역이나 나라는 그 뒷감당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12-13)

 

 예수님과 제자들이 비슷한 일을 했지만, 확연히 다른 모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자들을 고치셨지만, 제자들은 ‘기름을 발라 고쳤다’고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치료행위를 수반반해야 합니다. 오늘날은 수많은 의료인들, 화학자, 생물학자 등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약을 만들고 치료방법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우리 사람과 예수님은 급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점점 많은 질병들을 극복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입니다. 

 

 “이에 예수의 이름이 드러난지라 헤롯 왕이 듣고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도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일어나느니라 하고 어떤 이는 그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그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 하되, 헤롯은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벤 요한 그가 살아났다 하더라.” (13-15)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이 그 당시 갈릴리의 분봉 왕(영주 정도 됨) 헤롯 안디바(‘영웅의 아들’이란 뜻)에게는 큰 불안감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을 죽였는데, 본인도 자기 죄를 알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처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무리들이 생겨났으니 아마도 ‘이 세력이 커지면 자신을 해치려 하지 않겠는가’ 하는 불안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로디아가 요한을 원수로 여겨 죽이고자 하였으되 하지 못한 것은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하면서도 달갑게 들음이러라.” (17-20)

 

 마가는 과거 헤롯 안디바와 세례 요한 사이에 일어났던 일을 서술합니다. 세례 요한이 헤롯 안디바를 비판했는데, 헤롯은 그의 말을 듣고, 세례 요한의 말이 옳다고 여겼지만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을 보면, 잘못된 것을 알면서 고치지 않는 인간 본성의 죄를 보게 합니다. 우리들 중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지 않고, 옳지 않다고 알고 있으면서 고치고 회개하지 않는 모습. 세례 요한과 같이 친구나 가족이,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깨닫게 되었을 때, 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번민만 하다가 더 큰 죄악을 범할 수 있습니다. 

 

 헤롯은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서 자기 아내를 삼았습니다. 참 악한 짓이지요. 불륜입니다. 그것도 가족을 상대로. 이 간음의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의 아내를 두고 만족하고 감사하면 될 텐데, 비교하면서 불행에 빠지는 것입니다. 

 

 “마침 기회가 좋은 날이 왔으니 곧 헤롯이 자기 생일에 대신들과 천부장들과 갈릴리의 귀인들로 더불어 잔치할새, 헤로디아의 딸이 친히 들어와 춤을 추어 헤롯과 그와 함께 앉은 자들을 기쁘게 한지라 왕이 그 소녀에게 이르되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것을 내게 구하라 내가 주리라 하고 또 맹세하기를 무엇이든지 네가 내게 구하면 내 나라의 절반까지라도 주리라 하거늘” (21-23)

 

 이 헤롯이 또 얼마나 허세가 심한지, 자기에게 부탁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것처럼 말합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만큼 내게 권세와 힘이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지요.

 

 “그가 나가서 그 어머니에게 말하되 내가 무엇을 구하리이까 그 어머니가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구하라 하니, 그가 곧 왕에게 급히 들어가 구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얹어 곧 내게 주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니” (24-25)

 

 이 헤로디아의 딸이 용돈이나 좀 구할 것이지, 자기 엄마에게 가서 무엇을 구할지를 묻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춤을 추어서 왕의 마음을 사고, 소원을 말하면 들어줄 것이란 것을 뒤에서 헤로디아가 조종한 것 같습니다. 이 소녀가 엄마가 시키는데로 사람 목숨을 구합니다. 아주 잔인하게.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하니, 요한을 죽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가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로 인하여 그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 왕이 곧 시위병 하나를 보내어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 명하니 그 사람이 나가 옥에서 요한을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얹어다가 소녀에게 주니 소녀가 이것을 그 어머니에게 주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니라.” (26-29)

 

 괜히 허세를 부리다가 의롭게 여기는 요한을 죽게 합니다. 우리가 너무 체면치레 하다가 이렇게 큰 죄를 범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들어주면 안 됩니다. 섣부른 약속을 해서, 자기 말에 자기가 올무에 걸려서 죄를 짓는 헤롯입니다. 14절부터 2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파송하시는 사건 속에 예수님의 소문에 대한 헤롯의 반응과 과거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설명을 삽입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이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30-31)

 

 제자들이 사역을 마치고 예수님께 돌아와서 사역한 일들을 보고합니다. 잠깐 제자들을 쉬게 하고 또다시 예수님은 배를 타고 다른 마을로 향하십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열심히 일하시는 지. 예수님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들이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그들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그들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32-34)

 

 예수님만 부지런한 것이 아닙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걸어서 반대편까지 간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런 열심과 부지런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없는 양에 비유하셨는데, 맹수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자기 우리도 찾아가지 못하는 방황하는 양은 곧 죽음과 멸망에 이르지요. 우리 인생이 꼭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전하게 보호 받으면서 갈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때가 저물어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 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 제자들에게 명하사 그 모든 사람으로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떼로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예수께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시고 또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시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물고기를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떡을 먹은 남자는 오천 명이었더라.” (35-44) 

 

 너무도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물고기 2마리와 빵 5 덩이로 남자만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베불리 먹이신 사건입니다. 이후에 요한복음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하지만, 예수님은 더 중요한 사역을 위해서 그들을 보내시고, 하나님과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45-46)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고 잠시 기도하시고 다시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타고 이동 중인 배에 오르십니다. 그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유령으로 생각하여 두려움에 떨지만, 이내 곧 예수님이신 줄 알고 영접하지요.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처럼 잠시 물 위를 걸어가서 예수님을 맞이하려고 하지만, 물에 빠집니다. 예수님이 건져 주시는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47-52)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음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유령으로 착각했습니다. 예수님께는 물 위로 걷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인데, 제자들의 마음이 둔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은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산 것도 주님의 은혜였다고 말하면서, 바로 내일을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욕심과 내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항상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 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53-5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갈릴리 나사렛의 고향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과거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동네 사람 중 하나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주님께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주님! 우리의 지식과 지혜도 새롭게 하셔서, 참 구주시고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바르게 섬기게 하옵소서! 

 

 헤롯 안디바가 세례 요한을 죽이고, 그 죄로 인해서 예수님을 바르게 인지하지 못하는 모습을 봅니다.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헤롯은 또 예수님을 죽이려고 악한 꾀를 내기도 했습니다. 주님! 회개할 기회를 놓치지 않게 하시고, 말씀을 들을 때, 또한 우리를 위해서 충언을 해주는 친구와 가족, 지인들의 말을 듣고도, 잘못을 돌이킬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겸손히 주님의 말씀 앞에 회개함으로 주님의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주님의 기적과 이사를 보면서도 마음이 둔해진 제자들의 모습이 또한 우리들의 모습은 아닌 지 돌아봅니다. 이제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이끄셨는데, 늘 감사함과 기쁨으로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 근심과 염려로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아니 적극적으로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며, 주님을 증거하는 참 제자로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시는 존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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