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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가복음] 8장 7병2어, 누룩교훈, 베드로의 신앙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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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18회 작성일 2025-02-26 18: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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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1-3)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필요에 관심이 있습니다. 3일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사람들이 이전에 5병 2어의 기적을 경험하여서 계속 따라다녔는지는 몰라도,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무리의 배고픔에 대해서 언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에도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그 기도에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이란 표현입니다. 즉, 양식은 어느 한 사람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이고 따라서 공동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5병 2어의 기적의 시작은 어느 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주님께 바쳤을 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작은 드림(?), 섬김(?)이 필요합니다. 사실, 우리가 먹을 양식의 시작은 하늘의 비와 바람과 햇빛을 비춰주시는 아버지께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나 토지는 누구에게는 있고, 누구에게는 없기 때문에 어느 곳에선가 양식 풍족하다면, 그것을 나누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따르는 무리 중에는 집이 먼 사람도 있기에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였지요. 제자들은 아마도 굶주린 사람들은 집으로 돌려 보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못 알아 듣습니다.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4-6)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떡이 있음에도 나눌 마음이 없습니다. 그들의 생각도 이해가 됩니다. 고작 7개의 빵덩이 밖에 없으니, 예수님께 한 덩어리를 드리고 나면, 제자들은 겨우 반덩어리 밖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내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남을 돌아볼 여유가 어디있습니까?’ 하는 마음이겠지요.  예수님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십니다.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 7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전에 하셨던 대로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제자들이 그 빵조각을 나누어서 줄 때마다 계속해서 빵이 생겨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빵을 다 돌렸는데도 남게 됩니다. 기적이지요. 

 

 제자들이 다시 예수님께 생선 2마리를 내놓습니다. 이 두 마리를 들어서 예수님께서 축복하시니, 또 생선도 갑자기 많아져서, 사람들에게 나눠 줍니다. 모두에게 나눠 주었는데, 성인 남성만 대략 4천 명 가량이었습니다.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시고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7-10)

 

 예수님께서 무리를 먹이시고 그들을 집으로 돌려 보내십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 지방으로 배를 타고 가시는데, 달마누다라는 지명은 성경 이외의 어떤 고대 자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곳의 정확한 위치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곳을 마태복음에는 ‘마가단’ 지방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막달라와 같은 지명으로 생각됩니다. 이곳은 갈릴리 호수의 서편에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 (11-13)

 

 예수님께 나와 논쟁하고 따지면서, 예수님께 기적이나 보여 달라고 하는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과 소모적인 논쟁을 벌이지 않고 떠나가셨지만, 마태복음에는 하늘로 오는 표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예수님을 공경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더이상 무슨 이적이나 기적을 보여 주시지 않았지만, 제자들에게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 표적(sign)이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14-16)

 

 제자들은 마가단 지역을 예수님께서 급하게 떠나심으로 음식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근심하고 있는데, 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룩이야기를 하시니까 제자들은 엉뚱하게 해석을 합니다. ‘아 빵이 없으니 누룩을 밀가루에 넣어 가지고 빵을 만들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바르게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빵을 만들 누룩이야기를 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을 어떻게 삶에 적용할지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은 오염되고 제멋대로 하는 ‘하나님 말씀의 해석’입니다. 잘못된 교훈이지요. 오늘날도 수많은 이단들이 성경을 인용해서 자신들의 교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헤롯의 누룩은 무엇입니까? 세속적 권력, 정치, 돈의 힘에 의해서 바르게 말씀대로 살지 않고 굴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면, 엉뚱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이단의 가르침 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이 분명하지만, 세속의 권력과 힘과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세속적 권력과 야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헤롯당은 그 시대 당시 대부분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권력과 야합한 결과로 생겨난 조직입니다. 물론 일반 유대인도 있었겠지만, 헤롯이 하나님께서 내리신 메시야로, 그리스도로 믿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잘못한 이단 사상에 의해서, 하나님 말씀을 오해할 수 있고, 바르게 알고 있어도 세속의 권력에 아부하고 그런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길을 걸어가면 결국에는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박해받고, 미움을 받아도, 외롭고 힘든 길, 좁은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길일 것입니다. 

 

 부귀영화 및 권세가 없어도,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좋은 길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항상 감사하며, 오늘 하루 평범한 삶에 감사를 올립시다. 할렐루야!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17-21)

 

 예수님의 말씀에도 제자들은 여전히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기적을 보면서도 항상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라고 다를까요? 날마다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도 더 가지지 못해서 고민하고 번민합니다. 계속 쌓아둘 생각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충만한 데 이르기 전까지는 늘 이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 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22-26)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온 한 시각장애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벳새다 마을 안에서 그를 즉시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분명, 마을 안에서도 고치실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제까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예수님은 그 장애인을 대하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손을 대어서 안수해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을 뱉어서 그에게 안수하십니다. 더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보통은 단 한 번에 병자들을 고치셨는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안수하십니다. 처음에 흐릿하게 시각이 돌아옵니다. 완전하게 고쳐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두 번 안수하시니까 밝히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께서 점진적으로 병을 고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병자들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다. 대부분은 오랜 시간이 걸려서 약을 먹고, 주사를 맞으며, 여러 번 의사를 만나고 경과를 봅니다. 우리 성도들의 기도응답도 대게 그렇습니다. 한 번 예배당에 나와서 딱 한 번의 기도로 응답받는 경우도 있지만, 오랜 시간동안 주일마다 혹은 새벽마다 예배당에 나와서 간구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 응답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즉시로 응답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나 믿음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이 불완전하여서 한 번에 낫게 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 복음서의 예수님의 이사과 기적을 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 죽은 사람도 살리시는 것을 보면, 능력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이유와 계획이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 당장에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끝까지 인내하고 기다릴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27-28) 

 

 예수님께서 3년이 넘게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마지막으로 졸업을 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은 여행을 하십니다. 이제까지 많은 기적과 이사를 보았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는지 확인하시고 싶으셔서 묻습니다. 그런데, 먼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예수님은 어떤지 묻지요. 그래서 그 답으로,  세상 사람들은 부활한 세례 요한으로 생각한 이들도 있고, 옛 선지자 엘리야라고 믿는 사람도 있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고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29)

 

 베드로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아마 나머지 11제자들도 모두 같은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지요. 그런데,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다윗과 같은 무력으로 로마의 식민지배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십니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30-31)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사실을 밝히 말하고 다니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람들이 방해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당장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막으려고 하지요. 아마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2-34)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사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내놓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류를 위한 죽음의 형틀이지만, 우리들은 자신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들도 죄와 싸워서 피를 흘리고 죽기까지 할 수 있어야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35-38)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오늘을 살고 있는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기적을 경험하면서도, 연약한 우리들은 매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합니다. 주님! 먼저 주의 나라와 의를 구하며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지지 않게 하시고, 말씀으로 깨어 있게 하옵소서! 

 

 주님은 사람들의 기대(期待) 대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끝임없이 희생하시며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우리들은 조금합니다. 당장에 기적과 기사가 일어나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에게 기다릴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때와 주님의 방법대로 주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소망하며 잠잠히 주님을 바라는 우리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은 우리 때문에 죽음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따르기를 원합니다. 그 십자가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알고, 죄와 싸워 이기며, 아버지의 뜻을 우리 각자 삶에서 주님처럼 이루게 하옵소서! 우리는 연약합니다. 십자가를 잘 짊어질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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