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1)
‘하나님 나라에 누가 있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을 많이 하셨던 예수님께서 직접 몇몇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이야기가 마가복음 9장에 소개됩니다.
예수님께서 변화되셔서,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본 제자들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입니다. 이 세 제자들은 다른 제자들이 보지 못한 예수님이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럽긴 하지만, 우리들도 잠시 후에 보게 될 것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2-3)
예수님 시대에도 빨래는 했던 것 같습니다. 빨래를 해서 희게할 수 없을 만큼 밝게 희고, 옷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묘사는 간단하게 했지만, 어떻게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상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4-6)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대화를 나눈 엘리야와 모세를 알아 봅니다. 직접 본적이 없지만, 예수님과 나눈 대화 속에서 그분들이 엘리야와 모세인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확하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대화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고, 아니면 언급하면 안 되는 기밀사항일 수도 있겠지요.
베드로가 갑자기 예수님께 초막을 짓고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모시겠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산에 올라 변화된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모시고 사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을 보면, 굉장히 흥분된 상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어떻게 고귀한 분들을 고작 초막에 모시겠다고 할까요? 아마 제자들이 예수님과 공생애의 기간동안 제대로 된 집에서 씻거나 쉬거나 한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접이 기껏해야 초막을 지어서 모시겠다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베드로와 제자들은 ‘두려운 마음’, ‘무서움’이 들었을까요? 어떤 것을 보고 들었기에 압도되어서 이상한 말을 하면서 예수님과 그분들을 모시겠다고 하는지. 지금으로썬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7-8)
그렇게 무서워하던 찰나, 하나님의 음성까지 듣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예수님의 말을 잘 들어라 하는 것이 내용입니다. 참 간단하지요? 하나님은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씀을 요약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해라!” 이것입니다. 끝. 오늘날 기독교가 아주 이상하게 변질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보다는 ‘목사’의 말에 너무 현혹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을 쫓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예수님의 말씀이 혼잡하지 않고,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그 다음에는 마음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인지 말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참 성도, 참 그리스도인이고 불순종하는 사람은 외적으로 제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예배당에서 말씀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불법을 저지르는 거짓 성도, 거짓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짜 예수님이 당신의 주인입니까? 양심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보세요.
제자들에게 보였던 엘리야와 모세는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예수님과 자신 뿐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됩니다. 예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선생들, 설교자들, 함께 했던 동료들은 다 사라지고, 예수님과 독대하게 됩니다. 진짜 예수님 앞에서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과 1대 1의 관계를 가진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예수님을 정말로 주님으로 믿고 주님만 바라보고 따르고 있습니까?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그 사람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9)
예수님은 3명의 제자들의 입단속을 시켰는데, 예수님의 부활 후에는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대화에 관한 내용을 전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10)
그렇지만 몇 가지 힌트가 있는데,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심을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그 때 들었을 때, 전혀 감이 없었지요. 그러면서 산에서 내려오며 3명이 자기들끼리 질문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답은 나오지 않지요.
“이에 예수께 묻자와 이르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11)
3명의 제자들이 엘리야를 보았기 때문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분명, 서기관들에게 들어도 하나님 말씀에 메시야 보다 앞서서 엘리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지금 변화산에서 보았지, 이 땅에서는 본 일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못 지키신 것인지 의문이 들게 됩니다. 엘리야는 살아나지 못했지요.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2)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미 엘리야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말라기서에 기록된 엘리야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그리고 이미 이 땅에 보내져서 모든 것을 회복한다고 합니다. 무엇이 회복되었습니까? 전혀 제자들이나 율법사들과 일반 사람들도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13)
그렇다면 예수님 바로 앞에 왔던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여기 마가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 따르면, 세례 요한이 바로 예수님 앞에 보낸 선지자입니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이 와서 모든 것을 회복했다고 한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메시야, 구원자로 오셨는데, 로마 식민통치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구세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들이 ‘죄인’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데 있어 물론 세상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증거하는 것도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역이 성공적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혹은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까지 그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려고 하는 장면이 여러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봉왕 헤롯도 양심에 찔려서,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듣고자 했지만 회개에 이르지 못했지요. 오히려 아내 헤로디아 때문에 요한의 목을 쳐서 죽게 만들지요. 인간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죽은 선지자이지만, 그의 사명은 완수했습니다.
한편, 3명의 제자와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모되었을 그 시각에, 산 아래에 있던 나머지 9명의 제자들은 어떤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4-16)
9명의 제자들은 그렇게 무능하게 있을 때에, 서기관들과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귀신을 쫓아내는 방법’에 대해서 논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 보아도 귀신은 아이에게서 떠나가지 않지요. 예수님께서 무슨 일인지 아시겠지만, 9명의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변론하고 논쟁하는지 묻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대답을 하기 전에, 다급한 것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겠습니까? 아버지가 예수님께 와서 간청합니다.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7-18)
예수님은 그 9명의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19)
예수님과 함께 몇 년을 함께 했는데, 아직도 예수님처럼 일하지 못하는지 안타까워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과 함께 있으며 참고 인내하십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신앙생활한 지가 몇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이 모냥(?) 일까요!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0-22)
귀신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심히 두려워 떠니까 아이에게 경련이 일어납니다. 땅에 엎어지고, 구르고 개거품을 뭅니다. 예수님은 아이의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입니다. 귀신이 아이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몸을 던집니다. 주님! 무엇을 하실 수 있으면 도와 주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3-24)
예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이것을 지적하시자, 그 즉시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의 믿음없음을 도와달라고 합니다. 이 모습이 참 귀합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성도들이 믿음이 없으면서, 예수님께 그 믿음없음을 도와달라 간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은 내게서 난다고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믿음조차도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하게 믿음도 생겨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고, 믿음도 적은 믿음이 아니라, 굳세고 강한 믿음, 시련을 이기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합시다.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5-27)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사람들의 말은 별로 귀담아 들을 것이 못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치유사역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아이를 죽이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역과 치유방식과 방법 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아십니까? 모르지요. 모르면서 이렇고 저렇고 말만 많은데, 전혀 들을 필요도 없고,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의 음성을 듣기 보다 사람들이 하는 말에 의해서 휘둘리는 경우가 많아 실수하지요.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28-29)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던 제자들은 후에 예수님께 왜 자신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습니다. 이전에 예수님께로부터 파송을 받을 때에는 놀라운 기적도 일으켰는데, 이제는 그 힘이 떨어진 것일까요?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기도’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즉,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아무런 권한이나 능력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권한과 능력은 하늘로부터 옵니다. 언제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잠시 허락된 권한만이 있음을.
예를 들면, 구속영장도 집행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모든 영적인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능력과 힘을 얻기 위해서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 권한과 능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부여해 주십니다. 어느 일정 기간 잠시 동안에, 그리고 일을 할 동안에. 그래서 우리는 능력있게 살아베드로는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아마 나머지 11제자들도 모두 같은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야’이지요. 그런데,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다윗과 같은 무력으로 로마의 식민지배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십니다.
“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30-32)
예수님은 참 제자에게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영광만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면, 십자가가 있을 것이고 자기를 부인하며 고난과 고통이 수반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과 영광이 그 후에 있음을 또한 가르쳐 주십니다. 고난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참 성도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33-37)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관심이 있으십니다. 주님과 나와의 일대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서 함께 따르고 있는 동료들과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누가 예수님 다음으로 높임을 받아야 하는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 자신을 낮추며 섬길 것을 기대하십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 (9:38-50)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38-40)
예수님의 이름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도 않으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하는 사람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습니다. 예수님의 직속 제자들은 그런 것을 못마땅히 여겨서, 예수님께서 그런 일을 금하셨으면 했는데, 예수님의 반응은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의지해서, 귀신을 쫓는 일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예수님을 비방하여 그리스도심을 믿게 하는 사역을 방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41-43)
진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별개의 삶을 사는 것. 그것이 많은 사람의 믿음을 무너지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이 받을 벌은 ‘지옥’입니다. 늘 우리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야 하겠습니다.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버리라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45, 47-50)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얼마나 영화로우시며, 크고 위대한 메시야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때로는 우리의 영안(靈眼)이 열려, 진정으로 주님을 높이며 예배하고 경배하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주님은 공생애를 사시며, 날마다 기도하시며 아버지의 뜻을 구했습니다. 우리들도 날마다 기도로 영적 능력과 힘을 얻게 하시고, 나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게 도와주소서!
주님! 함께 믿는 성도들을 경쟁자로 보지 않게 하시고, 겸손히 섬기며 돕는 자가 서로에게 되게 하소서! 악한 무리와 영적 전투에서 싸워 이기며, 주님처럼 승리하도록 도와주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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