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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가복음] 11장 예루살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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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1회 작성일 2025-03-19 13: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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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2)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기 전에 한 마을에서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제자 가운데 두 사람을 보냅니다. 그냥 걸어서 성안에 들어가시면 구약의 선지자에게 미리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냥 걸어가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예수님의 철저한 순종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이왕에 짐승을 타고 들어간다면, 나귀 새끼가 아니라 백마를 요구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많은 지도자들이 아주 고급 세단이나 값비싼 SUV차량을 타고 이동합니다. 물론, 경호를 위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모든 차량을 제공하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지도자나 대통령이나 왕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겸손하시고, 언약에 충실하십니다. 만약에 구약 성경에 나귀타고 입성하신다는 약속이 없었다면, 아마도 여느 때처럼 그냥 걸어서 들어가셨을 것입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3)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풀어가면, 주인이 왜 풀어가려고 하느냐고 묻겠지요. 그 때 예수님이 타실려고 한다고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두고 사전에 예수님과 나귀 주인이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해석이 있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4-6)

 

 나귀 주인이 예수님을 위해서 더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어 드린 것을 보면, 그 사람도 예수님에 대해서 좋은 마음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내 것을 포기하고 갑작스런 요구가 왔을 때, 드릴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귀하게 대접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쉽지 않지요. 이 나귀 주인도 이 나귀 새끼에 대한 나름대로의 쓰임새가 있었을 텐데, 그냥 내어 드립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이미 예수님이 아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7-8)

 

 그 나귀 주인이 나귀 새끼를 드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도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자신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등에 얹습니다. 마치, 말을 탈 때 안장처럼 쓰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가시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의미로 나뭇가지를 베어서 예수님 가시는 길에 펼쳐 놓습니다. 이런 일은 보통 지도자나 통치자의 환영을 의미합니다. 나귀 새끼의 주인이 예수님께 드린 섬김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들도 어떤 한 사람의 순수한 사랑과 섬김에 감동을 받으면, 함께 그 사역에 동참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선한 영향력이지요. 그렇게 예수님은 비록 큰 말이나 위엄있는 군대가 호위를 하지 않지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영과 작은 섬김을 받으십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9-10)

 

 이제 사람들이 ‘호산나’ 하고 구호를 외칩니다. 이 ‘호산나’는 풀어쓰면 ‘호쉬~아나흐’인데, 시편 118편 25절에나 나온 말을 축약한 것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야’(구원자)로 부른 것입니다. 당시 유대 백성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정치적인 자유를 얻게 할 왕으로 예수님께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깊은 바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퍼포먼스를 마치시고 예루살렘 성안에 머무신 것이 아니라 다시 성 밖에 베다니 마을로 가셔서 아마도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집에서 주무신 듯 합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가신 곳이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 수 십년동안 스룹바벨 성전을 확장해서 건축한 것인데, 여기 마가복음에는 모든 것을 불러 보시고 넘어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셨다고 했는데, 마태복음에 따르면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 환전하는 사람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며,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기록했습니다.

 

  • 무화과나무에게 저주하심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2-14)

 

 예수님과 제자들이 다음날 베다니에서 나오셨다고 한 것을 보면,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의 집에 하룻밤 보내신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장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니, 예수님께서 아침도 드시지 않고 나오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가난한 그들에게 신세를 지게 될까봐 그런 것 같은데, 이런 것을 보면, 꽤 예수님도 섬세하게 저들의 입장을 생각해서 행동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시려면, 배가 고프기 때문에 무화과나무에게서 무언가 먹을 것이 없는지 보십니다. 사실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성경에 기록이 되었는데, 무화과 열매를 딸 시기는 8월 경입니다. 그런데 춘분 지나고 3~4월에 무슨 열매를 생각하시고 무화과나무에게 열매를 바라셨을까요? 

 

 원래 무화과는 열매를 두 번 맺는다고 합니다. 3~4월 경에 처음 맺는 작은 열매는 ‘파게’라고 하는데, 상품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작은 열매는 당시에 누구나 따 먹을 수 있게 무화과 나무의 주인들은 허락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열매를 따야 비로서 8월 경, 제대로 수확을 할 상품성이 좋은 무화과열매가 맺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나무 주인이 삯을 주고 사람을 시켜서 그 ‘파게’, 첫 열매를 따야 하는데, 가난하거나 지나가는 사람이 누구든지 따먹으면 주인도 비용을 들이지 않고 무화과나무를 관리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잎만 무성하고 ‘파게’도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십니다. 이것은 상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적 행위만 무성하고 어떤 작은 열매도 없는 참 신앙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정의’와 ‘공의’의 열매를 맺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저주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곧 이처럼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아, 로마 군인들에게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작은 열매들이 들어나지 않으면,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회개하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혹시 성령을 주셔서, 회개하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 성전 정화(淨化) 사건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5-18)

 

 유대인들은 1년에 3차례 예루살렘 성전에 방문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사에 쓰일 제물을 가져올 때, 제사장들에게 흠이 있는지 검사를 받습니다. 흠이 있다면, 그런 동물들로는 희생제사를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근처에서 다시 흠없는 가축을 사기 위한 수요가 생겨나지요. 그런데, 장사꾼들과 제사장들이 결탁해서 이권사업처럼 허가를 받은 장사꾼에게 산 양이나 소나 비둘기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허락이 되어 집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제사장들은 돈을 버는 수단으로써 장사꾼들과 동업(?)을 하게 됩니다. 

 

 또, 제물 대신에 돈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당시 통용되었던 로마의 동전은 하나님께 그냥 바칠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대인 동전을 따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돈을 성전에서 쓰이는 돈으로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역시 큰 수수료를 남기는 장사가 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생업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드릴 헌금을 강조하면서, 어렵고 가난한 성도들의 마음에 큰 상처와 실망감을 안겨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대해서 다시 정의를 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오늘 우리들도 주님과 교제하기보다 무언가 헌금이나 물질을 드리면, 내게 다시 물질적, 현세적인 복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헌금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곳은 주님의 집이 아니라 ‘강도의 굴혈’이 될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를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19)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셨다가 나가신 일이 두 번 있었는데, 이 때는 어디에서 주무셨을까요? 그 행방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0-23)

 

 다음날 주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 죽은 것을 제자들이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그런데 왜 ‘산’일까요? 이단 신천지는 이 구절을 가지고 자기들의 교리 ‘산옮기기’라는 것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 교회에 침투하여서 그 교회를 완전히 이단화시켜서 온 성도들을 신천지 교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 ‘산’이 교회나 어느 영향력이 있는 목사를 의미하는데, 전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다양한 신학 해석이 있지만, 무난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예루살렘 멸망과 심판을 말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불가능은 없다’ 라는 식으로 해석을 해서, 무엇이든지 그냥 믿음만 가지고 내 뜻대로 구해서 하나님께서 다 이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엉뚱하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4-25)

 

 그리고 예수님께서 결론적인 교훈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용서’입니다. 즉,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그 구하는 것은 ‘죄사함’, ‘구원’, ‘심판을 면함’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면서 제자들도 서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24절만 따로 떼어서 읽으면, 그냥 예수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다 들어주신다고 엉뚱하게 믿게 됩니다. 그리고 수년 동안 기도해도 기도 응답이 없으면,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않으셨다면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지요. 잘못 배워서 그렇습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정말 엉뚱하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허무맹랑한 것까지 구하는 것을 봅니다. 잘못된 신앙입니다. 자기 생각을 믿는 것은 미신입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듯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잘못된 것입니다. 

 

  • 예수님의 권위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27-30)

 

 예수님께서 성전의 장사치들을 쫓아내시니까 그들과 동업을 하고 있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님께 항의를 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자기들이 밥그릇을 빼앗길까 염려함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나님께 허락을 받은 것인지 아닌지. 당연히 대답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도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이지요. 그러나 저들은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배척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지요. 그렇게 기회를 주고, 용서하시려고 해도 이렇께 끝까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도리가 없습니다. 오직 심판 뿐입니다.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 이에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1-33)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어정쩡하게 계속 하나님을 팔고, 성전으로부터 이득을 취하려는 이런 자들은 확실히 답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넘어갑니다. 우리 성도들은 확고하게 예수님의 편에 서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쓰시겠다 할 때에 자신의 나귀 새끼를 드린 이름모를 성도의 사랑과 섬김을 봅니다. 또한 제자들도 자신의 겉옷을 나귀 새끼 등에 놓으며 예수님을 섬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땅에 놓으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환영합니다. 저희들도 작은 믿음이지만, 주님께 감사와 찬양 올려 드립니다. 점점 주님의 대한 사랑과 믿음과 소망이 깊어지고 자라게 하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주님과 기도로 교제할 때, 우리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외적으로 드러나는 생명의 열매도 맺게 하옵소서!  

 

 진실로 주님은 우리의 구원자십니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여 주시고 구원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가 용서함을 받고 주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었으니, 그에 합당하게 살게 하시고, 용서받은 자로 남을 용서하며 구원의 길로 초대하는 주님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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