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원 주인과 악한 농부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1-5)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슨 말씀을 가르치셨는지 대략적인 메시지가 마가복음 12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때에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쉽게 가르쳐 주십니다. 여기는 비유라고 소개하는데,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여기 한 사람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엄청나게 큰 농장을 가진 농장 주인입니다. 쉽게 포도원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주인은 바로 ‘하나님’이시지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만들고, 직접 포도원을 가꾸지 않고 세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 맡깁니다. 농부들인데, 포도원은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농부들은 그 안에서 일하는 정치, 경제, 종교 지도자 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다스려지길 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세’는 조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로 다스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이 포도원을 자기 것인양 주인의 뜻을 무시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과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지도자들의 죄를 책망하시고 바르게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를 원하셨지만,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받들어 모실 것을 기대하셨지만,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그 나라를 자기 것으로 완전히 만들려고 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됩니다.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6-8)
이 포도원 주인은 미련할 정도로, 그 농부들을 신뢰하고 그들이 잘못을 덮어주고자 했습니다. 모세로부터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를 비롯한 수많은 능력있는 예언자들과 선지자를 보냈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고 우상과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 원인은 그들을 지도한 레위인들, 제사장들, 서기관들, 최고 지도자인 왕까지도 모두 타락하였고, 자신들의 권력과 이득을 위해서 포도밭에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 노예들까지 때리고 착취합니다. 보다 못해서 하나님의 아들까지 보내신 것이지요. 그러면 그 악한 농부들이 그들의 죄와 잘못들을 돌이켰을까요? 그렇지 않음을 알고도 예수님은 가십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스라엘의 권력자들, 로마의 권력자가 예수님을 죽이고 무사할까요?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9-11)
하나님의 심판이 예고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AD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포위된 예루살렘 성 사람들이 모두 죽게 됩니다. 성전과 성은 불타고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파괴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예수님’을 상징하는데, 새로운 예루살렘 성이 예수님에 의해 지어지는데, 예수님이 그 기초가 되십니다.
그 뒤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시작됩니다. 이른 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이 땅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존재합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으로 불립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 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민에게 하늘 나라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온전히 ‘예수님’ 때문에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12)
참 희안한 것은 다른 예수님의 말씀은 잘 못 알아들어도, 자기들이 그 악한 농부들이라는 것은 또 알아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잡아서 재판에 넘겨 죽이려고 하지만, 아직 예수님께서 더 선포하실 말씀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잡지 못하지요.
세금 시험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13-14)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간질을 시키든지, 로마 당국의 위험인물로 낙인을 찍히게 만들든지 궤계를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일을 꾸밉니다. 원래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은 서로 상극인데,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에는 함께 연합하여 적극 가담합니다. 예수님께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면서, 접근합니다. 예수님이 경계를 풀고 그냥 어느 편이든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로마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습니까?”
예수님 시대에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방 나라의 식민지가 되어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이 당연히 싫지요. 그래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으려면, 로마 가이사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을 책잡아서 로마 당국에 신고하여서 예수님을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자로 몰아가서 자기들의 손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의 손에 죽게 만들려는 것입니다. 반대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백성들의 인기를 하루 아침에 사라지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앞잡이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대 예수께서 그 외식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 하시니,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15-17)
예수님께서 저들의 악한 계획을 아시고,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 동전을 하나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동전에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지 반문하시지요. 그들이 로마 황제라고 답하니까, 예수님께서는 로마 황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양분해서 로마 동전은 로마 황제를 위해 세금을 내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는 성전 세켈(동전)로 하나님께 헌금하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너희에게는 누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지’를 묻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질문입니다. 여러분 속에 누구의 형상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이 그 속에 있을 것이고, 여러분 속에 만약 세상의 주관자의 형상이 담겨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심
“부활이 없다 하는 사두개인들이 예수께 와서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어떤 사람의 형이 자식이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상속자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가 아내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둘째도 그 여자를 취하였다가 상속자가 없이 죽고 셋째도 그렇게 하여 일곱이 다 상속자가 없었고 최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일곱 사람이 다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 곧 그들이 살아날 때에 그 중의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18-23)
구약의 율법과 옛날 관습법에 따르면, 계대 혼인이라고 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 장남이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이 형수와 성관계를 통해서 아들을 낳도록 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보면, 굉장히 이상하고 잘못되어 보이지만, 가문과 혈통을 지키기 위한 관습이었습니다. 이런 문화적 배경 속에서 7명의 형제가 모두 한 여자의 남편이 되었다면, 부활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 여자는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로 부활하겠느냐는 문제가 생깁니다.
부활 이후의 삶을 마치 살아있었을 때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생겼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즉, 부활 후에는 예전에 이생의 삶의 관계가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마치 하늘의 천사처럼, 모두 평등하게 관계가 정립되고, 남여가 있어서 부활 후에도 결혼하는 것이 아님을 또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므로 오해함이 아니냐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24-25)
그리고 ‘부활이 확실함’을 이스라엘 조상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소개했는지 율법을 들어서 설명하십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하시니라.” (26-2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언급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동등하게 부르시고, 또한 지금 하나님 나라에 하나님과 함께 이들이 모두 살아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신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잣대로 하나님 나라를 보기 때문에 굉장히 잘못생각하는 것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더욱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 궁극적인 예수님의 가르침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28-31)
서기관 중에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을 합니다.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 묻지요. 대체로 10계명 중에 하나를 말씀하실 줄로 생각했지만, 전혀 다른 부분을 언급하십니다. 신명기 5장에는 10계명이 나오고 그 바로 뒷장에 모세가 이 십계명에 대해서 핵심을 말하는데, 역시 예수님께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께서 수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듯,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10가지 계명을 지킬 뿐만 아니라 희생과 섬김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가장 모범을 보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작은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똑같을 수는 없겠지만,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가 예수님의 성품과 말과 행동이 조금씩 변화될 줄 믿습니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32-34)
예수님께 왔던 대부분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간계를 펼쳤는데, 그래도 드물게 말씀을 정직하게 읽고 보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구주로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단지, 성경을 알고, 바르게 이해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과 교제가 시작될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로 인도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문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까?)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새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듣더라.” (35-37)
예수님은 분명 혈통적으로 다윗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서 시편을 쓸 때, 자신의 후손에게 ‘주’라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당대 사람들은 전혀 이해할 수 없고, 논리적으로 맞지도 않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나셨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즉,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단지, 다윗의 후손인 마리아의 몸을 빌어서 사람이 되신 것 뿐입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성령으로 나셨기 때문에 여전히 다윗에게도 ‘주님’이시고, 다윗이 있기 전부터, 아니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셔서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가산도 삼키는 바리새인들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38-40)
예전에는 신학자들이 38절부터 한 문단으로 보고, 41절부터는 44절까지는 헌금에 관한 교훈으로 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38절부터 44절까지 한 문단으로 보면, 우리가 배웠던 교훈과는 전혀 다른 결론이 도출됩니다. 자기 생활비 전부를 헌금할 수밖에 없었던 과부의 사정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서기관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헌금을 강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은 내려놓지 않고,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고혈을 빨아서 자신의 이득으로 삼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최소한 교회만큼은 가난하건 부하건 신분이 높든지 낮든지 상관없이 누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공동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41-44)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말과 행실이 예수님이 나의 주인되심을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이 내 것인양 낭비하고 남용한 죄가 있다면 용서하시고, 청지기의 자세로 신실하게 살아가게 도와주옵소서! 다시 오실 주님을 환영하며 맞이할 수 있게 하옵소서!
주님! 우리가 진실로 배워야 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작은 힘이지만, 연약한 능력이지만, 우리보다 더 약한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마음과 행동과 삶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가장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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