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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누가복음] 1-2장 요한의 출생과 예수님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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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025-05-07 13: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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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1:57-58)

 

 우리말은 남녀의 성과 수를 별로 구별하지 않지만, 헬라어나 라틴어나 오늘날의 영어도 구분을 합니다. 여기 ‘그’는 ‘엘리사벳’입니다. 잘못보면, 사가랴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보면. 아무튼 옛날에는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는 굉장히 불행한 여자로 인식했는데, 오늘날은 별로 그런 생각들이 없지요. 아이를 낳도록 하신 것은 하나님의 큰 복입니다. 누군가의 어머니가 된다는 것, 그것도 세례 요한의 어미가 된다는 것은 역사에 남을 큰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아버지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그들이 이르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1:59-61)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제사장 가문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율법대로 8일 만에 할례를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아서 할례를 행하기 시작한 때가 기원전 약 1400년 전인데, 지금 140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이 할례의 전통을 지키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이 가문이 율법에 대해서 철저하게 연구하고 순종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사회에서 조상의 이름을 자손이 이어 받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 주니어’로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고 했는데, 엘리사벳이 천사의 말대로 ‘요한’이라고 지으려고 합니다. 이 요한은 사가랴나 엘리사벳 가문에서는 조상들 가운데 쓴 이가 없습니다. 

 

 요한은 라틴어로 ‘요안네스’이고, 히브리어 ‘예호하난’ 또는 ‘요하난’에서 온 것으로 봅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 라는 의미입니다. 라틴어 여성형으로 바꾸면 ‘요안나’가 됩니다. 이 이름의 변천이 놀라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영어로는 ‘존’이 되고, 러시아어로는 ‘이반’이 됩니다. 독일어로는 ‘얀’으로 되고, 프랑스어로는 ‘장’이 됩니다. 이 요한이라는 이름이 유럽의 여러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는데, 참 좋은 이름입니다.  

 

 “그의 아버지께 몸짓하여 무엇으로 이름을 지으려 하는가 물으니 그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을 요한이라 쓰매 다 놀랍게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러라.” (1:62-66)

 

 아버지 사가랴가 천사의 말대로 ‘요한’으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고 의사표시를 할려고 할 때, 벙어리가 되었던 입이 풀려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요한이 태어나서 8일이 될 때 동안 사가랴가 벙어리로 있었는데, 참 다행이지요. 영원히 죽을 때까지 벙어리로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나서도 굉장히 기뻤지만 그때도 말이 안 나왔는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니 비로서 사가랴의 입이 열렸습니다. 

 

 이런 역사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입니다. 누구도 요한이라고 이름을 짓는데, 방해를 하지 못하게 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보통 여성이나 어머니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거든요? 여성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회적 관습과 문화였습니다. 하마터면, 사가랴도 아닌 제 3자가 마음대로 이름을 짓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시기 위해 때마침 사가랴의 입이 열린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름에 대해서 누가 왈가불가 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 아이가 자라서 어떻게 될지 점점 관심과 기대가 커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이 성장할 때, 하나님의 사자로서 사역하는데, 사람들이 무시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주님의 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 사가랴의 예언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1:67-71)

 

 

 사가랴가 입이 풀리자 한 행동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받은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태어난 아들에게 뭔가 말을 하고, 이름도 지어주고 그 동안에 있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얘기할텐데, 먼저 하는 말은 요한의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것이 가족간의 애정을 나누는 일보다 더 크고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하나님의 메시야는 다윗 가문, 즉 유다 지파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량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사야나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된 약속입니다. 다시 사가랴도 언급하는데, 이스라엘과 유다의 원수들로부터 구원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예언합니다. 사실, 여기까지만 보면, 우리 같은 이방인들은 별로 상관이 없는,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범위가 작지 않고, 점점 확장됩니다.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2-75)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을 보면,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12:3)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먼저 선택되었다는 것은 큰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그 핵심적인 역할을 할 사람이 바로 ‘요한’입니다. 사가랴는 이제 자기 아들, 하나님께서 선물로 보내 주신 요한에게 축복합니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1:76-79)

 

 요한은 앞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는 영광스러운 직책을 감당할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예수님이시지요.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게 하며, 자신들의 죄를 통회하고 자복하도록 사역해야 합니다. 사가랴가 아들 요한을 축복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역시 예수님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우리들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들이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 예수님의 탄생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2:1-2)

 

 마리아와 그의 정혼한 남편 요셉은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잉태한 마리아가 그냥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낳으면,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지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요셉과 마리아를 약속의 땅(?),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낳도록 하시기 위해서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온 로마의 백성들에게 호적명령을 내리게 합니다. 하필이면 마리아가 해산할 시기가 되어서. 놀랍지 않습니까? 역사가인 누가는 갈릴리 지역을 관할하는 수리아 지역의 로마 총독 구레뇨가 로마 황제의 명령을 공포해서 실시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2:3-5)

 

 오늘날처럼, 주민등록이 전산화가 잘 되어 있어서 멀리 가지 않고도 신고가 가능하지만, 2천 년 전에는 직접 요셉이 자기 고향 땅에 가서 유다 사람임을 증명했습니다. 해산을 앞두고 편의를 봐 줄 수도 있었을 텐데, 유다가 로마의 지배하에 있으니 꼼짝없이 황제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지요. 이런 부분을 보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세상의 정치나 사건들이 일어나게 됨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먼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세상의 역사도 뒤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로마 황제는 식민지의 상황을 파악하여 세금을 징수하고, 부역을 하도록 하기 위함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세상 역사가 돌아갑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2:6-7)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 방을 잡지 못해서, 가축 우리에 들어가서 아기 예수님을 낳게 되지요. 참 이런 이야기는 기막히게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온 세계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렇게 푸대접을 받아야 되겠습니까? 아기로 오실 때부터 이런 굴욕을 당하시고도 하나님은 어찌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실까요…

 

 한편으로는 요셉과 마리아가 이렇게 가난하고 힘없고 연약한 사람들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뿐만 아니라, 산모에게 사회적인 배려나 약자를 보호하려는 관습이나 문화가 없었음을 드러냅니다. 여관 주인들도 참 자비나 긍휼이 없습니다. 급하면 자기 방이라도 잠시 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산모와 아기를 위해서.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2:8-10)

 

 예수님의 탄생 때에 와서 경배하고 축하를 드린 사람들 또한 어떤 귀족이나 지체 높으신 양반들이 아닙니다. 그 당시 가장 천대받고 하대를 받던 목자들이 천사의 소식을 듣고,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를 드리지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동방박사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맞은 것도 아니고, 호적 끝나고 집을 구해서 잠시 머물던 곳에 찾아온 것입니다. 갓난쟁이 때가 아니라 아기 예수님이 약 2살 정도 되었던 시기지요. 그래서 유대 왕 헤롯이 2살 이하의 아기들을 죽인 것 아닙니까?

 

 요한은 그래서 수많은 레위인들, 제사장들의 친척에게 사랑받으면서,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선지자가 될 것으로 믿고 받들어졌다면, 예수님은 정말 숨겨진 보석처럼, 너무나 허술하게, 아주 소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으셨지요. 

 

 어떤 학자들에 따르면, 예수님께 나아온 이 목자들은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후예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거룩하고 구별되게 살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하고 절제된 삶으로 조상 레갑의 명령을 충실히 따른 유목민들에게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일이 있었지요. 

 

 “예레미야가 레갑 사람의 가문에게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선조 요나답의 명령을 순종하여 그의 모든 규율을 지키며 그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행하였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레갑의 아들 요나답에게서 내 앞에 설 사람이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렘 35:18-19)

 

 요나답의 후손들 가운데, 자기 조상의 명령도 대를 이어가며 철저하게 순종하는 모습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주시고 주님 앞에 설자가 끊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외면할 때, 요나답의 후손 가운데 이름 모를 목자들이  예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 끝날 때까지 간직하고 지키고 순종하는 성도 역시 세상 끝날에 영광의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버림받을지라도 끝까지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지극히 연약한 자들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겠습니까? 2천 년 전의 요셉과 마리아를 가축 우리에 보낸 자들처럼 해야 할까요? 시대는 다르지만, 우리도 역시 비슷한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 지,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에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신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끝이 없으신 분입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2:11-14)

 

 말씀을 들으며, 스스로에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있는지’ 상고(詳考)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례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인간보다도 더 못한 대우를 받으신 것을 보며, 너무나 죄송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다시는 이렇게 예수님을 대우하지 않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들의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용서하여 주시고, 지극히 낮은 우리의 형제들을 예수님께 하듯이 사랑하며 섬기게 하옵소서!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르게 맞이할 준비를 하게 하시고, 회개하고 자복하며 죄를 버리게 하시고, 주님의 말씀을 언제나 간직하며 순종하여 주님 다시 오셔서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쁨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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