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렛 성요셉 교회벽에 걸려 있는 그림>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2)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대로,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상당 기간 동안 예루살렘에 요셉과 마리아가 머물렀다는 이야기이지요. 마태복음에는 마치 예수님께서 동방박사들의 경배를 받고 금방 헤롯의 군대를 피해 이집트로 떠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 때는 적어도 1년은 지난 시점입니다. 많은 학자들은 2년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헤롯이 2살 아래의 베들레헴의 남자 아기들을 죽였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머무신 곳이 마태복음에는 ‘집’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축 우리가 아닙니다.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23-24)
율법에는 처음 태어난 남자 아기는 주님을 위해 바치라고 되어 있는데, 그 의미는 할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별된 자로 거룩하게 율법을 지키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녀를 지금처럼 하나, 둘 낳는 것이 아니라 4~5명 이상을 낳기 때문에 그 자녀들 모두를 율법대로 할례를 하고, 제사를 드릴 수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신앙심이 좋은 가정은 다 할 수도 있었겠지만, 레위인들이나 제사장 가문이 아니면 과연 그렇게 했을까요? 아무튼 유다 지파의 요셉이나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할례를 받도록 할 뿐만 아니라 율법대로 비둘기를 사서 번제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물이 비둘기인 것을 보면, 살림살이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관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5-27)
성전에 와서 기도를 드리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시므온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이분은 그저 소원이 이스라엘의 구속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여호와께서 메시야를 보내주실 것인지, 항상 기다리면서, 메시야를 보내달라는 기도를 올리는 경건한 분이었지요. 이 분에게 기도의 응답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성전에 갈 시간이 아닌 데, 성령의 감동이 와서 아기 예수님이 성전에 와서 제사를 하려 할 그 때에 시므온도 올라간 것입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을 보자 마자, 단 번에 아기 예수님이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성령의 교통과 역사 때문입니다. 거룩하고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응답도 느낄 수 있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을 가지게 됩니다. 시므온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아기를 안고 축복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고, 아기를 안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28-32)
시므온은 아기 예수님께서 장차 자라서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온 이방 세계를 구원하실 분인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구원’이라고 하지요. 또한 자기 백성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만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영광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세계를 변화시킨 위인들을 어려서부터 책을 통해 읽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 인류를 약간 편리하게 하거나 질병에서 고침을 받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세계의 위인들도 책을 읽히며 자녀에게 가르친다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반드시 가르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 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3-35)
요셉과 마리아는 시므온도 잘 모를 뿐더러,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젊은 부부에게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지요. 시므온은 마리아에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예언을 합니다. 이렇게 말해 주는 이유는 ‘아기 예수를 양육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려운 사명이지만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 분열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전쟁에서 패하듯 망하게 되지만,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승리를 얻게 됨을 알려 줍니다. 또한 예수님 때문에 비방을 많이 받게 될 것이고, 장차 예수님이 죽을 때에는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칼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깊은 상처와 아픔을 겪게 될 것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진실한 데, 이 진리에 대해서 결국에는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사람들의 생각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대적하고, 미혹하고 비방하며 사탄의 하수인 노릇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진리는 도도하게 흐르는 강처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능력이 된다고, 지구를 비추는 태양 하나 가리지 못하고 막을 수도 없는데,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거슬려서 이길 수 있을까요?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 (36-38)
성전에 경건한 사람은 시므온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여 선지자 중에 ‘안나’라는 분이 또 성전에서 늘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분은 젊어서는 잠시 한 남편의 아내로서 7년을 살았지만,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된 이후에는 오직 하나님만을 남편 삼아서 기도하는 삶으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연세가 84세라고 하니까, 결혼을 20대 초반에 했다고 해도 거의 50년 이상을 그렇게 성전에서 기도하시며 사신 분입니다. 이 분 눈에도 아기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이 보이는 것이지요.
율법대로, 2명 이상이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야라고 하나님의 구원자로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천사들이 말했다면, 이제는 일반 백성들의 눈에도 신실하고 경건한 어른들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주의 율법을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39-40)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1-42)
요셉과 마리아는 참 신실한 사람들입니다. 한 해 두 해도 아니고 매년 이렇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12살이 될 때에 일어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3-44)
요셉과 마리아가 매년 유월절을 지킬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한 가지가 나옵니다. 요셉과 마리아만 예수님을 데리고 온 것 아닙니다. 그들의 친족들이 함께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에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하면 신앙을 지킬 수 있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가 그것은 공동체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교회를 친히 세우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는 소년 예수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라든지 유다, 시몬, 여동생들과 같은 동생들도 줄줄이 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려고 여행을 했는데, 두 부부가 어떻게 이 아이들을 다 감당하겠습니까?
요셉과 마리아의 친족들이 함께 동행하면서, 예루살렘에 방문했기 때문에 서로의 자녀들을 돌보고, 아이들끼리도 형이나 누나들이 동생들을 부모를 도와 함께 챙겼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홀로 설 수 없습니다. 병들어 아플 때가 있고, 믿음이 연약해 질 때가 있습니다. 위기의 때에 서로가 서로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해서 우리를 돕기도 하시지만, 성령께서 성도들을 감화하여서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게 하고, 돕도록 역사하십니다.
12살 된 소년 예수님이 일행 중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하룻 길을 내려왔는데, 예수가 안 보입니다. 친족 중에도 없습니다. 12살쯤 되니까 친척들도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사회는 12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로 성년식을 하기 때문에 제 앞가림은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5-47)
그래서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3일 만에 성전까지 갑니다. 그곳에 예수님이 율법 선생들과 대화를 하고 계십니다. 그 내용이 자세히 소개되지 않았지만, 아마 구약성경과 율법에 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 대해서 줄줄 외울 뿐만 아니라 설명까지 하시니까 학자들이 다 놀랍게 여기게 되지요.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8)
아들을 찾았다고 안심을 하지만, 소년 예수님께 요셉이나 마리아는 책망을 하지요. 왜 집으로 돌아가는 일행에 함께 하지 않고 홀로 이곳에 남아 있느냐는 것을 나무랐겠지요. 예수님의 대답이 참 걸작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49-50)
예수님의 대답은 이 성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고, 곧 나의 집이라는 뜻이지요. 요셉도 마리아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잠시 잊은 듯 합니다. 아무튼 요셉과 마리아의 손에 이끌려 다시 갈릴리 나사렛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51-52)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살게 되실 때까지 육신의 부모를 잘 공경하며 사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사랑받도록 거룩하고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는 첫 아들을 주님께 바치고, 할례를 행하며, 절기를 지킬 만큼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가정에 메시야를 보내 주신 것을 볼 때, 우리들도 그러한 믿음의 가정을 이루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경건하여 주님의 큰 은혜로 아기 예수님을 본 시므온과 안나처럼, 경건하게 기도하면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참 어른답게 주님의 은혜와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주시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몸된 교회가 어린 자녀들을 잘 보살피고 양육할 수 있게 하시고, 주님의 백성들을 주님 나라의 일군으로 성장시키는 주의 기관되게 하옵소서! 자녀들이 점점 자라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게 하시고, 예수님처럼 부모에게도 사랑받고 가정과 이웃의 기쁨이 되며, 세상을 섬기는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쁨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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