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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누가복음] 4장 시험받으시는 예수님, 나사렛 회당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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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53회 작성일 2025-05-28 13:4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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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시험”, Philips Augustijn Immenraet, 1663) >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1)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는데, 광야에 머무셨습니다. 왜 광야일까요? 광야에서 40일 동안 계셨는데, 40이란 숫자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광야에 머문 기간이 40년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에 40일 만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우리는 그들의 밥’이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고, 불순종하여,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그 하루를 1년으로 해서 40년간 광야를 빙빙 돌다가 20세 이상의 어른들은 모세와 갈렙,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광야에서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도 이 40일 동안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머무십니다.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굶고 계셨음이 차이가 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과 불평을 하면서, 얼마나 모세에게 반항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히 성령의 인도를 따라 그 배고픔과 굶주림을 견디셨습니다. ‘어떻게 성령에게 이끌리시는데, 굶주릴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면, 이런 저런 무슨 기적을 일으키고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전혀 예상 밖의 일이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2)

 

 더 충격적인 사실은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천사도 아니고, 그냥 일반 사람들도 아닙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가장 강력한 대적입니다. 이 부분을 생각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기억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오히려 가장 사탄의 자녀에게 시험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을 이기시고 승리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진정한 유혹과 시험은 대적자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그 유혹에 지지 말고 승리해야 하나님께 참으로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수 없지만, 성령의 이끌림을 받으면,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처럼 승리할 줄 믿습니다. 사람이 배고픈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지요. 예수님은 40일을 굶주렸습니다. 거의 죽음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적이나 능력으로 먹을 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들지 않아도 들짐승들에게 명령해서 먹을 것을 가져오게 할 수도 있지만,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절 양고기와 발효되지 않았지만 빵도 있었고, 정 먹기 싫은 쓴나물도 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보릿고개를 넘기기 위해서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먹을 거리로 삼아 연명했다고 하는데, 광야에는 그런 것 조차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전히 40일은 금식하신 것입니다.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3)

 

 이 때 마귀(사탄)가 예수님의 능력을 사용해서 먹을 것을 만들라고 합니다. 솔깃한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돌을 떡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예수님은 완전한 신으로서 이 세상의 죄인들을 위한 인간의 대속물은 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참 사람으로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완전한 신성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이 아니라, 인성으로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임도 증명하시고, 또한 우리 죄인들을 위한 흠없은 대속제물이 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4)

 

 우리 인간은 먹을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영의 양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매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하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르되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5-6) 

 

 마귀는 ‘거짓의 아비’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보면, 천하 만국이 자기 껏인냥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도 그 속에 사는 인간들도 마귀에게 다 속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당연히 주인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잠시 이 땅에서 주인행세를 마귀가 하고 있습니다. 이 천하의 권위와 영광을 내가 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유혹 앞에 넘어졌습니다. 권력과 명예의 노예가 된 것이지요. 그러나 단 한 분 예수님만이 이 시험에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바알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물론, 모세를 비롯한 여호수아와 갈렙 만큼은 그렇지 않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 몇 몇 사람들이 대다수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막지 못했습니다. 레위인들도 상당 부분 침묵의 동조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상숭배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어도 어떻게 우리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한 책임이 없을까요?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7-8)

 

 사탄은 ‘자기에게 절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역시 말씀으로 ‘기록된 바…’ 하시면서 그 유혹을 물리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죄악에 동참한다고 해서 그 전리품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사탄이나 악인들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그들은 애시당초 ‘신뢰’도 없고, 참 ‘의리’도 없습니다. 다만 유혹하고 범죄하게 만들어서 이용할 뿐입니다. 자기들의 책임을 전가시키고 자기들의 부당한 행위와 죄악들의 책임을 나누려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이익(?)은 전혀 나누거나 줄 생각이 없습니다. 혹 조금 누릴 수 있게 작은 권한을 준다고 처도, 그 올무를 이용해서 더 많은 범죄를 요구하고 이용하려 듭니다. 

 

 예수님은 단칼에 거절하시지요. 이런 단호함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전혀 위배되는 것은 거들떠 보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이나 악인의 달콤하고 그럴 듯한 말은 처음부터 믿으면 안 됩니다다.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9-11)

 

 놀랍게도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인간의 안전에 대한 욕구인데, 어떠한 환난이나 역경에서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실 것이니까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 간의 신뢰를 무너뜨리기 위함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의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면, 이런 어려움과 고통에 빠지지 않게 하실 것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40일을 굶으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가장 마주치기 싫은 대적을 상대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항상 천국에서 천사들의 섬김만 받고 평안하게 지내실 수 있는데, 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지위와 권리를 내려 놓고, 시험을  받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자 처절하게 외면당하고 고통 가운데 처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찢어질 듯 아플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그 여정에는 항상 고통과 괴로움과 시험과 환란이 닥칩니다. 우리는 잘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있는데, 어려움이 계속 생겨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고난과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이 분명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셨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거절하십니다. 우리들도 세상의 불의한 일에, 유혹에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에 따른 불이익과 고통을 감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말은 쉽지만, 행동은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늘 성령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내 기분이나 감정대로 행동하지 않고, 말하지 않기 위해서. 항상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고, 말씀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12-13)

 

 예수님께서 모든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후, 끝입니까? 아닙니다. 놀랍게도 사탄이 마귀가 잠시 떠나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좀 시간이 지나면 또 다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은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해도, 조금 후에 우리가 방심하고, 나태하고 교만해져 있을 때, 사탄의 유혹은 다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기도해야 하고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한시도 성령님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힘으로 사탄을 이길 수 있을 거란 교만한 마음이 들 때, 사탄은 기회를 엿보아서 다시 다가올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지만 실패하자, 예수님을 죽이고자 다시 찾아옵니다. 말을 안 들어버리면, 죽이려고 하는 그런 세력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그래서 십자가에 죽으시지요. 순교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패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으로 악을 이기셨습니다. 우리들도 죽기까지 죄와 악과 싸워 승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4-15)

 

 예수님께서 40일을 굶으셨는데, 무슨 기력으로 광야에서 갈릴리로 돌아가셨을까요? 여기 14절에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했다고 말씀합니다. 참 놀라운 일이지요? 우리가 40일 먹지 않으면, 걸어갈 기운이 있을까요? 아마 서 있기도 벅찰 것인데, 갈릴리로 가셔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 말씀이 능력이 있고, 힘이 있어서 사람들이 몰려 듭니다. 사람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6)

 

 예수님께서 고향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는데, 예전에도 회당에서 성경을 읽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다릅니다. 40일 금식 후에 시험받으시고 돌아오신 후에 성경을 읽는 것이 달라지고 말씀을 전하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17-19)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사야서 중에 택하시고 고르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사야서 61장에 나오는 ‘나’는 잘못읽으면 이사야 선지자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뜻하는데, 이제까지 그 어떤 율법학자나 예언자나 제사장들, 서기관들조차 이 구절에 나오는 ‘나’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메시야 정도로만 알았지 특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나’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기에 대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콕 집어서 스스로를 드러내셨습니다. 

 

 이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사탄’에게 포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박을 푸시고 자유를 주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사망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소경이었는데, 영적 세계를 알려 주셨습니다. 심지어, 영안을 열어서 하늘의 세계를 보여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든 인류는 ‘죄’로 눌려 있었는데, 이 죄의 짐을 벗어 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0-22)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외면합니다. 편견에 사로잡혔기 때문입니다. 늘 곁에서 어린 예수님을 보아왔던 터라, 그저 목수 요셉의 아들 쯤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3-24)

 

 예수님도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리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을 밝히시고 그리스도로 선포하셨을까요?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까운 이웃이라고 해서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믿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자기 이웃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을 것을 아시면서도 복음을 전해 주시려 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예수님을 마치 재미있는 구경꺼리를 제공하는 마술사처럼 생각하고 공연(?)이나 보려 했던 것이지요.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으되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느니라.” (25-27)

 

 유대인 가운데 메시야가 오셨는데, 오히려 이방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섬길 것입니다. 구약에도 그런 예가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와서 아무리 여호와를 전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하기에 빠져 있었고, 오히려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서 엘리야의 말을 듣고, 여호와를 믿는 사람들이 몇 몇 생겼습니다. 시돈 사람 사렙다 과부가 그러했고, 아람 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그랬습니다.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 예수님 당시에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현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늘 구약성경을 읽으면서도, 오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그리고 하나님도 참 기가찰 노릇입니다.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28-30)

 

 예수님께서 자기 고향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을 지적하시니까,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오히려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본성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고칠 생각을 하기보다는 더 마음이 완악해져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대적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디 우리 성도들은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성령의 충만한 가운데에서 육신의 고난과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주님을 믿다가 섬기다가 고통과 고난이 닥칠 수 있음을 알고, 항상 말씀으로 무장하게 하옵소서! 아버지를 더욱 신뢰하고 의지하며, 우리에게 오는 죄의 유혹들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내려놓게 하시고, 오직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만을 높이며, 자랑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사탄의 유혹과 죄의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고, 메시야이심을 밝히 알게 하셨지만, 고향 사람들은 편견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을 비난한다고 생각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하는 완악한 모습을 보입니다. 저희들은 그러한 잘못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옵소서!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언제나 하나님 말씀 앞에 정직히 우리 모습을 돌아볼 수 있게 인도하옵소서! 

 

 우리가 가진 얄팍한 지식으로 교만하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말씀을 듣고, 삶 가운데 말씀을 되새기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의 참 구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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