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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누가복음] 6장 '복'과 '화'를 선포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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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2회 작성일 2025-06-11 16:3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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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s://www.ggnews.co.kr/96732 >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17)

 

 예수님께서 12제자, 훗날 사도라고 불리게 되는 사람들을 세우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병든 자를 고치시면서, 따르는 제자들과 수많은 대중들에게 ‘복’과 ‘화(저주)’를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그 장소를 ‘산’으로 설명하고, 여기 누가복음에는 ‘평지’로 묘사합니다. 신학자들은 누가복음 6장에 나오는 말씀을 ‘평지설교’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아마 산이나 평지나 한 번 씩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반복하셨던 것 같습니다. ‘산’이건 ‘평지’이건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둘 다 받아들이고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아주 중요하고 핵심적인 가르침을 주십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0)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누가복음에는 마음이라는 수식도 없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물론, 대체로 가난한 사람이 마음도 가난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랐던 무리들이 거의 가난했습니다. 예수님 곁에 가면, 놀라운 이적으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로마 식민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요할까요? 단지 예수님은 가난해서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가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야를 보았고 만났기 때문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은 굶어서 돌아간 것이 아니라, 허기를 채워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지금 당장 굶주림보다 영원한 생명을 그리스도로부터 얻게 되는 놀라운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복’인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인 사람이나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은 사람은 ‘복’은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의 양식으로 참된 배부름을 얻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1) 

 

 사람이 우는 이유도 가지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너무 기뻐서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금 우는 자를 언급하실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로마의 식민지 백성들이기 때문에 억눌리고, 강탈당하고 괴로움 때문에 고통 속에서 울 것입니다. 또한 같은 민족이라도 그 안에 힘 있는 종교 권력자들에 의해서 율법으로 탄압을 받습니다. 사두개파나 바리새파 사람들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눌리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종교나, 인종이나 빈부나 여러 가지 억압하는 제도나 인습의 잘못된 것들을 개혁하고 참 자유를 누리게 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백성들은 마음 속으로부터 시작되는 자유로부터 시작해서 종말적으로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오는 새로운 영의 몸을 입고 영원한 하늘 나라,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복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2)

 

 어둠과 악의 세력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복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거짓으로 미혹하며, 심지어 박해를 일삼습니다. 오늘날도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아무 이유도 없이 미움과 시샘을 받습니다. 그리고 괴롭힙니다. 만약 그런 상황 속에 있는 성도님이라면, 오히려 기뻐해야 합니다. 내가 확실히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때문이어야 합니다.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고, 기쁜 나쁘게 만들면서 미움을 받으면, 그것은 개인적인 잘못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사랑하고 섬기는데도 불구하고 미움을 받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3)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이나 무리에게 ‘복’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에는 팔복만 언급이 되어 있지 ‘화’, ‘재앙’, ‘심판’ 같은 것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산에서 내려와 다른 곳에서는 마태복음에서 ‘화’를 선언하시지요.  그러나 누가는 ‘복’과 대조적으로 ‘화’도 언급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다면, 반대로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 가르침을 무시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화’가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의 양면성입니다. 

 

 천국이 있다면, 지옥도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천국에 가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 이 땅에 남아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지옥’에 갑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회색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개인, 민족, 나라 누구나 예외 없이 다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보통,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지옥을 별로 언급하지 않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될 것이란 것을 말하면, 당연히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사람이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길을 없습니다. 다른 신도 없고, 다른 구세주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다 거짓 교주요, 사탄 마귀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4-25)

 

 이 땅에 예수님은 매우 초라하게 오셨고 가난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시했습니다. 같은 동네 사람도 무시하는데, 로마인이나 권력자들은 어떻겠습니까? 사실 힘있고 돈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단지 부자라서, 권세자라서 ‘화’를 당하고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말씀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거의 모두 돈과 힘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열심히 공부도 자녀를 가르치기도 하지요. 그러나 생명이 우선합니다. 제 아무리 힘과 권력을 가져도 이 땅에서 잠시 잠깐 누리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힘과 권력을 어떻게 썼는지에 대해서 하늘의 청구서가 있습니다. 

 

 대체로, 권력을 가졌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그 많은 거짓과 속임수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고통과 파멸로 이끌었는지 모릅니다. 자기 가족과 자기 식구들만을 위해서 사용하지요. 경중에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어느 나라나 민족이나 다 비슷하고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은 거의 정의가 아니라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국민들이 어리석어서 그냥 자기가 보는데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그렇지, 우리는 진실을 모릅니다. 

 

 단 한 가지 진리,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변하지 않고, 오늘까지 2천 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말씀하시고, 구약 성경은 3천 년이 넘게 한결같이 메시야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교묘한 이단, 사이비들이 성경을 비틀어서 해석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기는 하지만, 정직하게 읽고 성령의 조명을 받으면, 정확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진리를 발견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택하신 사람에게 듣는 귀와 보는 눈과 깨닫는 마음을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공공연한 비밀인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믿어지는 사람은 주님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만 받아들여집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6-28)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땅에는 선택된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이 공존하기 때문에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혹시 ‘사랑’ 때문에 사람이 변화를 받는 경우가 있으므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바울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는지, 시리아 땅의 다마스커스 까지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택하시지 않습니까? 그가 돌이켜서 얼마나 많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는지, 우리들도 그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선대하고 축복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기도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 감정이나 생각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지만, 반대로 우리 같은 죄인도 용서하신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순종해야 합니다. 마음이 잘 바뀌지 않지만,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기분조차도 바꿔주실 것입니다.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29-31)

 

 말씀을 잘못 읽으면, 새디스트가 되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학대받는 것을 기뻐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31절 말씀은 많은 학자들이 ‘황금률’이란 말을 붙입니다. 내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해야 나에게도 그런 대우가 온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숨은 이면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대하여 주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하나도 없고, 심지어 누구에게 실수한 일도 없습니다. 아주 선한 일만 하셨는데,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산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없었으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 되셨고, 만왕의 왕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되십니다. 할렐루야! 

 

 깊이 이 말씀을 묵상하면, 우리가 우리의 형제나 자매나 이웃을 살리려면, 우리가 죽어야 하고 우리가 희생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우리의 자리에서 희생함으로 수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셔서,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32-35)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심판을 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자하시기 때문에 당장에 심판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를 알았다면, 이제부터는 우리도 변해야 합니다. 한 순간에 변화되지 않겠지만, 우리와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화목하려고 희생하고 선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6-37)

 

 참 어려운 말씀이 있습니다. 비판과 정죄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모든 정치인들의 불의와 불법을 그대로 넘어가고 용인하고 묵인하라는 뜻일까요?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구조적인 악에 대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합니까? 그것을 우리가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참 용서일까요? ‘바르게 정의롭게 고쳐 나가야 사회나 민족이나 가정이나 개인도 옳은 일일텐데, 그냥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만이 능사일까?’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둘러 엎으시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면, 이 말씀을 단지 그냥 죄를 덮어 주고 넘어가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죄에 잘못에 대해서는 저지하고 막아야 합니다. 계속 그대로 놔 두어서는 안 되지요. 우리는 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죄를 정하지 않고 용서가 됩니까? 죄는 죄이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고 바르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권한 밖의 심판까지 하려는 실수를 범하지요. 그래서 어느 선까지 명확히 해야 하는지 늘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자리에 있는 분들은 늘, 기도하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양심에 따라 판단하시지만,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영역에까지 판단하려고 들지 않도록 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한 영혼, 한 영혼의 생명입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심판과 정죄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8) 

 

 예수님의 설교를 직접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참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 주라고 하셨는데, 목적어가 없습니다. ‘무엇을’ 주라는 의미인지 그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단지 그 앞의 문구만을 대입하면, ‘자비’, ‘용서’를 주라는 의미겠지요. 가장 무난한 해석입니다. 반면에 그 시대적 상황을 대입하면, 여러 가지로 해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로마에게 세금을 바치는 세리가 구하는 대로 더 준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수탈당하고 자기와 가족들은 굶주리게 되는데, 이런 가르침을 쉽게 수용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앞절에서 보면, 그런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주며…’ 하지 않습니까? 

 

 어느 중국의 선교사님이 한 마을에 들어가서 함께 살면서 전도하는 중에, 너무 가난한 마을이라서, 선교사님의 제안으로 돼지를 키우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돼지를 키워서 장에 내다 팔게 했는데, 고개 넘어 옆 마을 장터에는 돼지값을 더 비싸게 사 주는 것을 알고, 차를 빌려 동네 돼지를 팔게 됩니다. 그런데, 고개를 넘다가 강도 때를 만나서 그만 돼지를 판 돈을 모두 빼앗기게 됩니다. 그래서 마을의 이장이나 사람들이 그 선교사가 강도들과 짜고 이런 일을 꾸몄다고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교사님 있는 교회에 돼지 판 돈보다 더 많은 돈이 보따리에 싸서왔다고 합니다. 보니까 강도가 다시 돌려 보내준 것이었지요. 이 선교사님이 다시 마을 이장과 함께 그 돈 보따리를 들고 고개 넘어 강도 때를 찾아가서 도로 돌려 주었다고 합니다. 그 강도의 대장이 ‘나도 좋은 일도 한 번 좀 할려고 했는데, 왜 돈을 다시 가져왔냐고 다시 가져 가라’ 했습니다. 선교사는 그럼 우리 것만 되찾아 가겠다고 하고, 대장은 다 가져가라고 옥신각신 했다고 합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마을 이장은 선교사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선교사님을 의심했다고. 선교사님은 자신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그냥 돈을 다 주라고 했는데, 자신은 강도들과 내통한 줄 알았다고 하면서, 용서를 구했고, 그 뒤로 마을 이장과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 선교사님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실천한 것 뿐입니다.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39-42)

 

 거짓과 진실, 죄와 허물 등 이런 것을 정확하게 바르게 볼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는 다 자기 생각과 자기 잣대로 판단하지만 옳은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을 너무 쉽게 함부로 판단하다가는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오해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우리가 판단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어그러지고 잘못된 시선과 관점을 고쳐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온전해 질 때에야 비로소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43-45)

 

 여러분은 좋은 나무입니까? 못된 나무입니까? 사실 질문이 잘못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들은 접붙임을 받은 가지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들은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좋은 나무는 예수님을 의미하고 못된 나무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좋은 나무에 접붙임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어, 그 자양분을 얻어서 ‘선’을 쌓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못된 나무에 붙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주님 안에 붙어 있기를 간절히 원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교통으로 새로운 힘과 능력을 공급받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주추 없이 흙 위에 집 지은 사람과 같으니 탁류가 부딪치매 집이 곧 무너져 파괴됨이 심하니라 하시니라.” (46-49)

 

 우리가 예수님께 붙어 있다고 하면서, 사실은 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여기에 성도들의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죄와 악으로부터 우리를 건지셨는데, 다시 그 속으로 스스로 속박되기를 원하십니까? 이제 죄를 끊어 버리십시오. 

 

 전통적으로 ‘집’은 사람의 육신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물론, 엘리야와 에녹은 예외입니다.) 이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서, 영원한 파멸로 갈지, 아니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한 장막에 거할 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진정으로 영접한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교훈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면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집에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서 ‘복’과 ‘저주’가 우리 앞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복’을 선택하고 따르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고는 구원이 없음을 알고, ‘화’와 ‘저주’를 향해 가는 우리의 가족, 친지, 이웃들을 돌이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음을 늘 기억하고, 그러한 대접을 받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하시고, 우리도 형제와 자매들, 이웃을 위해 희생하며 섬기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대접받은 대로 우리도 행하게 하옵소서!

 

 주님! 말씀을 늘 되새기며,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늘 주님과 연결되게 하시고, 성령의 충만함과 교통 속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인도하옵소서! 우리의 참 스승이요, 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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