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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누가복음] 8장 예수님을 섬긴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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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3회 작성일 2025-06-27 06: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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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biblicalfigure.exbible.net/>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1-3)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대접을 받으실 때, 향유를 부은 여인이 언급되지 않습니까? 7장에는 이름이 드러내지 않았는데, 8장에는 여러 명이 언급됩니다. 대부분은 예수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악귀가 들렸다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막달라(지역 이름) 출신의 마리아, 그리고 큰 병에 걸렸다가 예수님께서 고쳐 주셔서 예수님을 섬기게 된 요안나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실, 다른 복음서에는 그렇게 이름이 자주 언급되지 않습니다. 당시 사회가 가부장적인 배경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주로 12제자들과 예수님의 대적들에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서 예수님 주위에서 자기 소유로 섬겼던 여인들의 내용이 아쉽게도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누가복음을 통해, 여성들의 보은(報恩)이라든지, 예수님의 사역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 것을 드러냅니다. 

 

 

 

 

 막달라는 염색과 직물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고대에 염색은 고도의 기술이며 염색된 천은 고가에 팔려 나갔지요. 그래서 막달라는 굉장한 부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이 많으면 항상 사치와 방탕이 문제가 되지요. 돈이 많은 곳은 도덕적으로 부패한 곳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귀신을 쫓아주신 예수님께 은혜를 갚고자 자신의 소유로 예수님을 섬깁니다. 

 

 부유한 성도들은 이 마리아의 섬김을 잘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를 가지고 사치하고 방탕하고 향락에 쓸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교를 위해서 재정을 드리고 도우십시오. 큰 일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는지 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헤롯은 갈릴리의 분봉 왕인 헤롯 안디바를 가르키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 왕은 자기 지역의 세금을 받아서 다시 나라를 위해 투입하는 재정을 맡은 관리가 있지만, 왕의 개인의 재산을 맡은 ‘청지기’가 따로 있었습니다. 여기 ‘구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이 사람의 아내 ‘요안나’가 어떻게 예수님의 은혜를 입었는지 복음서에 이름이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요한복음 4장에 왕의 신하의 아들을 예수님께서 고치신 일이 있는데, 바로 그 신하가 ‘구사’일 것으로 많은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아무튼  청지기의 아내이기 때문에 상당히 부유했을 것으로 봅니다. 이 여인도 예수님의 선교여행을 돕습니다. 

 

 그리고 수산나가 등장합니다. 이름은 '백합(Lily)'이라는 아름다운 꽃을 뜻합니다. 성경에 그녀의 출신지, 가족 관계, 어떤 병을 앓았는지 등 구체적인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도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이름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을 섬기고 후원하였지만, 누가가 그 이름을 찾아내어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예수님은 복음사역에 동참한 이 여인을 잊고 계실까요? 절대로 빠뜨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누가는 다른 여인들은 생략하고 넘어갔더라도 하늘의 책에는 반드시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항상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어떤 누구의 기억됨을 바라기보다, 주님께서 나를 지켜 보심을 기억하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은혜를 잊지 않고 주님을 섬긴 이 여인들처럼 우리들도 항상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서양의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한국여성들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구조 속에서 차별받는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이런 여성들이 사회 속으로 나올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준 것이 기독교와 선교사였습니다. 먼저 선교사들은 자신의 이름이 없는 한국 여성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고, 교육의 기회가 없는 이들을 교육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사회적으로 활동하기 어려운 당시 여성들에게 활동할 수 있는 역할을 주었는데, 그 역할이 바로 ‘전도부인’입니다.

 

 전도부인은 영어로 'Bible Woman'입니다. 이들은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안방의 여성들을 찾아다니며 성경, 찬송가를 팔고 한글을 가르쳐주며 기독교 복음을 전했던 권서인(勸書人)이자 복음전도자였습니다. 선교사들은 본국에서 오는 기금으로 전도부인을 고용했으며, 대체로 2∼5명의 전도부인과 함께 일했습니다. 여성에게 더없이 폐쇄적인 유교적 관습이 팽배하던 시기에 여성이 자신의 일을 갖고 활발히 활동할 수 있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전도부인은 복음을 받아들이고 전하는 행위를 통해 남녀평등 사상과 인격적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복음을 전하는 것 외에 문맹의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그들의 의식에 새로운 자극과 깨우침을 주었습니다. 전도부인들을 통해 교육받은 여성들이 나아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하기도 했고, 여성해방운동과 농촌계몽운동, 절제운동, 금주•금연 운동 등에도 앞장서기도 했습니다.

 

 서양선교사들이 복음 전도를 위해 전도부인이라는 직분을 세우긴 했지만, 동시에 당시 한국 사회에 팽배한 남존여비의 틀을 깨고 사회적 약자인 한국의 여성들에게 활동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것은 교회와 성도의 역할에 대해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사회적인 약자들을 돌아보는 것, 사회적인 어떠한 편견도 다 버리고 한 영혼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이러한 일들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교회의 마땅한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1) 시베리아 최초 파송된 전도부인 오한나

전도부인 ‘오한나’는 루이스 맥컬리 선교사와 함께 일했는데, 오씨 성은 남편의 성이고 한나는 성경 인물 중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 이름을 받았기에 그녀의 본래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그녀가 언제 태어났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기록이 없고, 캐나다장로교회 선교부로 보고된 영문자료에서 기록이 남겨 있습니다.

 

 오한나가 어떻게 ‘전도부인’이 되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은 1907년 한반도를 휩쓴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큰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기 그녀는 성령의 뜨거운 역사를 체험하며 단순한 성경 판매원인 '권서(勸書)'에서 확신에 찬 복음 전도자인 '전도부인(Bible Woman)'으로 거듭났습니다.

 

 1900년 캐나다장로교회 파송으로 내한한 루이스 맥컬리(리루이시, 1864~1945) 선교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오한나는 1년에 1160km를 걸어 다니며, 1200명이 넘는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며 충성스럽게 일했다고 합니다. 조선인이 외국인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운 그 시절, 여성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던 때에 오한나가 선교사에게 받은 복음을 아름답게 전했다고 평가받았습니다.

 

 그녀는 마을과 가정을 방문하며 성경을 가르치고, 여성들을 위한 소모임을 조직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 안의 여전도회, 구역모임의 모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렇게 성경을 배운 여성도들이 함흥을 비롯한 함경도 지역의 교회 여성들이 오한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훗날 그녀가 시베리아로 파송될 때, 그 경비를 함경도 지역 교회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모아 지원한 것은 그녀가 이 지역에서 얼마나 깊은 신뢰와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함경도 지역에 살던 오한나의 친척과 이웃 등 주변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많이 이주해 있었는데, 1909년 조선독노회가 시베리아에 최관흘 목사를 파송했습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 교회가 세워지고, 최관흘 목사는 조선인 여성들을 위한 사역자가 절실하다는 간곡한 요청을 교회에 했습니다. 그리하여 오한나 전도부인을 시베리아로 파송하게 되지요. 한국교회 역사상 총회의 공식적인 결의를 거치지 않은, 지역 교회와 성도들의 자발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해외 선교사 파송 사례 중 하나입니다. 비록 공식적인 파송은 아니었지만, 1926년 총회 결의로 파송된 한가자 선교사보다 16년이나 앞서 시베리아 땅을 밟은 오한나는 사실상 '시베리아 최초의 여성 선교사'였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오한나는 약 6개월에서 1년 동안 머물며 한인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소학교를 세워 남녀 학생들에게 글과 복음을 가르치며 흩어져 있던 한인 공동체를 신앙 안에서 하나로 묶는 데 힘썼습니다. 일제의 압제를 피해 이주한 동포들의 고단한 삶 속에서 그녀가 전한 복음은 큰 위로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시베리아에서의 사역을 마친 오한나는 함경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녀는 마르다 윌슨 기념 여자성경학원의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며 미래의 여성 지도자들을 돌보는 한편, 전도부인으로서의 사역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쉼 없는 사역은 그녀의 건강을 앗아갔고, 1921년 11월, 폐결핵으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1921년 기독신보 기사와 선교보고서에 루이스 맥컬리 선교사는 “조선 사역에 있어 나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조언자인 오한나를 주님께서 더 높은 섬김의 자리로 부르셨다. 캐나다 친구들에게 유명한 인물인 그녀는 20년간 여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1926년에 총회 외지전도국 결의로 ‘한가자’란 여전도인이 시베리아로 공식 파송됐지만 오한나는 이미 16년 전 시베리아로 갔었던 것입니다.

 

 2) 연동교회 첫 번째 여집사 신 마리아

 미국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여성사역자 통계에 1887년부터 전도부인이 등장합니다. 1900년 대에 미즈 신(Mrs. Shin)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신 마리아라고 추정이 됩니다.

 그녀는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당시, 개화파로 몰려 희생된 고관의 딸이었습니다. 정변의 와중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그녀는 극적으로 조선에 막 도착한 미국 공사관 의사 호레이스 알렌(Horace N. Allen)에 의해 구조됩니다. 알렌 부부는 그녀를 양녀(養女)처럼 거두어 길렀고, '마리아(Maria)'라는 세례명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선교사들의 가정에서 영어를 비롯한 신식 학문을 배우며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자라났습니다. 비극적인 운명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 경험은 그녀를 더욱 단단하고 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신마리아의 세례명은 김마리아였습니다. 1890년 신정우와 혼인했고, 남편의 성으로 개명했습니다. 신 마리아는 1894년 연동교회를 설립한 사무엘 무어(Samuel A. Moffett, 한국명 서무어) 선교사의 가장 신뢰받는 동역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는 무어 선교사의 '조사(調査, Helper)'로서 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조사'는 당시 선교사를 도와 성경을 가르치고, 전도하며, 교회를 돌보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현지인 사역자를 의미합니다. 신마리아의 총명함과 신실함, 그리고 탁월한 리더십을 눈여겨본 연동교회는 1905년, 그녀를 교회의 첫 번째 '여집사'로 임명합니다. 이는 한국 교회 역사에서 매우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성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직분을 맡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마리아가 성도들로부터 얼마나 깊은 신망을 얻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연동교회가 그만큼 시대를 앞서가는 교회였음을 의미합니다.

 

 신마리아의 전도 활동은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그녀의 주된 사역은 가가호호를 방문하는 '축호전도(逐戶傳道)'였습니다.

 

① 양반 부녀자 전도: 그녀는 특히 복음을 받아들이기 가장 어려웠던 계층인 양반가의 여성들을 집중적으로 찾아갔습니다. 유교적 관습에 얽매여 있던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녀는 자신의 출신 배경과 뛰어난 학식을 바탕으로 지혜롭게 접근했습니다.

 

② 남성들도 압도한 설교: 신마리아는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남녀가 유별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금기시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논리정연하고 설득력 있는 설교는 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한번은 양반 남성들이 모인 사랑방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는데, 처음에는 “어디 여자가 겸상도 못 할 자리에 들어오느냐” 하며 핀잔을 주던 남성들이 그녀의 해박한 지식과 당당한 태도에 압도되어 끝까지 귀를 기울였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합니다.

 

 신마리아는 교육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무어 선교사의 부인과 함께 1894년 연동교회 구내에 '연동여학교'를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학교는 훗날 한국의 명문 사학인 정신여자중고등학교(Chongshin Girls' School)의 모태가 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학교가 처음 시작된 장소가 바로 신마리아의 집 사랑채였습니다. 사랑채는 전통적으로 남성 주인이 손님을 맞이하고 활동하는 '금녀(禁女)'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런 공간을 여자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내어준 것은, 그녀가 얼마나 봉건적 인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일화입니다.

 

 그녀는 학교 설립에 그치지 않고 직접 교사로 나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많은 여성이 교육의 기회를 얻고 신앙 안에서 새로운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교감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지요.

 

 이처럼 여러 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던 신마리아는 안타깝게도 1908년, 당시 많은 사역자들의 생명을 앗아갔던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록 그녀의 삶은 짧았지만, 갑신정변의 고아에서 시작하여 연동교회의 첫 여집사이자 여성 교육의 선구자로 살았던 그녀의 인생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신 마리아는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이라는 한계와 시대의 아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고, 오히려 그것을 복음 전파와 사회 변혁의 도구로 사용했던 위대한 믿음의 선배였습니다. 그녀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영감과 도전을 줍니다.

 

 신마리아가 자모강연한 원고가 연동교회 역사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신 마리아는 사람이 양반과 천민의 태어남으로 결정되지 않고 어머니의 교육으로 결정된다는 내용의 설교하며 차별의식을 깨는 기독교 정신을 이어왔습니다. 오늘날 연동교회가 여전도사님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런 전통에 영향받았을 것이고, 연못골이란 곳이 여성과 남성이 함께 어울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 공간으로서 오늘날에도 상징성이 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예수님을 섬긴 여성들이 결코 잊혀진 바 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누가가 기록 하였듯 하나님은 저들의 섬김을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먼저 예수님께 받은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항상 그 은혜를 보답하고자 주님을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 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은 선교사들만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던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전도부인이 있었고, 여성과 어머니들이 깨어 나라와 민족을 복음화 시켰음을 배웠습니다. 우리들도 남녀 구분없이 각자의 자리에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예수님을 전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고 선포하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많은 생명의 열매를 얻고, 부흥하고 발전하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하며, 우리를 부르시어 주님의 제자로 삼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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