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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에는 3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공통점은 잃었다가 다시 되찾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잃은 양의 비유’는 마태복음 18장에도 소개되기 때문에 홈페이지 ‘수요기도회’ 설교에서 검색하셔서 참조하시기 바라고,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잃어버린 드라크마 비유’와 ‘잃은 아들의 비유’만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8)
예수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이 나왔을 때,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공공연하게 ‘죄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은 세금을 걷어서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세리들과 그들과 함께 부역하는 깡패, 조폭(?)들과 매춘하는 사람들입니다. 드라크마는 그리스 사람들이 쓰던 은전, 은화를 말하는데, 기본적인 화폐단위입니다. 그리스가 알렉산더 대왕 이후로 온 지중해를 다스릴 때에 그 돈이 온 세계에 퍼졌기 때문에 그리스의 식민지였었던,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가 된 유대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드라크마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1드라크마는 로마식으로는 1 데나리온이고 보통 성인 남자의 하루 노동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드라크마’는 그냥 은화가 아닙니다. 그냥 1 드라크마도 우리 돈으로 약 15만원 정도 되니까, 잃어버리면 열심히 찾아봐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가치있는 결혼 혼수품이었습니다. 위의 이미지를 보시면, 10개의 동전을 꿰어서 머리띠 장식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드라크마’입니다. 일반 가정의 아내에게 있어서 가장 큰 재산 목록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도 예물 반지나 목걸이나 귀걸이 같은 것을 금고 같은 데에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아주 위급하거나 긴급한 상황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해야 할 상황이 오면, 팔아서 쓰기도 하지요.
그 10개의 드라크마가 온전히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빠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가 하나 없어도 음식 먹기에 아주 부자연스러운데, 계속 그 하나 때문에 온전한 모양이 깨어지게 되지요. 결혼한 여성에게는 자기의 소중한 신체의 일부라고 생각할 정도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디 들고 나가지 않았다면, 집 안에서 떨어졌으니까 부지런히 찾는 것이지요.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9-10)
잃은 것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은 큰 데,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던 것을 찾으면, 그 소중하게 여긴 만큼 기쁨도 배가 됩니다. 결혼한 여성에게는 그 드라크마가 그런 경우이고, 예수님이나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께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이 그런 기쁨이 된다고 하십니다.
양을 잃었다가 찾는 것보다 아마 드라크마를 찾은 것이 더 큰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드라크마를 찾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있습니다. 그것은 잃어버렸던 아들을 되찾는 것이지요.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1-13)
예수님께서 비유하는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를 의미합니다. 두 아들은 두 그룹을 대변하지요. 첫째 아들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나 바리새인들을 대표하고, 둘째 아들은 세리나 죄인들을 대표합니다. 그런데, 또한 둘째가 아버지에게 패륜적인 언행을 합니다. 살아 계시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이것은 굉장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이 아버지는 그런 행동도 용인하시며, 재산을 나눠서 첫째에게도 주고 둘째에게도 줍니다. 이 재산을 받은 둘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돈으로 바꾸어서 집을 떠나갑니다. 먼 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떠나간 것이지요. 그리고 곧 유흥에 빠집니다. 자신이 피땀을 흘려 번 돈이 아니기에 자기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서 낭비합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술친구나 사기꾼들이 붙으면 그 재산이 금방 거덜납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4-16)
있던 돈이 사라지면, 술친구나 사기꾼들도 사라집니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지요. 거지꼴이 되어서 배고픔 때문에 아주 낮은 임금을 받는 품꾼으로 일하게 됩니다. 심지어 유대인들은 돼지 같은 부정한 동물을 접촉하지 않으려고 하고 먹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는데,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자신의 신분이라든지, 유대인으로서 선민의식도 내려놓고 돼지를 키웁니다. 그리고 그 품삯으로도 허기를 채우지 못하니까 돼지가 먹는 것도 먹으면서 일을 합니다. 참 비참하지요.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7-19)
자신의 비참한 상황 속에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의 품꾼들은 그래도 자신처럼 이렇게 가난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버지께 자신의 잘못을 구하고, 아버지의 품꾼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간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지요.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0-21)
이 집 나간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서 한 말은 단지 자신이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것이고, 아들 자격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말을 듣는지 듣지 않는지 그에 대한 말은 없고, 자기 종들에게 좋은 옷과 신발과 반지를 가져오게 합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2-24)
아버지가 아들에게 입혀주는 새 옷은 그 아들의 신분을 되살리는 것입니다. 반지와 신을 신겨서 자기 아들로 신분에 맞게 대우를 받게 합니다. 그리고 잔치를 베풀지요. 송아지를 잡아서 요리하게 하고 종들 뿐만 아니라 이웃과 형제들을 불러서 함께 먹고 마시며 즐깁니다. 음악하는 사람들도 불러서 잔치에 맞게 흥을 북돋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만, 한 사람은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분노하고 싫어하고 잔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 (25-28a)
둘째가 살아 돌아와서 너무 기쁜 나머지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지만, 맏아들은 그 잔치를 거부합니다. 이 비유는 제사장들이나 레위인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죄인들을 맞아주시고 잔치하며 기뻐하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미워하고 예수님께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절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반면,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들은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모시고 섬기려는 제자들과 이방인들과 세리들, 죄인들은 그 잔치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28b-32)
이 마지막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첫째 아들도 초청하고 있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자리, 잃어버렸던 사랑과 긍휼과 화목을 되찾는 자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생명을 되찾은 아버지의 기쁨에 함께 나아와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죄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반면에 아버지 품에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않고, 늘 불만과 불평 속에서 마음으로 아버지 곁을 떠난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모시고, 연대와 협력 속에 용서와 화해와 일치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지금도 찾고 찾으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린다면,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아버지께 돌아오도록 자비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전달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 땅에 세우신 하나님의 연회자리와 같은 곳입니다. 항상 죄인들이 이곳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죄인의 길에서 돌아서고, 참 자녀다운 신분으로 회복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의 자비와 긍휼과 사랑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사랑하고 욕심과 죄악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지 돌아보게 하시고, 잃어버린 주님의 사랑과 믿음과 소망을 되찾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아버지’를 잃어버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도 잃지 않기를 원합니다. 또한 우리의 ‘형제’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옵소서! 혹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우리 자신’이 아닙니까?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세상을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도 주님처럼, 잃어버린 자를 찾아 하나님 나라 천국 잔치에 함께 데려올 수 있는, 인도할 수 있는 주님의 일꾼되게 하옵소서! 사랑이 풍성하시고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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