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 백부장 고넬리우스 또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 1660년경>
저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습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유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노력하면, 자기가 원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고, 부자도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렇지요? 그러나 시대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불과 120여 년 전만 해도 이 한반도는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양반, 상놈이 있고, 왕이 있고 천민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원해서 천민이 되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만, 그 당시의 대다수 사람들은 양반과 왕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종’은 자유가 없습니다. ‘주인’이 시키는대로 일해야 하고, 주인을 섬겨야 했습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종’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얼마나 부담스럽고, 듣기 싫겠습니까? 예수님 시대의 종은 어쩌면 우리 선조들의 시대보다 더 힘들고 고달픈 신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7)
‘종’이 주인을 위해서 주인의 밭을 갈고 양을 치다가 시간이 다 되어서 주인의 집에 돌아왔습니다. 마침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주인이 ‘와서 식사해라.’ 하는 주인이 있느냐? 하고 예수님이 묻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주인의 태도는 당연히 그렇게 말하는 주인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8)
오히려 예수님 시대의 주인들은 ‘빨리 와서 내(주인) 먹을 것을 준비해 놓으라.’ 한다는 것이지요. 그 뒤에 ‘종’이 먹든지 마시든지 그것은 알아서 하고.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의 일반적인 사고, 생각을 그대로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마음과 생각으로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9-10)
예수님 당시의 주인들이 ‘종’에 대해서 전혀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고, 종들도 주인이 그렇게 느꼈다고 해서 섭섭해 하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할 일을 한 것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종’의 자세와 태도를 배우라고 하십니다. 정말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은 이 ‘종’의 자세에 대해서 배우라고 하셨을까요?
물론, 예수님과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기 때문에 마땅히 우리들은 ‘주님’으로 부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우리의 ‘주’로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섬기거나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칭찬을 한다거나 고마워 한다거나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의미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 종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교훈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형제가 잘못해서 경고를 했는데, 받아들이면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제자들이 반복적으로 죄를 짓고,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느냐는 듯이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7번까지만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계속 그렇게 하더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들에게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 하면서 간구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믿음의 교훈에 대해서 말씀하시듯이 겨자씨 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들어서 옮기우라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용서’는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순종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즉,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한다면, 이 문제는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냥 형제를 용서하고 넘어갈 것이지, 순종하지 않고 보복이나 복수를 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믿음’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이란 실상은 ‘순종’의 문제입니다. 겨자씨에는 창조주로부터 받은 고유한 그 습성대로 자랍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당연히 해야 할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산을 들어 옮겨라.’ 하면 그냥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중국에 가면 ‘만리장성’이 있습니다. 중국 황제가 그 길고 크고 견고한 성을 수 백, 수 천 킬로 미터로 쌓으라고 하면, 쌓기 싫다고 그만둡니까? 백성들은 그 명령에 그냥 따른 것입니다. 그 만리장성도 쌓는데, 까짓 거 산 하나 옮기는 것이 어렵습니까? 수백, 수천 만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참 주인으로 고백하고 따른다면, 산 옮기라면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성도들이 실제로 그렇게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는 지에 관해 묻고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에 보면, 사람들은 ‘죄’의 종으로 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탐욕과 욕심이 우리를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의 주인은 아마도 ‘돈’일 것입니다. 돈 때문에 일하고 돈 때문에 불법을 저지르고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요. 그러나 꼭 돈만일까요?
어떤 사람은 육신의 쾌락이 자기의 주인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게임’과 오락에 빠져 있고 어떤 이는 ‘성’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통칭하면 그것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인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주인인 되어 버리거나 물질이나 쾌락이 주인이 된 상태입니다.
이 ‘종’의 상태를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참 자유는 우리의 창조의 섭리와 목적대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을 때,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인으로 모시고 섬길 때.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나도 당연한 말씀이고, 인간이라면 그렇게 마땅히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편에서 보면, 우리가 ‘무익한 종’인 것이지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11-13)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계십니다. 올라가셔서 이제 죄인들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 정확히 어느 성읍을 지나가시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마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 마을에는 나병환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그곳에 10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자신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외칩니다. 율법에도 나병환자들이 일반 사람들 곁에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멀리서 ‘부정하다 부정하다’ 외치면서, 일반 사람들이 자신들을 피해 가라고 외쳐야 했습니다.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4-1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말씀으로 그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제사장들에게 가서 자신들의 몸을 보여 진찰하고, 가족과 친지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몸이 나병에서 나음을 깨닫고 한 사람이 예수님께 돌아와 그 발 아래 엎드려 예수님께 감사를 표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17-19)
주님의 은혜로 천벌로 여겨진 나병을 치유받았는데, 오직 한 사람 사마리아인만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이 모습이 대체적으로 신약 시대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반응입니다. 복음이 온 이방 땅에 퍼지고 예수님을 높일 때, 정작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율법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못 알아보고, 감사와 영광을 돌리기는 커녕,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아 죽이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는 이 말씀이 지금도 메아리 치는 것 같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자꾸 주님을 잊어버리면 이렇게 마음이 굳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항상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은 그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래 전에 받은 은혜라고 지금은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도 아무런 감흥이 없고, 감사하지도 않고 습관적인 예배를 드리고 냉랭한 마음이라면 우리도 은혜를 잊어버린 이스라엘 나병 환자들과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언제나, 주님 앞에 예배로 나와 주님을 찾으시고 주님을 만나며,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경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는 불순종하는 어리석은 종이자 무익한 종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내 생각과 판단과 기분을 내려놓고, 주님 말씀하시면 즉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마음 속으로만, 생각으로만 주님의 말씀을 동의하고 행동으로는 따르지 않았음을 회개합니다. 우리가 할 일을 하였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주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참 용서를 실천하고 주님의 뜻을 잘 알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주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총을 늘 감사하며, 마땅히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항상 감격하여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우리의 예배생활이 되게 하옵소서! 억지로나 습관이 아닌 항상 주님과 영적으로 교통하는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게 도와주옵소서!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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