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달린 예수, 1632, 벨라스케스 프라도미술관>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6)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의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는데, 예수님이 밤새도록 심문을 받고 고초를 당해서 십자가를 짊어질 힘이 없습니다. 그때 로마 군인들이 한 사람을 지목해서 대신 골고다 언덕까지 지게 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당시 로마법에는 군인이 피정복민에게 정해진 거리만큼 짐을 나르게 할 수 있는 '앙가리아(Angaria)'라는 강제 징발 규정이 있었는데, 시몬은 영문도 모른 채 로마 군병에게 붙들려 예수님의 십자가(가로대 Patibulum)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여기 성경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훗날 기독교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두 아들이 마가복음에 알렉산더와 루포로 소개되고, 로마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보고 일어난 일들을 증언했기 때문에 누가복음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7)
하룻밤 사이에 반역죄로 체포되어 십자가 형으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소식을 들은 많은 백성들은 예수님을 따라 사형 집행장으로 갑니다. 슬피 울고, 가슴을 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베푸신 은혜를 잊지 못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이들을 위해 예언의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28-30)
예수님을 죽였던 지도자들과 그를 따르던 백성에게 큰 심판일 내려질 것입니다. 주후 70년 경에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게 되는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그 때를 내다보신 것 같은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몰살 당하고 자녀들은 굶주림에 잡아 먹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오히려 그 때는 사람들이 자식이 없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지요. 로마 군대에 의해 진멸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산이 무너지고 지진으로 땅이 꺼져서 우리를 삼키는 것이 더 행복한(?) 죽음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런 일이 당장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약 40년이 지나서 일어나기 때문에 예루살렘 여성들에게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왜 40년일까요? 하나님도 독생자의 죽음을 통해서 가장 고통을 받았다면, 악인들, 죄인들도 그만큼 고통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사건을 보면, 하나님도 보복하시는 데에는 아주 정확(?)합니다.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31)
대체로 2가지로 해석됩니다. 예수님처럼 로마법이나 율법에도 죄가 없는 사람을 이렇게 죄를 덮어 씌어 가장 극악의 사형집행을 한다면, 죄 많은 사람들은 어떤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에스겔 20장 47절 말씀의 인용으로 생명력이 넘치는 강한 사람(부자나 젊은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 등)도 이렇게 당한다면, 마른 나무 같은 가난한 사람, 노약자 여성 등 나머지 사람들은 어떤 심판을 받겠는가 하는 의미입니다. 어째든 예수님이 당한 만큼, 더 처절하게 파괴되고 멸망될 것이 예루살렘입니다.
“또 다른 두 행악자도 사형을 받게 되어 예수와 함께 끌려 가니라.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3-34)
누가복음 22장 37절에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때, 불법자들의 동류로 여김을 받을 것이란 말씀을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이뤄졌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에 ‘범죄자 중에 하나로 헤아림을 받는다’는 구약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십자가에 달리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4-37)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는 로마인들과 유다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께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저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용서하셨을지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실 수가 없지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오히려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을 노엽게 하면, 예수님의 용서를 하나님께서 받아 주시겠습니까?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8)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는 죄패가 나무판으로 붙어 있는데, ‘유대인의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훗날,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수님은 이 사건에 대해서 영원히 증거를 남기셨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님 좌우의 달린 죄인들의 상반된 태도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39-41)
예수님은 홀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닙니다. 왼쪽과 오른쪽에 살인자들이 함께 달렸는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무슨 책망이나 비난을 한 것도 아닌데, 괜히 시비를 겁니다. 인생 끝날에도 이렇게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비방하다가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다른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를 꾸짖으며, 예수님을 두둔합니다.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상대방에게 우리는 우리의 죄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하며, 예수님은 죄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뒤늦게나마, 사리 판단을 바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좀 일찍 깨달았으면 죄를 짓기보다 좋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보람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요? 십자가 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세 부류를 봅니다. 죄가 없는 사람(예수님), 죄인인데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 죄인이지만 회개하고 예수님을 바라본 사람. 그래서 모든 인생도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예수님을 기준으로 2편으로 나뉩니다. 죄인인데, 회개하지 않은 사람, 죄인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자신을 의탁한 사람. 이것이 성경의 클라이막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처럼 완전히 죄가 없을 수는 없지만, 예수님처럼 온전하게 되어 사는 거룩한 성도의 부류가 있겠지요. 한편으론 죄인인데, 끝까지 자기 고집을 부리다가 죽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선한 일은 한 것 없지만,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붙드는 사람. 가장 좋은 편은 일찍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거룩하고 온전하게 살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잘한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못해도 예수님을 마지막에는 바라보고, 자기 생명을 의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42-43)
성소의 휘장이 찢어짐
“때가 제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우리 시각으로 오후 12시부터 3시까지 갑자기 하늘에 어둠이 임합니다. 구름이 가득했는지, 태양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빛을 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각에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집니다. 이 휘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데, 인간이 감히 들어갈 수 없는 곳이며, 대제사장이 1년에 단 한 차례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자기 몸을 성별하게 하고 들어가 기도를 올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도록 벽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신학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47-49)
로마 백부장이 수많은 사람들을 사형시켰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곁에서 보고, 예수님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선동되었던 무리도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큰 후회를 하며 가슴을 친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여서 가슴을 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장례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50-54)
유대의 장례식 관습에는 애곡하고 무덤으로 이동하여 매장하기 전에 시신에 ‘세마포’ 천으로 감싸서 향유를 붓고 여러 가지 절차가 있는데, 예수님은 죄인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생략되었고, 다음 날이 안식일이라 돌무덤에 수의만 입혀서 넣어 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를 비롯한 섬기던 여성들은 안식일이 지나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으려고 계획합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55-5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바라봅니다. 주님의 은혜 잊지 않게 하시고, 다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어리석은 죄인으로 살아가지 않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거룩한 삶으로 영광돌리게 하옵소서!
죄악된 세상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생명을 살리신 아버지의 뜻을 깨달아 우리도 생명을 살리며, 죄와 사망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는 사람 낚는 어부로 살게 하옵소서! 주님의 거룩하고 숭고한 최후를 깊이 묵상하며, 우리도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우리를 대속하신 존귀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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