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요기도회

[마태복음] 5장 예수님의 말씀(1)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767회 작성일 2024-06-27 06:50:58

본문

 

 

 

《산상 설교》, 칼 하인리히 블로흐 (1879년 作), 《산상 설교》, 칼 하인리히 블로흐 (1879년 作), 덴마크국립역사박물관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2)

 

 예수님은 산에서 제자들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이른 바, 산상수훈(山上垂訓)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냥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성도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으로 되어야 할 모습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3)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되어 있지만, 여기 마태는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고 정확하게 말씀합니다. 만약에 그냥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소유한다면, 이 세상의 부자는 천국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물질이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진리에 갈급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행복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질이 많든 적든 간에 그 조건이 천국에 가는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어서, ‘나’란 존재를 이 땅에 보내시고 살게하신 의미와 이유를 전혀 모르고 산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도 알아야 하고,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이 누구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 진리를 찾을 수 있도록 선포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배우고, 우리의 인류의 시작과 앞으로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인인 것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이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진리를 찾으며, 예수님을 발견하고, 우리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깨닫게 될 때, 비로소 사람이 무엇인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진리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생각하고 사유하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성찰하면서, 혼자는 도무지 알 길이 없기 때문에 ‘내’가 누구인지 알려 줄 절대자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우리는 우리 존재와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4)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을 애통(哀痛)이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부모님을 잃거나, 친구를 떠나보낼 때 슬퍼하며 웁니다. 그럼 그렇게 우는 사람들이 다 복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진리를 찾다가 절벽에 부딪칠 때, 정의를 위해서 일하다가 좌절을 만났을 때를 의미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렇게 산에서 말씀하시지만, 조금 있으면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과 고통과 아픔이 됩니다. 

 

 예수님이 많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고 따랐는데, 이 세상이라는 벽에 막힌 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의 눈에는. 그렇지만, 영의 세계에서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모든 죄와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한 대속(代贖)의 과정입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신앙 때문에 고초를 겪게 됩니다. 재산을 잃고, 사회적 신분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에서 이단과 사이비처럼 오해받고, 사회적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사도들)도 죽음 너머의 세계를 보고서, 죽음 앞에 초연하고 담대해 집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을 새롭게 얻고, 새가족 구성원이 되며, 다른 사람들이 빼앗거나 침범할 수 없는 영원한 나라를 소유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로를 받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갑절이나 여러 배를 받고 영원한 생명까지 얻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들은 잠시 소유하였지만, 이내 곧 다 내려놓고 떠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물질들은 그리고 이 땅에서 인연을 맺은 관계들은 이 땅에서 끝나지만, 예수 안에서 성도 안에서 맺는 가족의 관계는 영원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땅을 받고, 새로운 하늘도 얻습니다. 하늘나라이지요. 여기서 아무리 설명해도, 가 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고 이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5)

 

 우리 말에 ‘온유하다’는 의미와 그리스어 원어 사이에는 의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는 유순하고 온순하면 온유하다고 할 수 있으나, 원어적 의미로는 ‘길들여 지지 않은 말’이 노련한 조련사에 의해서 ‘길이 들여졌을 때의 상태’를 말합니다. 말을 채찍하여 최선을 다해 달리다가도 고삐를 잡아 당기면, 달리던 말이 금방 서지 않습니까? 마치 그런 식으로 길들여 지지 않은 말과 같은 우리들이 예수님께 길들여 져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절대적으로 순종하고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 정도가 되어야 ‘온유’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새 땅을 주십니다. 하늘 나라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6)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과 유다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절입니다. 항상 세금과 수탈에 의해서 일반 사람들은 항상 배고프고 목이 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배부름은 ‘자유’와 ‘해방’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사람은 ‘죄’와 ‘사망’과 ‘고통’ 속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위협하면, 모두다 노예가 되어서 따르다가 악행도 하게 되지요. 권세자들은 무력과 힘으로 억누르고 통치하기도 합니다. 우리 사람이 원래 평등하게 존귀하게 지어졌는데, 어떻게 해서 이렇게 계급과 신분이 나눠졌을까요? ‘욕심’과 ‘정욕’의 노예가 된 자들이 다른 이들의 권리와 소유를 빼앗고 사람 위에 군림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좋든싫든 그 세계 질서에 순응하고 따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과 죽음이 닥치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세계가 아마도 ‘북한’이 아닌가 합니다. 많은 이들이 ‘진리’를 알지 못하고 세뇌되어서 김정은 일가와 그 빨치산 공산 세력에게 모든 것을 갖다 바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 조금씩 진실을 보게 된 사람들이 저항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고, 지금도 어느 수용소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고된 중노동에 시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참 ‘의(義)’는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義)’가 되십니다. 그 어떤 사람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시며, 온전하시고 완전하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마땅히 우리가 만왕의 왕으로 모셔야 하지만, 2천 년 전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스스로 낮아지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의 의(義)가 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의를 덧입기 위해 우리는 그 의를 먹는 사람처럼, 간절하게 찾고 다른 것으로 그 의를 대신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많은 종교와 철학과 사상이 우리 자신 스스로를 구원할 것처럼 말하지만, 결코 이룰 수 없으며,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의는 구하지 않는 굶주림과 같은 배고픔이 필요한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7)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쓰는 ‘자비’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범죄하여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아들을 대신 죽게 보내셨습니다. 성경에는 이것을 마치 아버지가 자기 자녀를 불쌍히 여기심 같이 긍휼히 여기셨다고 표현합니다. 예수님도 인류를 대속하시는데,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성자 하나님 성품 자체가 ‘긍휼’하시기 때문에 예수님도 다른 이유가 없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생명을 살리시려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도 이런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과 교제함으로 주님을 배우고 닮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8) 

 

 우리들이 시력이 좋아서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공기처럼. 그러나 공기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느끼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심이나 욕심이나 여러 가지 색안경을 끼면,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느낄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머리로 추상적인 것을 그리듯이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지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며칠 전에 앞집에 이사오신 분이 수도계량기가 계속 돌아간다고 제게 말을 했습니다. ‘와서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느껴지기에는 우리가 물을 쓰고 있으니까 계량기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계량기가 우리집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말을 통해서 상대방의 생각이 보여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9)

 

 화평하게 하는 것은 서로 반목하고 있는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 사이에서 잘 중재를 해서 서로 나쁜 감정이 없도록 하고, 서로 잘 지내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 화평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제멋대로 살고 그 마지막은 심판을 받고 지옥에 던져지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막은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은 하나님을 오해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을 바르게 소개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이 풍성하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계속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것이 화평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그 화평하게 하는 일에 동참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에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하나님과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 여러 나라들 가운데 여러가지 이해관계 때문에 전쟁도 하지만, 나라와 나라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도 화평케 하는 일을 해야 하겠지요.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한 개인과 하나님, 한 사람씩 하나님과 막혀 있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온 한 사람이 모여서 교회가 되고 교회공동체가 보다 큰 화평을 이루는데 기여를 할 수 있습니다. 

 

(예화)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먼저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 전쟁을 벌인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본격적으로 미드웨이 해전이라든지 여러 곳에서 전쟁을 했는데, 처음으로 발명된 원자탄을 일본 본토에 떨어뜨려가지고 완전히 항복을 받아 냈습니다. 

그런데, 원래 전쟁을 치르고 나면, 패전국이 승전국에게 모든 전쟁비용과 피해에 대해서 보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일본이 미국에게 모든 전쟁 비용과 피해 배상을 해야 하는데, 미국의 원수 맥아더가 일본에 가서 통치를 해 보니까, 일본인들의 적개심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서는 양국이 또 멀지 않은 미래에 다시 전쟁을 할 수도 있겠다고 해서 미국에서 일본의 재건을 하게 됩니다. 미국이 피해보상을 일본에게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누가 했겠습니까? 미국이란 나라가 그 때만 해도 기독교 정신이 있어서, 우리가 원자탄을 써서 너무 많은 시민들을 죽였고 그 땅을 파괴했으니, 우리가 보상해 줘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면서, 양심있는 지도자들이 양국 관계가 다시 회복되도록 노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와 미국 관계보다 일본이 미국과 관계가 더 좋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전쟁을 벌인 적이 없지 않습니까? 우리 편에서 공산화 되는 일을 막는 일에 아메리카 나라가 함께 해서 우리가 한자로 미국(美國,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까지 하는데, 우리보다 관계는 일본이 더 좋습니다. 우리와 일본이 다툼이 생기면, 미국은 항상 우리 편을 들기 보다 일본의 편을 들었습니다. 이런 이유가 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관계를 잘 회복하기 위해서 일했던 맥아더와 같은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10)

 

  옳은 일을 하다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종종 봅니다. 특히 권력자들이 불의를 행하면, 일반 국민들이나 백성들은 이유도 모른 채, 고통을 받습니다. 그래서 불의에 항거하여서 오늘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써 정통성이 있는데, 솔직히 북한이라는 곳은 나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독재국가고 전체주의 국가인데, 말로는 ‘인민민주주의’라고 하면서 민주주의 한다고 떠듭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믿고, 그것이 지상 낙원인 냥 추종하는데, 왜 우리 나라에 와서 선전하고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한이 좋으면 그냥 자기들이 올라가서 살면 되는데, 여기 대한민국까지 북한사회로 만들려고 합니다. 역사도 모르고, 경험도 없고 그런 자들이 정치를 하면, 잘못하다가는 이 나라가 북한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사회가 사고하는 수준이 그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는 우리 인간 사회 전체 중에는 ‘의’라고 내세울만한 것이 단 한가지도 없습니다. 그래서 ‘의’는 하늘에서 주어지는데, 그 의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받는 ‘의’입니다. 이상하게 세상은 이 의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고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다른 종교는 다 좋다고 하면서, 예수님만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 마귀에게 속하였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야 그 속에 있다가 자유를 얻었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 주는 물질과 쾌락과 향락, 그리고 죽음의 공포 때문에 사탄에게 속아서 사탄이 하라는 대로 따릅니다. 귀신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성도를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아도 ‘그러려니…’ 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야 오죽이나 하겠습니까?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미운지 이유가 없습니다. 모르기도 하고요.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되는 것이 배가 아픈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고 자기들은 지옥에 가는 것이 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잘 모르지요. 마귀가 그런 감정과 기분을 느끼는데, 마귀에게 충동을 당하니까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11-12)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그렇게 어려움을 당하거나 박해를 받을 때, 오히려 기뻐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확실히 하나님의 백성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던 옛 성도들, 옛 선지자, 예언자들도 박해를 받았지만, 지금 하나님 나라에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는데, 그와 같은 입장이 된 것입니다. 

 

 5장 1절에서 12절까지를 특별히 8복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다고 하셨기에 그렇습니다. 다양하게 말했지만, 결국은 그런 박해와 애통과 고통을 지나야 참 하나님의 백성, 성도로서 천국을 소유할 것입니다. 확실한 증거가 이런 것들이지요.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성도들은 이렇게 살라는 의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배부르게 살지 않았는가 생각이 됩니다. 너무 웃고 즐겁게 지낸 것이 아닌가 돌아봅니다. 온유하지도 못하고 제멋대로 살았고, 화평하게 하기는 커녕 오히려 당을 짓고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지 않았는가 반성도 해 봅니다. 우리에게 정말 긍휼이 있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고 있는지. 오히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면, 참 회개할 것이 많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3)

 

 예수님은 제자들과 따르는 무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다만, 맛을 잃은 소금인지, 맛이 있는 소금인지 그 차이만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맛을 내는 소금이 되면, 아주 요긴하게 쓰임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사람들에게 밟힐 것입니다. 우리가 맛을 잃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8가지를 깊이 생각하고 다시 이 말씀대로 갈급한 심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4-15)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공인입니다. 연예인이 공인이 아니고, 어떤 정치인들만 공인이 아니라 진짜 공인은 우리들, 성도들입니다. 누가 지켜 보시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빛을 드러내야 하는데, 여기서 빛은 우리가 행하는 행실입니다. 특별히 ‘착한 행실’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 일으키고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보이도록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빛을 받아서 그것을 잘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6)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진리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때로는 눈물이 나고, 갈급하고 고통스러운 것일지라도 기쁨으로 따르게 하옵소서! 사탄이 우리를 미워하여 세상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미움을 받고, 고난이 닥칠 때, 옛 선지자들처럼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극복할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의 마음이 진실되어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정직하고 깨끗하여서 거짓되고 추한 것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세상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받을 줄 알고 하나님과 이웃 사이에서 사랑으로 저들을 돌보며 섬기며, 주님께로 인도하게 하옵소서! 

 

 모든 말과 행실에 예수님을 닮아 거룩하기를 원합니다. 소금이요, 빛으로 우리를 부르셨사오니, 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게 하시고, 예수님의 진리의 빛을 비추어 우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아올 수 있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시키사, 변하여 먼저 새사람되게 하시고, 주님의 충성스러운 제자로 변하게 도와 주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로그인

로그인 회원가입

방문자 집계

  • 오늘 125
  • 어제 974
  • 최대 1,086
  • 전체 52,365

Copyright © metabible.or.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