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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낮설교

[사무엘상] 31장 사울 왕과 아들들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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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728회 작성일 2024-07-21 17: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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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이블 웨이>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있지요. 반대로 끝이 안 좋으면, 이제까지 모든 일도 별로 안 좋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사울 왕의 말로(末路)가 안 좋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참 겸손한 모습을 보였다가 몇 번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면서, 사람들의 인기가 높아지자, 하나님도 안중에 없는 교만한 사람으로 변질됩니다. 

 

 처음도 좋고, 점점 더 좋아져서 마침내는 가장 좋게 변화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런 경우는 참 드문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그렇고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더니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고, 나중에는 아주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참 보기 좋고 귀감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체로 그랬지요. 베드로만 보아도 그저 어부로서 잔뼈가 굵다가 예수님을 따라 나서면서, 인생이 바뀌었는데, 초창기만 해도 실수를 많이 하고 예수님께 책망도 듣고 합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까지 했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훗날에는 초대교회의 가장 인정을 받는 사도까지 되고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순교까지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처음부터 사무엘처럼 인생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훌륭한 분도 있지만, 대체로 좀 부족하고 연약했을지라도 종국에는 하나님께도 인정을 받고,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생이 되면, 참 잘 살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좋았다가 끝이 안 좋은 사람들을 몇 몇 보게 되는데, ‘사울’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지요. 아쉽게도 그의 아들 요나단은 참 인품도 훌륭하고 왕자로서, 이스라엘의 장수로서 열심히 일을 했지만, 끝내 아버지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는 안타까운 일도 보게 됩니다. 

 

 오늘로써 사무엘상권이 끝납니다. 사무엘과 사울 왕이 죽는 것이 한 책의 끝입니다. 이제 사무엘하 권은 다윗 시대를 담았지요. 그래서 한 인물이 죽으면 한 시대가 저무는 것입니다. 사실, 사울의 임기는 사무엘이 죽었을 때, 끝났어야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위에서 폐하셨다고 할 때, 사울이 스스로 겸비할 수 있었다면 스스로 물러났겠지요. 그랬다면, 자기의 목숨과 아들들의 목숨은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왕 위를 다윗에게 넘기고, 조용히 고향으로 내려가서 자기 가족이나 돌봤다면, 사울의 말년도 평안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끝까지 권력을 탐하고 억지로 유지하려고 하니까, 많은 사람들을 죄악에 빠지게 하고, 충성스러운 군사들을 사지로 내몰아서 죽게 만듭니다. 사울의 밑의 장수들이 그대로 다윗에게로 갔다면, 아마도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이나 지도자는 더욱 말씀에 유념해야 합니다. 자기 한 사람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본인도 망하고 가문도 망하고, 나라와 민족에게까지 큰 재앙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1-2)

 블레셋의 왕들과 전쟁을 하는 이스라엘 군사들은 추풍낙엽으로 패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전쟁에서 패할 수가 있을까요? 전쟁의 양상에 대해서 아주 짧게 언급합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의 군사들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그냥 패주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인간적으로 보면, 다윗을 잡겠다고 국방과 안보에 대해서 너무 대비가 안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30장에서도 나왔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군대와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영적인 전쟁에서 우리가 무엇을 대비한다고 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전쟁의 승리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이기는 것이고, 함께 하지 않으시면 지는 것입니다. 사울은 지금 많은 군사들과 함께 싸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했지만, 전혀 힘 한 번 못 써보고 그냥 얻어 맞기만 합니다. 

 

 1,2절은 사울의 아들들이 블레셋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금방 따라잡혀 죽임을 당했다는 내용이고, 3절부터는 사울의 죽음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3)

 

 사울이 화살에 맞아서 중상을 입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앞서서 군사들을 지휘하지 못하고 후퇴를 하는데, 길보아 산쪽으로 올라갑니다. 다리에 힘도 빠집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곧 정신을 잃을 듯합니다. 블레셋 군사들에게 잡혀 이런 저런 모욕을 당하다가 죽느니, 더 고통을 당하기 전에 자기 부하에게 죽여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4-5)

 

 그런데, 부하가 자기 주군을 어떻게 죽일 수 있겠습니까?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거의 블레셋 병사들에게 사로잡힐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칼을 땅에 고정시킨 다음에 자기 스스로 엎어져서 찔러 자살을 합니다. 옆에서 보던 부하도 똑같이 자살을 합니다. 만약 도망갈 길이 있었다면 자살을 했을까요? 어차피 자기 주군을 옆에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도망가서 블레셋의 포위를 뚫고 빠져 나간다고 해도 군법으로 살 희망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입니다.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6) 

 

 사울도 그렇지만, 사울을 따랐던 3천 명의 군사들이 그 날 다 죽었습니다. 쓸데없이 다윗을 죽이겠다고 허송세월을 보내니, 정작 진짜 적을 대비하지 못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우리끼리 분열하고 싸우면, 정작 사탄이 영적 전쟁을 걸어오면, 힘 한 번 못 쓰고 패합니다. 패하고 범죄하여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항상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 간에는 빨리 용서하고 넘어가고,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고 서로 기도하고 화목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나라도 너무 정치적으로 분열이 되어 있어서 참 안타깝습니다. 지금 세계는 경제 전쟁, 무기 경쟁하면서, 국가 안보에 잘못하면 공백이 생기기 쉽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남녀 갈등과 세대 갈등과 빈부 갈등과 지역 갈등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성도들이 앞장서서 갈등을 조장하고 부추키면 안 됩니다. 이럴 때 일수록 자기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말은 줄이고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떠든다고 해서 무엇이 되는 일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떠든다고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 투쟁하면 됩니까? 다윗은 아무리 미움을 받고 왕이 죽이려고 달려 들어도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자기 편과는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도망다니기에 바빴습니다. 

 

 때로는 우리 성도들은 도망치기도 해야 합니다. 자꾸 부딪쳐서 싸움을 조장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잘못된 것을 지적하기는 하셨어도 무슨 군대를 일으켜서 보복하고 심판하겠다고 안 하시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참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이 자꾸 사람하고 싸우려고 합니다. 그 사람 뒤에 있는 악한 영은 보질 못해요. 영적인 것은 육적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사람이 악한 것은 그 속에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탄이 단단히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아무리 교육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 주신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아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는 사탄에게 매여 있기 때문에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사탄에게 매인 것을 풀 수 없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악령에게 사로잡히니까, 자기 사위를 그렇게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정말 파렴치한 인간이 됩니다. 어떤 이데올로기나 자신의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광기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문제입니다. 사람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수백 만, 수천 만의 사람을 죽여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런 살인과 패악을 저지를 수 있는 이유가 악한 영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7)

 

 길보아 산 일대의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성읍들과 땅들을 블레셋에 빼앗겼습니다. 전쟁의 끝은 결국에는 영토와 재산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많은 난민들이 발생했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이제 시신을 수습하면서, 전리품을 챙기지요. 그렇게 하다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신들을 발견합니다.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의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의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땅 사방에 보내” (8-9)

 

 사울의 목을 베었으니까 공식적으로 블레셋이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선포합니다. 이 사실을 블레셋 땅에도 공포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전하는 것이지요. 참 특이한 것은 고대에는 신들의 전쟁이라서, 승전보(勝戰譜)를 자기들의 신당에 먼저 알립니다. 

 

 “그의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10)

 

 그리고 사울 왕의 갑옷을 아스다롯 신전에 가져갑니다. 전에 다윗이 골리앗의 머리를 베었을 때, 그의 칼은 어디에 두었지요? 놉 땅에 여호와의 신전에 두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자기들의 신에게 영광을 돌리고, 축하하지요. 이런 꼴을 당하지 않으려면, 전쟁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영적 전쟁에서 패하면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호를 위해서라도 꼭 승리해야 하겠습니다. 

 

 사울 왕과 아들들의 시체는 벧산 성벽에 걸어 두었습니다.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것이고, 날 짐승(독수리 같은)이나 하이에나 같은 짐승의 밥이 되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포와 비참함을 줍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들이 일어나 밤새도록 달려가서 사울의 시체와 그의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내려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의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하고 칠 일 동안 금식하였더라.”  (11-13)

 

 사울이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지요. 예전에 사울이 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일부는 어떻게 사울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겠느냐고 하면서, 사울을 무시하고 깔보던 차에 암몬 백성들에게 공격을 당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자기들을 구해 달라고 각 지파별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사울이 그 소식을 듣고, 의분이 나서 소를 쪼개서 각 지파에게 보내면서, 자신과 사무엘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전쟁에 참여해서 길르앗 야베스를 구하자고 합니다. 그렇게 사울이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을 구원한 일이 있었는데, 거의 시간이 40년이 흘렀습니다. 그 때 도움을 받았던 이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은혜를 잊지 않고 사울의 시신이라도 거두어서 장사를 지낼려고 블레셋이 점령한 벧산에 군사들(특공대겠지요)을 준비해서 사울의 시체를 달린 곳에서 잘 수습해서 야베스 땅에 장사를 지내줍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어려운 중에 있기 때문에 국장(國葬)으로 치르지는 못하고 길르앗 야베스에서 장례를 주관한 것이지요. 사울이 잘못한 것도 있고,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지만, 그래도 은혜를 입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울을 욕하고 미워해도,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자기 왕을 아끼고 예를 갖추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다른 것은 못해도 은혜 한 가지는 마음에 새기고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윗이 훗날 왕이 되어서 야베스 주민들이 한 일을 듣고 보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칭찬해 주고 보상을 합니다. 사람이 은혜를 알고, 은혜를 새기고, 은혜에 대해서 보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최소한 인간이라면, 이런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은혜를 모르고 자기가 잘난 줄 알고 까불고 교만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인간성이 무엇인지 깊이 성찰하시기를 바랍니다. 최소한 부모 공경은 할 줄 알아야 하고, 그런 사람이 사회에서 스승이나 선배의 고마움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감사가 점점 커지면, 우리를 이 땅에 존재케 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구원자에게 은혜를 입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사람, 존재만이 영원히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울의 비참한 결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본분을 다 하지 못했기에, 사울은 버림을 당했고, 사탄에게 영혼까지 빼앗겼습니다. 자신의 분수를 알고, 일찍 그 권좌에서 내려왔더라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전쟁에서 패배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권력에 눈이 멀고, 은혜를 원수로 갚다가 그 모든 죄악을 자신이 당하고 자기 아들들이 당하는 끔찍한 사건을 보게 됩니다. 

 

 우리도 이런 결말을 당하지 않도록 늘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게 하옵소서! 반면, 악한 사울 왕일지라도 은혜를 입었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은 그 은혜에 보답을 하고자 했습니다. 최소한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늘 기억하고 감사하면서 은혜에 보답하려는 이들처럼 우리도 살게 하옵소서! 부모와 가족들, 친지들과 이웃에게도 감사함을 표현하고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도록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가장 큰 은혜를 주신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께 늘 감사의 예배와 찬송을 올려 드리며, 주님의 뜻에 어긋남이 없이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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