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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8장 예수님의 이적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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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82회 작성일 2024-07-25 03: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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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병 환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장 마리 멜키오르 도즈 >

 

 마태는 관세를 받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항목에 대해서 묶는 것을 잘 합니다. 그래서 마태가 전한 복음에도 보면, 5장에서 7장까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모음집처럼 되어 있습니다. 8장부터 9장까지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사역과 이적을 베푸시는 장면이 모아져 있습니다. 계속 읽어보면, 후반부에는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또 모아져 있고, 하나님 나라 천국에 대해서도 여러 비유들이 모아져 있는 것을 봅니다. 

 

 여기 8장부터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을 베푸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유대인들이 가장 끔찍하게 여겼던 ‘나병’ 우리로 치면 한센씨 병자를 고치시는 부분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1-3)

 

 산에서 가르치심을 마치고 내려오시는데, 산 아래에는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나병’은 레위기를 참조하면, 사람들과 접촉하면 안 되는 병이었고, 거처도 따로 둘 정도로 나쁜 병입니다. 그냥 질병으로 치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아서 이런 병에 걸렸다고 것이 당시 사회적 통념입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가 겁도 없이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다른 랍비들 같으면, 피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시켜서 돌로 치게 하여서 죽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 나병환자는 목숨을 걸고 예수님께 나온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대한 소문이 병자를 고치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인자하신 분으로 들은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병환자가 나아오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나 다른 무리들은 그를 피하여도 예수님은 이 사람을 맞이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절했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아무에게나 절하지 않습니다. 왕이나 주권자에게 합니다. 즉,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을 보통의 선지자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죄’까지도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 이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말도 참 지혜롭고 슬기롭게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다!” 라고 고백합니다. 아주 버릇없게 자기를 꼭 치료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아닙니다. 보통은 그럴 텐데,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은혜만을 간절히 바라지만, 자기는 예수님께 그 어떠한 권리도 주장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겸손과 자세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들도 어떻게 간구하고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며, 권능의 주님을 인정하고, 감히 우리 같은 사람은 주님께 간구할 수 없지만, 선하신 주님의 성품을 의지하여 겸손히 아뢰는 이 모습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4)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이 나병환자를 고쳐 주시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먼저 율법대로 제사장에게 병 나음을 입증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 속죄의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받은 은혜를 말하지 않을 수 없기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가는 곳마다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5-7)

 

 마태는 이어서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기사를 소개합니다. 여기 한 백부장은 누가복음에 보시면, 로마의 군인입니다. 이방인인데, 예수님께 나와 유대인 종 한 사람의 죽을 병을 고쳐 주십사 청합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호의와 인품을 좋게 보시고, 직접 백부장의 집으로 가시겠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서로 왕래하는 것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시대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친일파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습니다. 

 

 로마의 앞자비로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이 때에, 백부장이 참으로 슬기롭게 대답을 합니다.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8-9)

 

 백부장의 뜻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일은 자기가 무엇이든지 순종하고 따르겠다고 것입니다. 군인들은 상관의 명령에 100% 순종하고 절대 복종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의 뜻대로 시키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시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0)

 

 예수님은 이 백부장의 충성과 절대적인 복종의 태도를 높이 평가하십니다. 우리가 항상 믿음- ‘피스티스’-을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원어의 뜻은 ‘충성’에 더 가깝습니다. 바로 이 백부장과 같은 자세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이라면,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고 절대적으로 따르겠다는 자세가 바로 ‘피스티스’이고 믿음이며 충성입니다. 이제까지 서양에서 들어온 기독교 사상이 이분법적인 영향을 받아서 머리 속으로 이해가 되고 받아들여진 것을 ‘믿음’으로 착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진짜 참 믿음은 이런 백부장과 같은 자세입니다.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1-12)

 

 예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백부장과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는데, 이방인인데 예수님의 말씀에 절대적 신뢰와 순종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 놀랍게 여기시며, 앞으로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표본으로 제시합니다. 앞으로 이방 나라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올 텐데, 정작 혈통적으로 유대인인 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자세를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 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놀라운 순종과 절대 복종의 자세를 보인 백부장에서 예수님은 더 놀라운 이적과 기사를 베푸십니다. 그것은 창세기에서 말씀으로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13)

 

 백부장이 행동으로 한 것은 그저 집으로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백부장의 간절한 바램대로 또 믿음대로 하인이 나았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처럼 만지거나 어떤 치료행위 없이도 말씀으로만 병자를 고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즉, 하나님이십니다. 앞으로 9장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말씀만으로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무덤에서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14-15)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를 고치십니다. 아마 베드로가 장모님을 모시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좇아 다니니까 아무래도 가정에는 소홀히 하게 될 텐데, 병든 장모를 위해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간구했겠지요.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의 질병도 고쳐 주시는데, 자신을 따르는 제자의 가족들을 외면하시겠습니까?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16-17)

 

 예수님께서 고치신 병자가 한 둘이 아닙니다. 날이 저물도록 환자들은 계속해서 몰려 옵니다. 그 당시 병원이나 약국이나 한의원 같은 곳이 많았겠습니까? 혹시 있다고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그 비용 때문에 갈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집에서 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예수님께서 거저 고쳐주신다는 소문이 퍼지니 계속 밀려 오는 것이지요. 심지어 귀신 들린 사람도 주위 가족이나 친지들이 끌고 예수님께로 데려옵니다. 

 

 하도 많으니, 마태가 다 기록할 수 없고, 예언서에서 기록한 대로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치유의 사역을 행하셨다고 짧게 요약합니다. 예수님 당시 모든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찾아온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 나아온 모든 자들은 주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는데, 주님을 찾아 적극적으로 나아온 자들은 그들의 영적인 문제, 육적인 문제를 해결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니, 예수님은 유대 사회에서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다가 한 자리 얻을 수 있겠다고 믿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당시에 성경 좀 안다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싸는 것을 보시고 건너편으로 가기를 명하시니라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18-19)

 

 아마도 이 서기관은 예수님이 곧 예루살렘 왕궁에 입성하게 되시지 않겠느냐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장미빛 전망에 대해서 현실을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뜻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님을 에둘러 표현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20)

 

 예수님은 이 땅에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곧 다시 하늘 나라로 가실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예수님을 통해서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 부귀영화를 쌓고 영원히 살 것처럼, 행하기 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준비하는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21-22)

 

 이 부분만 읽으면, 예수님이 참 매정한 분 같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례를 아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대하게는 못 할지라도 최소한 모든 가족들이나 친지들이 보는 앞에서 장례절차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중요한 가족행사(?)에 빠진다는 것은 어쩌면, 가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겠다는 것으로 치부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장례행사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을 준비시키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사는 것이 곧 잠시 잠깐 이 땅에서의 헤어짐보다 더 소중한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이 죽은 사람들은 그저 장례를 치르고 슬퍼할 뿐이지만, 진정한 성도는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장례 조차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제시하는 복음의 사역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미 죽은 사람은 우리가 더 이상 해 줄 것이 없습니다. 심판은 오로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미 죽은 사람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보다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할 것입니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3-24)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면서, 얼마나 피곤하고 고단한 사역을 하셨는지 이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히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피곤함과 배고픔과 아픔들을 다 당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 또는 호수를 배로 건너서 반대편 마을에도 복음을 전하러 가십니다. 큰 물결이 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 어부 출신들도 있었는데, 자기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위기에 봉착하니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25-27) 

 

 이렇게 흔들리는 배 안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주무실 수 있었을까요? 아무튼 일어나신 예수님께서 바다를 향해서 엄히 명령하십니다. “잔잔하라!” 예수님의 말 한 마디에 바람도 바다도 아주 잔잔해 집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바람과 바다가 순종하는 장면은 참 놀랍습니다. 주님은 성부 하나님과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주인을 알아보고 순종합니다. 다만, 인간만이 거역하고 예수님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28-29) 

 

 

 예수님께서 피곤하신데, 배를 타고 가다라 지방(갈릴리 호수의 동남쪽 10여㎞ 지점에 위치한 데가볼리의 한 성읍, 신약 당시 헬라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으로 가신 이유가 이 군대 귀신 들린 사람들을 구원하시고자 함입니다. 

 

 여기에 두 사람이 무덤 곁에서 살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 귀신들린 자 때문에 그쪽의 길을 함부로 다니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오셨습니다. 이 귀신들린 사람 둘이 와서 말하는데, 실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귀신이 그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말을 합니다.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0-31)

 

 이 귀신들이 지금 예수님께서 왜 여기에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귀신들을 이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여서 그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입니다. 귀신들이 나오면 그들의 거처는 어디가 됩니까? 갈 데가 없으니까 돼지에게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32-34)

 

 다른 복음서에는 귀신들이 돼지떼에게 들어갔는데, 2 천마리였고,  이 돼지들이 바다로 몽땅 뛰어들어서 몰살합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멀쩡하게 인격이 돌아와서 옷을 입고 예수님 앞에 앉았는데, 돼지 치던 사람들은 가축이 죽게 되니까 그것만 보이고 아까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 더 계시다가는 나머지 가축들도 모두 바다로 빠지게 될까 염려하여 예수님께서 그 지역을 떠나시도록 간구합니다. 또 예수님은 다른 곳으로 전도하러 가십니다. 

 

 이 일을 통해 구원받은 자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고 싶어합니다. 또 다시 귀신들이 자기 몸속으로 들어올까봐 그렇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않으시고 자기 집에 가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전하라고 가정 구원과 이웃 전도를 위해서 그를 집으로 보내십니다. 

 

 이 말씀도 깊이 묵상하면, 나눌 것이 참 많지만, 짧게 줄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돼지 2천 마리에 비할 바가 못 될 만큼 소중하고 아끼십니다. 세상은 물질과 돈을 사람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이런 고생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주님을 깊이 생각하며,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부르신 은혜에 감사하며 감격하며, 우리의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주님을 증거해야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를 고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세상은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만 돈을 벌면 된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귀신들에게 고통을 받는 자들을 내버리고 방치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피곤한 가운데 계속해서 한 영혼을 구원하십니다. 

 

 주님! 우리도 그러한 은총을 받았는데, 다시 가다라 사람들처럼 변해가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살펴 봅니다. 이제 가정과 우리의 이웃 속에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사역에 동참하길 원합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권능을 주옵소서!  

 

 주님나라를 위해 일할 때, 모든 가정사와 우리의 개인의 일들은 주님께서 돌보아 주실 줄 믿습니다. 믿음을 가지게 하시고, 충성되이 행하는 주님의 일군들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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