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1-5)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월절의 희생양처럼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비슷한 시각에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은 유월절을 지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시공간이 다르지만, 예수님은 저들의 악한 계획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구약 성경의 예언자들에 따르면, 이미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정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악한 자들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안타깝게 높은 자리에 있는 지도자들이 그렇게 쓰임(?)을 받게 됩니다. 저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탐욕과 악한 계획을 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악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부활을 통해서 보여 주십니다. 또한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代贖)의 길을 여십니다.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6-7)
베다니에는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가 사는데, 예수님이 그곳에 계시지 않고 시몬이라는 사람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마 시몬이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겠지요. 그 동네가 대체로 나환자촌이기 때문에 부유한 동네는 아닙니다. 다 고만고만하게 어렵게 사는, 우리식으로 달동네와 같은데, 한 여인이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이 여인은 마리아이지요. 보통 여성이 자신의 혼인을 위해서 평생 모은 돈으로 이 기름을 준비합니다. 누구를 위해서? 자기 남편될 사람을 위해서이지요.
예수님과 어떤 약혼 같은 것을 한 것도 아닌데, 이 여인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예수님께 바친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낭비하느냐면서 이 여인을 나무라지요.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8-9)
제자들은 예수님께 바치는 이 기름을 ‘낭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평소에 가난한 사람들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처럼, 비싸게 팔아서 좋은(?) 일에 쓰면 좋았겠다고 핀잔을 주지요. 이 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두둔하십니다. 다른 복음서에 보면, 이 여인은 마리아입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0-12)
이 여인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제 잠시 후에는 제자들 곁을 떠나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섬길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주위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원하는대로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 수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기회가 있을 때,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이렇게 마지막 기회를 잘 살려서, 주님 앞에, 교회 앞에 영원히 기억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베다니 마리아가 그랬고, 아리마대 요셉도 자기 무덤을 예수님께 내어 드려서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까? 니고데모도 예수님의 시신에 몰약을 드렸지요. 아무튼 우리들도 기회를 놓치지 말고 먼저 해야할 봉사와 사랑과 섬김을 잘 분간하여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3)
반면, 예수님을 잘 따라다니다가 결정적일 때,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대표적인 사람이 나옵니다. 가룟 유다입니다. 이 사람은 요한복음에 보면, 도둑이라고 낙인이 찍힙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예수님을 좋은 마음으로 따라다니며, 나름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주님께 들어오는 헌금을 착복하는 도둑이었다고 기록됩니다. 성경에 영원히 그렇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4-16)
한 때는 제자였는데, 이제는 예수님 자체를 팔아먹는 팔렴치한 놈(?)이 되었습니다. 속으로 마리아의 ‘옥합’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분해서였을까요? 어떤 신학자 중에는 이 유다가 예수님께서 유대 독립운동을 할 줄 알았는데, 그냥 성전에서 말씀만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실망해서 배반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만. 역사의 오명을 남기는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차라리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다면 더 나았을 뻔 했습니다. 성경에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사람에게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17-19)
예수님께서 유월절 기간을 예루살렘 성 안에서 보내시게 되는데, 어떤 사람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누게 됩니다. 그 때, 제자들에게 성만찬을 제정하시게 되지요.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20-25)
성찬을 하시기 전에 예수님을 배반할 사람이 누구인지 알려 주시는데, 가룟 유다가 딱 걸렸습니다. 예수님도 인정을 하셨고. 그런데, 여기에는 유다가 나갔다는 장면이 없지만 요한복음에는 미리 대제사장의 사람들과 연락이 되어 있어서 나갔고, 예수님을 팔 준비가 되어 있었지요. 다른 제자들은 가룟 유다가 나간 것을 무슨 물품을 사러 나갔는지, 아니면 돈을 가지고 있으니 무슨 비용을 치르려고 나갔다고만 생각했지 유다에 대해서 전혀 의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26-30)
예수님께서 성찬을 하시고, 또 요한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의 발도 씻겨 주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소망을 발견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하늘 나라이지요. 이제 예수님은 땅에서 두 번 다시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지고 제자들과 함께 이런 성찬을 나누는 일은 이제 없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한 번 달려서 돌아가시지만, 이제 십자가를 지신 이후에는 다시는 주님께서 피를 흘리시는 일은 없을 것이란 사실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알아야 할 것이 살아 있을 동안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가 있을 때, 영접해야지, 다음 생에 예수 믿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완전히 배반하고 떠나서 돌이킬 수 없이 돌아간 유대인들도 다시는 회개의 기회가 없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참조)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한 번 믿기 시작했을 때,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완주(完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시 십자가에 달리실 일은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인생의 완주를 끝내고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를 즐길 것입니다. 새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십자가 뒤에 오는 큰 영광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고난과 환난의 끝은 멸망이 아니라 부활이며,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고통을 받고 끝날 인생이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1-35)
예수님은 어떻게 자기를 배반할 것을 알고도 이런 사람들을 제자로 거두셨을까요? 베드로만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가장 두드러지게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던 것 뿐입니다. 인간의 나약하고 비겁함을 아시면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36-39)
올리브 기름짜는 곳(겟세마네는 ‘기름 틀’이라는 뜻이 있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피곤해서 잠이 들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붙잡히실 줄을 아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데, 미리 아시기 때문에 심히 고민이 되십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되셔서, 아픔과 고통을 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제자들이 잠시도 곁에서 함께 기도해 주지도 않고, 곧 다 배반해서 떠날 것을 아시기에 착찹한 심정으로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언제나 인간적인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원함’대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셨고요.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0-45)
제자들은 배반하여 떠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는 ‘기도’입니다. ‘기도’ 제대로 하면, 우리도 실패하지 않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46-50)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의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계획을 미리 아시기 때문에 피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대로 잡혀 줍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라고 부르는 것과 차이가 있지요. 반면 예수님은 ‘유다’에 대해서 ‘친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깝게 지냈던 12중의 한 사람, 제자에게 배신을 당해서 잡히십니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51-56)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려는 사람에게 칼을 쓴 것 같은데, 목을 베지 못하고 귀만 베어서 잘렸는데, 예수님께서 만류하시고 그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폭력을 쓰지 못하게 하시고, 본인만 잡혀 가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은 보내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셔서 그렇게 됩니다. 제자들은 함께 잡히고 함께 죽겠다고 했지만, 모두 도망칩니다. 앞에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 이뤄지지요.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7-58)
베드로가 그래도 멀찍이 예수님이 어디로 잡혀 가시는지 보려고 따라갑니다. 그런데,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재판이 이뤄집니다. 엄연한 불법입니다. 예수님의 재판은 불의한 사람들이 불의한 방법으로 불법적인 재판을 하고, 불의하게 죽이는 그런 과정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59-66)
예수님의 죄목은 ‘신성 모독죄’입니다. 우리 나라에는 없는 법이고, 주로 신정 국가에서 이뤄지는 법인데, 사실 유대 나라는 지금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유대 사회에서는 문제가 되지만, 로마법에는 크게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죄를 가지고 로마 총독에게 가서는 정치범으로 죄목을 바꿉니다.
만약, 예수님이 정말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이 대제사장이나 백성의 장로들은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진짜 신성모독을 한 죄가 될 것입니다. 자신들의 종교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이런 식으로 불법하게 재판하여서, 때리고, 체찍질하여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서 가장 잔인한 십자가의 형벌로 죽게 만듭니다.
역사를 보면, AD 70년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을 당하는데, 약 100만 명이 넘게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당하게 됩니다. 그 모든 심판과 죽음은 예수님을 죄 없이 죽인 저들의 불의한 죄 때문이라고 역사신학자들은 평가를 합니다.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67-68)
신명기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을 죽이라고 명시되어 있는데, 이 유대인들은 율법을 잘못 적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참람한 짓을 벌이게 됩니다. 한편, 예수님을 멀찍이 쫓았던 베드로는 정말 예수님의 말씀대로 3번이나 부인하게 됩니다.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69-75)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약함입니다. 마음은 예수님을 부인하지도 배반하고 싶지 않지만, 혹시 내가 손해를 볼까, 내가 예수님처럼 고초를 겪게 될 것 같아 두렵고 떨림으로 부인했던 것이지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모습 아닙니까? 식당에서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분들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님을 부끄러워 하지는 않습니까? 당당하게 ‘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힐 수 있는 분은 얼마나 됩니까? 저와 여러분도 어찌보면, 이런 나약한 베드로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사랑해 주신 예수님을 이제는 진실로 믿고 따르며, 우리도 주와 함께 고난을 받고 미움을 받을지라도 주님을 바르게 섬기고 전할 수 있는 당당하고 씩씩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주님을 위해 드린 것이 없습니다.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지나친 것만 같습니다. 주님! 이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 제자가 되게 하옵소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섬겼던 마리아의 모습을 닮게 하시고, 가장 귀한 것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옵소서!
주님! 기도하기에 게으르지 않고,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육신의 약함을 핑계대지 않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기도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게 도와주옵소서! 서로 돕고 중보적 기도를 드리게 하시고, 함께 모여 기도하는 이 시간을 기뻐하며, 모이기에 힘쓰게 하옵소서!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통곡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곡을 해야 할 때에 통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나약한 상태입니다. 주님! 불쌍히 여기시고, 회개할 마음을 주옵소서! 주님을 당당히 믿는다고 고백하며 공중 앞에서나 누구에게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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