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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가복음] 5장 3가지 이적(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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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회 작성일 2025-02-05 13: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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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러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1-2)

 

 거라사 지방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는 ‘가다라’ 지방으로 지명이 다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한 사람이 군대 귀신이 들렸는데, 마태복음에는 두 사람이 군대귀신 걸린 것으로 나옵니다. 어쩌면, 비슷한 사건이지만, 가다라 지방에서도 거라사 지방에서도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 거라사 지역이 오늘날 엔 게브(Ein Gev)에서 북쪽으로 약 5km 떨어진 곳으로 봅니다. 옛날 수도사들은 이곳을 '쿠르시'라고 했는데, 이곳은 요단강 동편에 위치해 있는 데가볼리(10개의 도시) 지역의 한 성읍으로 이방인들이 거주 했습니다. 이방인들이 돼지를 먹기 때문에 율법에서 부정한 동물인 돼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으니,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그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해치고 있었더라.” (3-5)

 

 이 짧은 구절 속에 귀신의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귀신은 사람이 통제할 수 없습니다. 즉, 귀신 들린 사람은 제멋대로 입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른 이들은 어떻게든 통제해 보려고 쇠사슬까지 채우지만, 그것도 끊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제멋대로 남의 말은 절대 안 듣는 사람이 있습니까? 참 위험한 사람입니다. 어쩌면 그 속에는 귀신의 영이 들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소리를 지릅니다. 사람들이 거북해 할 수밖에 없는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어떤 음악성도 없고,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이상한 음악하는 사람들도 조심해야 합니다. 대다수는 너무 시끄럽고 정신이 혼미하게 들리는 이상한 소리를 음악이라고 좋아하고 따라하는 사람도 역시 귀신의 영이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대게 보통의 사람들은 질서가 있고 소리의 조화가 있는 것을 음악이라고 봅니다. 리듬, 박자, 음정이 규칙이 있고,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마음에 열정을 일으키는 소리가 있지요. 반대로 마음을 차분하게 하거나 쉼을 주기도 합니다. 파괴적인 소리, 기분 나쁘거나 아주 사람을 우울하게 만드는 이상한 소리는 귀신에게 나오는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은 자기 몸도 해칩니다. 남을 해치다가 더 이상 해칠 사람이 없고, 다 피하고 그러면 귀신이 들어간 사람의 몸도 해치는 것을 봅니다. 어떤 성경 말씀에는 물에도 넘어지고 불에도 넘어지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멀쩡한 사람이 일부러 자기 몸을 해칩니까? 그래서 우울증 같은 것이 걸려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귀신이 역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6-7)

 

 귀신이 두려워하고 떠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이지요. 또 하나님이십니다. 귀신의 말만 들어보아도, 예수님은 귀신을 괴롭힐 수 있는 분입니다. 반면, 귀신은 사람을 겁내지 않습니다. 어느 누가 이런 영적 존재를 제어할 수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8)

 

 귀신이 사람 몸에 들어가 역사를 하고 있었는데, 사람 몸을 차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여기 귀신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9-10)

 

 귀신이 예수님께 그 ‘쿠르시’에서 쫓아내지 말 것을 구걸합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우리가 생활하는 지역이나 동네에서 살지 못하도록 막아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집회를 하거나 부흥회를 할 때, 귀신이나 악한 영이 이 자리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권세는 우리가 전혀 상상할 수 없이 큽니다. 

 

 여기 ‘군대’라는 말은 헬라어의 ‘레기온’이란 말을 번역한 것인데, 예수님 당시의 로마 군대의 규모를 뜻합니다. 우리 군대 편제는 소대-중대-대대-연대-여단-사단 이런 식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아마 1개 사단 정도 되는 편제입니다. 귀신의 수가 동물 세 듯이 한 마리, 두 마리 정도가 아니라, 한 사람에게 한 6000 마리(?)의 귀신이 붙었다는 것이지요.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11-13)

 

 예수님의 허락으로 레기온의 귀신들이 한 사람에게서 나와 약 돼지 떼에게, 2천 마리 되는,  동물 속으로 들어가 비탈을 내리달아 바다로 빠져 들어갑니다. 그래서 돼지들이 몰살하지요.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4-15)

 

 돼지 치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한 순간에 자신들의 재산이 공중분해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은 구했는데, 자신들은 손해를 보니, 얼마나 큰 충격이겠습니까? 반대로, 예수님이나 하나님은 그 수천 마리의 돼지보다 한 사람, 한 영혼이 소중하기 때문에 그를 구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 오신 이유가 단 한 사람, 귀신들린 자를 귀신에게서 해방시키고 온전하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6-17)

 

  그 거라사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재산상의 손해가 더 일어나고, 귀신들의 복수가 일어날까 싶어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참, 무지한 자들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환영해야 하는데, 오로지 물질만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이 사건을 깊이 들여다 봐야 합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잃어도 목숨을, 생명을 얻는 것이 더 귀한 것이고, 좋은 것이며, 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자기 영혼을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우를 범하면 안 되겠습니다. 마지막 때에 모든 재물과 재산을 다 잃어버려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 한 분 만으로 기뻐하며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18-20)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이 귀신 들렸던 사람은 사는 동네에서 배척을 받았지 않았습니까? 또한 다시 귀신에게 자기가 어떤 일을 당할 지 모르기 때문에 예수님 곁에 머무르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가정과 이웃에게 전하라고 사명을 주시고 떠나십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사람마다 해야할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 항상 곁에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게 하시지만, 이렇게 큰 은혜를 베푸시고 예수님을 증거하며 가족들 곁에 있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가족과 친지들과 이웃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 귀신 들린 사람이 겪은 일은 일 평생에 단 한 번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예수님께서 구원하셨다라고 전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일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았다면, 우리들도 이 거라사인의 구원받은 사람처럼, 가족 구원과 이웃 구원을 위해서 열심히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시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21-24)

 

 예수님께서 거라사에서 다시 요단 서편 쪽으로 배를 타고 이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나가나 사람들이 자기들의 문제를 가지고 나옵니다. 매우 바쁘게 다니십니다. 여기 회당장이 나오는데, 이 회당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생긴 것입니다. 제사를 드릴 수 없으니, 유대인들끼리 모여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읽고 찬양하며 제사대신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모여 예배드릴 공공의 건물이 ‘회당’입니다. 이 회당이 곳곳에 지어졌는데, 그런 회당을 관리하는 사람 중에 야이로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 나와 자신의 딸이 죽어가니까 꼭 오셔서 고쳐달라고 간구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집으로 가십니다.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온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25-29)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려고 이동하는 중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합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가에 손을 대어 나은 일이지요. 예수님은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중에서 그 여인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능력이 나갔기 때문이지요.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 주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래서 예수님의 옷을 만진 사람이 한 둘이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을 찾을 수 있냐고 반문하지요.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30-31)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어쩌다가 스쳐서 예수님을 만졌다고 해서, 병이 나은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옷에라도 손을 대면 나을 것이라고 믿은 그 혈루병 여인에게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를 하지만, 정말로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온 사람만 은혜를 누릴 것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고 모든 병이 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예배당에 나와 있다고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32-33)

 

 예수님은 이 혈루병 여인을 주목해 보십니다. 이 여인은 많은 사람 앞에서 예수님께서 베푸신 병고침의 은혜를 나눕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나올 때에 두려워하여 떨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유대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랍비로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예언자 또는 선지자로 사람들이 믿었는데, 이런 분을 하혈하는 부정한 여인이 손을 댄다는 것은 거룩한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유대 전통으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죄를 받게 될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여인이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첫 마디에 “딸아~!” 하십니다. 부정할지라도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허물을 덮어주십니다.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주시지요.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가족으로 맞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자녀로 삼으십니다. 이것이 부정한 죄인이, 멸망받아 지옥에 떨어질 죄인이 구원을 받는 은혜의 부르심입니다. 할렐루야!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35) 

 

 혈루병을 가진 여인 때문에 야이로의 집에 가는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한시가 급한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반면, 야이로의 딸은 죽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이제 오시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36-37)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며, 야이로를 비롯한 3명의 제자만을 데리고 딸이 죽은 곳으로 갑니다. 아마 야이로는 자신의 딸이 죽었기 때문에 통곡하면서, 좌절과 절망 속에 빠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만 아니라면 더 빨리 예수님을 모시고 올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언가 놀라운 일을 하시려는 듯이 계속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십니다.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38-43)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할 때,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죽은 아이를 살리셨습니다. 아이 곁에서 그의 죽음을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무시했던 자들은 굉장히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죽은 자들이 ‘자는’ 상태입니다. 종말 때에도 죽은 자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이들과 성도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 거라사인의 지역에 가셔서, 돼지떼를 희생시키며 귀신을 쫓아내신 예수님을 봅니다. 우리들을 살리시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그 사랑과 그 은혜를 받은 우리들도, 우리의 가정과 이웃과 친지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께 나아가면, ‘딸아, 내 아들아!’ 부르시며 영접해 주실 줄 믿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처럼 부정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심을 늘 깊이 생각하고  주님의 부르심에 감사하며 기뻐하고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주님은 마지막 때에 잠든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좌절과 낙심과 연민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도와 주옵소서! 영원한 생명은 주님께서 허락하실 것입니다.  오늘도 부활의 소망을 증거하며 담대하게 살기를 원하오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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