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 셰퍼(Ary Scheffer, 1795-1858) 作 "광야의 유혹">
-사탄이 예수에게 세상 천지를 보여주며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유혹하는 장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1)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사랑을 받고 기쁨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시험을 받으십니다. 놀랍게도 이 시험의 장으로 이끄신 것이 ‘성령’이고, 시험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납치되셔서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고초를 받으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 시험의 장소는 ‘광야’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아무런 시험이나 어려움이나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학생이 시험을 피할 수 없듯이, 성도들에게도 시험이 요구됩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2)
예수님은 40일 동안 굶게 됩니다. 광야에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지내게 됩니다. 얼마나 배가 고프고 지치셨겠습니까? 극도의 굶주림 속에서 첫 번째 시험 문제가 제기됩니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3)
40일을 굶겨 놓고, 광야의 돌들을 떡이 되게 해서 배고픔을 해결해 보라고 어떤 면에서는 조롱이요, 인간의 결핍에 대한 당연한 반응을 이끌내려는 사탄의 유혹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되셔서 사람처럼 똑같이 배고픔의 고통과 기아의 상태에서 시험을 합니다.
이 사탄의 시험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했던 장면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다른 면도 있습니다. 우선 사탄의 노림수는 먹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기아의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에덴 동산에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모든 것을 임의로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일명, 선악과)만 금지되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온통 돌들이 산재해 있는 데서 돌을 빵으로 바꿔서 먹으라는 유혹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욕심에 선악과를 먹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라는 요구에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면서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너졌지만, 예수님은 이 사탄의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어떻게? 말씀으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죽을까 하노라’ 하면서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로 돌을 떡으로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만약, 이 시험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 신의 능력으로 돌을 떡으로 바꾸어 버리게 되면, 예수님은 온전히 사람을 대표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는데,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격으로 있게 됩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러한 시험을 다 통과하신 후, 하나님으로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십니다. 그러나, 그 상황과는 지금의 순간은 다릅니다.
그런 이적과 기사의 순간에는 항상 축사를 하시거나, 안수하시거나 기도를 통해서 성령과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역을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한 이적과 기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믿음과 신뢰를 주시기 위한 이적과 기사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40일을 금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돌들을 명해서 떡이 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사탄의 시험은 우리에게 이처럼 동일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하게 준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적절하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5-6)
첫 인류의 시조는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무너졌지만, 예수님에게는 재차 다시 사탄이 도전합니다. 두 번째도 역시 전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증명해 보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시편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입니다. 사탄은 자꾸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져도 천군천사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날아와서 붙잡아 땅에 추락하여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을 것이 아니냐며 시험합니다.
cf. 시편 91: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즉, 철저하게 우리의 입장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7)
우리 인생들은 자꾸 시험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시험을 가지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고 하지요. 연인 관계에서 우리 나라 여성들이 남자친구에게 자기를 사랑한다면 명품 가방을 사 달라고 합니다. 그래서 얼마짜리 가방을 받았는지를 가지고 자기를 사랑하는 척도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남자친구가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고 돈을 버는지 모르겠지만, 보통 500만원 짜리 명품이라고 치면, 보통 20대 남성들이 2달 치 봉급입니다.
한 푼도 안 쓰고 목숨바쳐서 뼈 빠지게 일해서 번 돈인데, 그 목숨을 내 놓으라고 요구하는 여자친구는 그 남자친구를 사랑하는 것입니까? 그 남자는 아마 배아파 낳은 자기 어머니에게도 그런 선물을 해 드린 적이 없을 텐데, 최소한 20~30년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에게는 그런 선물을 사드리지 못했는데, 그런 것을 요구하는 여성이 있다면, 당장에 그만 만나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오히려 여자친구를 만나고 더 부모님께 잘 하고 마음을 쓰는 아들로 바뀌었다면, 그런 여자는 빨리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무엇을 더 요구하고 달라고 할 것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에 철이 들면, 하나님께 요구할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할까!’ 하면서, 마음을 쓰는 사람이 성숙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바르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을 해 주었는지 묻고 따질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범사에 감사할 것 뿐이고, 기뻐할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구하고 기도할 것이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고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또, 사탄도 성경을 알고, 이 성경 가지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단들이 다른 성경을 가지고 우리를 미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가지고 우리를 흔듭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시험에 말씀으로 이깁니다. 시험도 말씀을 가지고 나왔고, 그 시험을 이기는 법도 말씀을 잘 알고 적용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을 최소한 이단들보다는 더 잘아야 합니다. 이단들은 여기 저기서 조금씩 인용해서 자기 마음대로 수정하고 편집하고 왜곡해서 성도들을 시험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성경을 전체적으로 알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그리고 우리 삶에 바르게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개인 경건의 시간(Quiet Time)이 필요한데, 가장 좋은 것은 역시 새벽시간을 활용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침, 고요한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기를 바랍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8-9)
마귀가 천하 만국을 예수님께 보이며, 자기에게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시험합니다. 천하 만국이 자기 것도 아니면서, 마치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런 것에 속아 넘어갈 예수님이 아니시지요.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탄의 달콤한 유혹도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싶은 돈, 명예, 권력 등 이런 것을 줄 테니, 양심과 신앙을 팔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에 미혹되어서 범죄하게 됩니다. 권력을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죽이고, 자신이 섬기던 왕까지 배반하여 칼을 겨누지 않습니까! 돈을 위해서, 일확천금을 쉽게 얻으려고 도둑질을 하고, 속여서 빼앗고 사기치고 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다가 죄의 올무에 넘어지게 됩니다. .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0)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이런 악하고 음란한 생각이 들면, “사탄아 물러가라!” 외쳐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본분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천하만국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예배하고 섬기는 것이 마땅히 해야할 일입니다.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11)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이 시험을 통해 명실공히 완전한 사람으로서도 시험을 이기시고, 죄를 이기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들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2)
이 부분만 읽으면, 박해가 두려워 갈릴리로 자리를 옮겨 사역을 하신 것처럼 생각되지만 하나님께서 메시야의 사역이 집중될 곳도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말씀해 놓으셨습니다. 이 갈릴리 지역은 예수님께서 자라신 나사렛 동네를 포함합니다. 나사렛 동네 보다는 조금 떨어진 가버나움 쪽으로 이동하셔서 본격적으로 공생애(共生涯)를 시작하십니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3-16)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나 그 주변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가장 천대받는 지역이었던 갈릴리 지역에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당시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지역은 로마가 총독을 파견해서 직접 다스렸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곳을 중심지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부터가 아니라 예루살렘과는 먼 거리에서 사역을 시작하는데,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이 갈릴리 지역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찾는,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 더 많았던 것입니다. 실제, 유대지역보다는 소득이 떨어져, 가난하기도 했고.
소외되고 낙후된 지역에서 예수님이라는 큰 빛이 임하여, 진리가 선포되고 구원의 길이 열린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특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17)
예수님도 요한처럼 동일한 메시지로 시작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모여야 합니다. 주님의 통치가 있는 곳이 곧 천국입니다. 우리 교회가 작은 천국이 되어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스려지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18-20)
예수님은 이 갈릴리 지역에서만 7명의 제자들을 부르시는데, 마태는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을 베드로와 그 동생 안드레를 소개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사실 안드레가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고 제자가 되었는데, 이렇게 베드로를 먼저 소개하는 것은 아마도 사도들의 모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수제자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이들의 직업을 이용해서 어부긴 어부인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자신을 따르라 하십니다.
베드로와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짧게 소개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에는 더 자세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지요. 아무튼 마태는 여러 이야기는 생략하고, 단순하게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합니다.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1-22)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도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가족보다도, 그리고 생계보다도 예수님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도 다른 것보다도 예수님을 가장 우선시 하고 따를 수 있는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참 단순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기에 이들이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따르는데 우선순위를 두었을까요?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3-25)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치유 사역과 예수님의 영적인 권세를 봄으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시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행하시는 기적과 능력을 경험하며,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시험당하심과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을 읽었습니다. 우리들도 사탄의 시험이 닥칠 때, 유혹에 넘어져 범죄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믿음이 자라서 예수님처럼, 사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 안에 거하며, 참된 진리를 보며,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하시고, 우리가 당장에 해결해야 할 여러가지 인생의 문제들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선되게 하옵소서!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시고, 우리의 본분을 지키며, 주님의 자녀로서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게 도와 주옵소서! 우리를 성도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을 따름이 기쁨이 되게 하시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하나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의 경주를 잘 감당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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