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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3장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는 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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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895회 작성일 2024-06-12 18: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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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무위키 '세례자 요한', 알렉상드르 카바넬 작(作)>

 

 마태복음 3장에는 요한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일명 ‘세례 요한’으로 부르는데, 세례는 별명처럼 붙은 것이고 정확하게 표현하면, 세례를 주는 요한이란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수님의 이집트 피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요한이 등장합니다. 요한이 어떤 사람인지는 누가복음이나 요한복음에 자세히 소개되었지만, 마태 당대에는 유대인이라면, 요한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기 때문에 소개를 생략합니다. 

 

 요한으로 말하면,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하고 따르는 사람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의 통치자나 로마의 군사들과 관리들에게 조차 거침없이 죄를 지적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는데, 요단 강에서 날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 찾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가 된 사람 중에는 요한을 선생으로 모시고 따르다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하는 것을 듣고,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는 일도 있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요한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엣세네파-쿰란 공동체의 일원이었다고 합니다. 엣세네파는 경건주의자들로 세속의 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고, 광야로 들어가 은둔생활을 하며, 금욕과 율법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며, 성경을 필사하고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1-3)

 

 이 요한의 등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기 전에 그 메시야의 등장을 위해서 준비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이 되었습니다. 마태는 예언자 이사야가 말했던 주의 길을 준비하는 ‘광야의 외치는 자’가 바로 요한으로 소개합니다. 요한이 나타났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메시야가 이어서 등장할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메시야를 위해서 준비한 것은 무엇입니까? 요한이 광야에서 무엇을 외쳤습니까? 구체적인 외침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하나님을 등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전히 예루살렘에서 제사가 드려지고 있고,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성전에 있으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마치,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 신자들에게 ‘회개하라!’는 외침과 비슷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심지어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전혀 구별됨이 없이 살아가는 오늘날의 ‘신자(?)’들의 모습이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요한의 회개의 외침은 구체적으로 누가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요한의 관심은 단지 ‘회개’의 초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의 이유는 그 다음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라’에 대한 의미는 남다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태가 이 복음을 기록했을 당시에는 이스라엘이 로마 나라의 식민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의 식민지였던 때가 있었지요. 1945년 8월 15일 독립이 선포되고 이 소식이 퍼졌을 때, 모든 국민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자유 대한민국에서 평안히 살아가기 때문에 나라잃은 설움과 고통과 아픔을 잘 못 느기고,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것에 대해서 그다지 감정적으로 기쁨과 환희를 못 느낍니다. 그러나 광복의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보면, 얼마나 큰 충격적인 사건인지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나라’라고 요한의 소리를 들었을 때는 아마도 다윗시절의 영광스런 세속국가를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인지하고 알았들었을지라도, 분명하게 마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는 나라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 펼쳐지는 새로운 나라를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성도들도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나라’가 정확하게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이해를 해야 합니다. ‘복음’이 곧 ‘하나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복음을 한 개인이 잘 되고, 건강하고 부유하게 되는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그저 ‘신자(?)’에 불과합니다. 또 단지 예수님을 믿고, 살다가 죽으면, 내 영혼이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복음’을 아주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 전체가 ‘하나님 나라’를 그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죽어서 천국가는 극히 일부분을 전부로 알고 있는 것은 큰 오해이며, 잘못하면 이단에 빠지게 되는 연약하고 빈약한 믿음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 (4) 

 

 요한의 회개촉구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5절 이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순히 요한의 외침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했을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요한의 외모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구약 성경에서 예언자나 선지자의 모습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이 열왕기서에 나오는 엘리야가 아마도 유일할 것입니다. 바로 요한의 외형적 모습이 ‘엘리야’를 연상케 합니다. 요한도 털이 많고 약대의 가죽털의 옷을 입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셨던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의 사역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5-6)

 

 요한의 선포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은 전면적이고 열광적이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 죄를 자복합니다. 그리고 회개의 결단으로 요한에게 나와 세례를 받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학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할 때, 교회에서는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하고 있지 않습니다. 자기 죄를 자복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결단 없는, 뭉뚱그려서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고백하는 것으로는 도대체가 세례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나 별다른 차이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튼, 이것이 물세례의 한계인 것입니다. 요한에게 나아온 사람들 중에는 심지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로마의 군인들도 등장하고 세리들도 나옵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7-9)

 

 마태가 전한 복음에는 충격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복음은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 많은 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나왔고 사두개인들이 왔지만 그들에게는 저주의 신탁 뿐, 요한은 세례를 베풀지 않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생각에 ‘아브라함이 나의 조상’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아브라함의 자손다운 삶은 없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깊이 들여다 보면, 우리 신자(?)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저들의 믿음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또한 종교적인 행위로 따지면, 바리새인들은 물질적인 십일조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먹는 '음식의 십일조'까지 행하고, 금식과 구제와 기도를 행합니다. 이렇게 열성적인 종교행위를 하면서,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심과 확인이 가득차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보면 동일하지 않습니까? 또, 선교단체에 소속된 분들은 ‘구원의 확신’이라면서, 몇 구절 요절을 들고 암송하고 자기 확신에 가득차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오늘날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새벽기도를 나오고, 수요예배와 주일낮예배와 오후의 찬양예배를 드리고 교회 봉사하고, 십일조를 드리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직장과 가정에서 어떤 삶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말이지요. 또, 신자들도 자신의 사생활을 드러내기를 매우 싫어하고, 가정 심방은 물론이거니와 평일에 목회자가 찾아와서 만나는 것을 꺼려합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교회 봉사하고 헌금 하면서, 사회적 지위와 명예가 있으면 하나님께 복을 받은 것으로 확정합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보실까요? 전혀 아닐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종교적으로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고, 이들이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들이 되어, 세속의 권력까지 장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복음이 닫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늘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매일 매일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10)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 말씀을 잘못 곡해하면, 행위 구원론이 됩니다. 마치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선한 열매를 맺어야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메시야가 아닙니다. 이것이 참 복음이 아닙니다. 진짜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십니다. 

 

 요한이 임박한 심판을 선포했지만, 중요한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1-12)

 

 단지, 요한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죄를 자복하게 하고, 메시야의 필요성을 사람들에게 각인 시키는 역할입니다. 아무리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자유하지 않습니다. 메시야께서 오셔서, 진정한 세례, 성령과 불의 세례를 주셔야만 진정으로 회개가 되는 것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맺힐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3)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중에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시간 순서대로 보면, 2장과 3장 사이에 유년기, 청소년기의 예수님의 모습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3장 13절에 등장하는 예수님은 서른 즘 되셔서, 공생애를 시작하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이나 받아야 하는 세례를 받으시려고 요한에게 나아오십니다. 상당히 신학적인 난제인데, 어떻게 죄가 없으신 분이 물세례를 받으실 수 있느냐 하면서, 논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구약에서 아사셀 염소에게 죄를 전가하기 위해 안수를 하듯이 모든 인류의 죄를 전가하기 위한 의식이 아니겠는가 생각됩니다. 

 

 물세례에는 ‘죄를 씻는다’는 의미도 있지만, 물에 완전히 담그어(침례) ‘죽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물론 물 속에서 건져내기 때문에 새로운 존재로 부활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지요. 아무튼, 요한의 입장에서는 죄인들이나 받아야 할 세례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것도 사람에게 받으시려고 하시니 얼마나 송구하겠습니까? 그래서 만류를 하지요.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4)

 

 세상의 이치로 따지면,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받아야 맞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습니다. 여기 요한까지는 구약시대를 산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지 않습니다. 어떤 의식이나 형식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양심과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인정받는 사람만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을 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백성이 되지 못하는 것으로’ 전혀 아닙니다. 그 심판의 몫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5)

 

 우리가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도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16-17)

 

 (기도) 사랑의 하나님,  죄인을 심판하며 당장에 보응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시니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사람의 손에 세례를 받으시고 마지막 숨거두시는 순간까지 섬기신 주님의 사랑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지난 모든 날이 주님의 은혜였고 지금도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인내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참으시고 기다려주신 주님! 우리들도 주님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립니다.  장차 하늘이 열리고 나팔소리와 함께 천군천사와 영광 가운데 임하시기 전에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순결한 신부처럼, 변화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요, 기뻐하는 신부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성령님께서 항상 인도하옵소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주님의 백성이 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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