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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5장 예수님의 말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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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23회 작성일 2024-07-03 15: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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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 설교》, 칼 하인리히 블로흐 (1879년 作), 덴마크국립역사박물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7)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에게 비치는 모습은 ‘율법’을 깨뜨리고 파괴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안실일에도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제자들이 밀 이삭을 비벼 먹어도 제지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안식일에는 일을 쉬라고 명령하신 율법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인간들이 자기들의 생각대로 가르치고 율법을 지키기 위한 쓸데없는 세부 규정을 만들어서 전통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잘못된 율법 해석과 적용을 고치고 바로잡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한 때, 성경학자들 중에는 율법 폐기론이나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단(異端, heresy)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율법을 없애러 오지 않았고, 율법을 완성하시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18)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인정하는 성경은 구약성경 뿐입니다. 그래서 신약을 통해 예수님을 배우고 자신들이 잘못 알았던 것을 고쳐야 하지만,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을 잘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기초가 부실합니다. 구약을 제대로 알아야 예수님의 행동이나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우리들은 철저하게 구약과 신약을 바르게 읽고 적용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신약과 구약 사이에 있는 역사, 중간사라고 부르기도 하는 그 시기의 역사와 문서도 알면 훨씬 신약의 말씀들이 생생하게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19)

 

 이제까지 목회자들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전부를 읽어주고 설교하지 않았고 여기 저기서 몇 구절을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이 본문 말씀에 비쳐 보면, 그리 잘한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한 분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고 몰라서 그렇게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축복’이나 성도들이 별로 쓴 소리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시간이 좀 걸려도 차근차근 하나씩 모두 읽어야 하고, 그 뜻을 헤아려서 바르게 말씀을 전달하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100% 완벽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일단 다 배우고 들어보고, 잘못된 것은 수정하면서, 더 바르게 적용하고 개혁하는 것이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전통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그 정신이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20)

 

 이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그 모세 오경이라든지 예언자의 글들을 실천하려고 무척 애를 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우리도 본받아야 합니다. 다만, 그들이 잘못하는 것은 자신들이 성경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고 잘 실천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교만하며, 다른 사람들을 정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자신들만이 바른 해석자인 냥 자처했습니다. 

 

 오늘날에도 그런 이단들이 많이 출몰했습니다. 이른 바, 신사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기존 교회를 비판하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다른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자신들만이 바른 성경의 해석자라고 떠듭니다. 이단들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르게 율법을 가르치고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편협하고 오만하고 교만한 눈으로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까지 죽인 것입니다. 

 

 우리 장로교 통합측은 어지간 해서 함부로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을 지켜 봅니다. 왜 그렇게 하냐면, 우리가 각자 맡은 은사와 달란트가 다르기 때문에 다름을 틀림으로 보고 정죄할까봐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비평을 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단성이 있는 목회자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고 해서 문제가 있지만, 여러 신학적 논의와 행동을 보고, 잘못된 것은 교정해 주려고 합니다. 몰라서 실수하는 것은 바르게 지도를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해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과 생각과 사상이 예수님처럼 되어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남이 없도록 성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도가 되어 또 다른 사람들을 세워 나가면서 그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익히되, 성령 안에서 항상 겸손과 회개로써 우리가 계속 성장해 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될 때까지. 모든 심판과 정죄는 우리 각 개인이 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또 그 권세를 주신 교회 공동체에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일은 공동체 안에서 행하지만, 역사를 주관하시고, 심판하실 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입니다. 아멘, 아멘!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21-22)

 

 ‘살인하지 말라’는 제 6계명입니다. 예수님이 새롭게 해석을 하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그저 육체적으로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육체적인 죽음 뿐만이 아니라, 사회관계적 살인과 정신적 괴롭힘까지도 확대 해석을 하여서 한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는 것을 ‘살인’으로 규정하십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따돌림과 언어적 폭력도 일종의 살인입니다. 여기 ‘라가’라는 말은 유대인들의 ‘욕’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번역할 수는 없지만, 우리 나라에서 생각하면 혐오스런 욕설이 아닐까 합니다. 유대 산헤드린 공회에서는 실제로 이런 욕설을 해서 사람을 감옥에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공회는 하늘 보좌에서 벌어지는 재판일 것입니다. 

 

 단순히 ‘미련한 놈’이라고만 해도 그 마음 속으로 형제를 경멸하고 인격을 죽이는 생각을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로 강한 법입니다. 그렇다면, 욕 한번 하지 않은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십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은 10계명을 철저하게 지킨다면서, 일반 백성들을 경멸적 태도로 무시하고 깔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면, 오십보 백  보입니다. 즉, 사람의 관점에서는 엄청나게 의인과 죄인의 간격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모두 죄인일 뿐입니다. 죄인인 주제에 다른 죄인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눈으로는 참 가소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이나 하나님의 그 높은 의에 기준에는 한참을 못 미치는 우리들의 현재 상황을 적나라하게 제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23-24)

 

 우리는 단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는 이유만으로 형제나 이웃보다 우월감을 가지는데, 형제와 화복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섬긴다고 해 보아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차라리, 헌금은 많이 드리지 못할지라도 형제에게서 속여 빼앗아 취한 것이 없고, 누구에게나 피해를 주지 않고, 화목하게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더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 받으십니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25-26)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재물을 구하느라 이웃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드렸으니, 인간 세계에서 이웃이나 형제에게 손해를 입혔다면,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잘 하면 되었지, 어떻게 인간관계를 다 좋게 가져갈 수 있느냐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인 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최소한 사회법에서 사기치고 도둑질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세상에서 죄를 지어 버리면, 하나님께 욕을 끼치는 것입니다. 

 

 이 세상처럼, 하나님을 무슨 빽 쯤으로 여기고 그렇게 죄를 지으면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잘 사회규범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을 전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듣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27-28)

 

 제 7계명에서 ‘간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때에만 간음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먼저 눈과 마음으로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입니다. 개인과 개인의 합의하에 관계를 갖는 것을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는 시대인데, 마음 속으로 간음한 것도 간음이라고 규정합니다. 

 

 우리 사람들은 다른 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기 어렵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무슨 죄악을 짓고 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29-30)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모든 사람은 다 장애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눈으로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눈을 다 뽑아야 합니까? 손이나 발로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 팔다리를 잘라 내라는 말씀일까요? 그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우리가 ‘악’으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죄인으로서, 실제로 우리 마음 속에서 이뤄지고 있는 일들이 모두 죄악의 소원임을 지적하십니다. 그 악함을 몇 가지 드러나는 사례로 소개하십니다.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31-32) 

 

 예수님 시대 당시의 남성들은 자신의 분노와 패악을 자기 아내에게 행했습니다. 아내를 버리고, 경제적, 사회적 지위도 없는 여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여성들은 살기 위해서 몸이라도 팔아야 했지요. 한 남자의 분노와 악행으로 자녀들과 아내의 삶이 송두리째 빼앗기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왜 그러한 악을 저지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에 매여 노예나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3-36)

 

 고대 시대에는 자신의 말을 증명할 다른 증인이나 증거물이 없을 때, 맹세를 했습니다. 이 맹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믿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다가는 맹세 때문에 죽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그래서 헛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만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아예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 악해서 거짓과 불의한 일을 위해서 맹세를 할 수 있고, 맹세한대로 지키거나 약속을 이행할 능력이 없으면서 맹세를 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법정에서 진술할 때에도, ‘내가 본 대로는 옳은 것 같다, 이것은 아닌 것 같다.’ 옳다, 아니다 정도로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서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37) 

 

 고대 사회에서 복수와 보복은 사회적으로 의무였고, 연대책임이었습니다. 그러한 공동체의 결정에도 어느 정도 한계를 명시한 것이 율법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38-42)

 

 옛날 재판관에게는 죄인을 벌하기 위해서 눈을 실명하게 한 자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형은 ‘눈’을 뽑아버리는 정도이고, 치아를 부러지게 했으면 동일한 개수만큼 뽑아버리는 것이 한계입니다. 이 ‘동해보복법’은 우리 개인들의 윤리 규범이 아니라, 권력자의 법이었습니다. 재판할 때에 거기까지만 벌을 주도록 한 것입니다. 아니면, 권력자들은 아예 재산을 빼앗고 죽여버리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관행을 가진 일반 개인들에게 율법을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시며, 우리 개인들은 피해를 당해도 더 베풀 수 있을 만큼의 자비와 인애와 긍휼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로마 시대에 로마법에 따르면, 지배계층인 로마 군인들이 식민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착취를 해도 더 주어 버리면,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로마 사람이 길도 잘 몰라서 식민지 유다 백성에게 5리를 동행하게 했는데, 당시의 법에는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면 유다 백성들은 로마 군인들에게 5리까지는 길 안내를 해야 했습니다. 그런 지배계층에게 10리를 자발적으로 길안내를 하면,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갖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면, 정말 우리들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당시 유대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나 일반 서민들이나 아무도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 속으로 ‘동의’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3)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이웃은 자기 동포들이요, 원수는 로마 사람들일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4-45)

 

 이런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가’, 원수, 악인 같은 사람에게도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 주십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면, 여기 하나님의 아들이 될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조금 이상하게 해석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마치 매국노처럼 이해할 것입니다. 로마 지배층을 사랑하고 받들어 모셔라 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오해하기 쉬운 말씀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46-48)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기에게 잘하고 좋아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은 누구나 잘 관계를 맺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미워하고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사람을 좋아하거나 사랑할 수 없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자기 아들을 원수들을 살리기 위해서 내버려서 죽게 만드셨습니다. 모든 죄악을 아들에게 뒤집어 씌워서 죽게 만드십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에게 십자가로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실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속사람이 다시 거듭난다면 가능합니다. 우리는 악하기 때문에 악한 짓만 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 속의 죄가 죽고, 새 영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새 일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4)

 

 예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실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단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은 행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고 만들어가실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우리의 속사람이 새롭게 거듭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하게 변화되어 새롭게 된 성도들을 모아들일 것을 우리는 앏니다. 지금 우리는 자격이 없고, 욕심과 악한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참 자유를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건지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우리를 도우시고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대로 기도합니다. 매일 매순간 우리의 감정과 생각대로 말과 행동이 앞서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게 하옵소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셨는데,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거룩한 주님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의 감정과 생각이 변화되게 하시고, 기쁨과 감사만이 넘치게 하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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