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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기도회

[마태복음] 6장 구제, 기도, 금식, 재물에 관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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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14회 작성일 2024-07-10 18:5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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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제임스 티소(1836~1902)>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가장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원인 중에는 3가지 행동이 있습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입니다. 사실 구제는 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상당히 부유층이 많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장사나 재리에 상당히 밝은 사람들이지요. 대다수의 일반 서민들은 로마 통치 시대에 세금과 각종 율법에서 할당한 종교적인 의무를 감당하느라 다른 사람들을 돌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제 코가 석자이기 때문이지요. 

 

 바리새인들은 로마의 관원, 세리 같은 직업을 갖지 않고 어떻게 재물을 쌓을 수 있었을까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1)

 

 예나 지금이나 돈은 ‘사람’에게서 납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그들의 재물과 권력을 얻기 위해서 사람들을 이용할 줄 알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마케팅과 세일즈의 천재들이었던 것이지요. 이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도록 행동을 했습니다. 율법에서 규정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나눔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현명한 투자로 바꾸었습니다. 구제를 하는 것 같지만 이를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지요.

 

 물론, 어떤 사람들은 정말 선량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겠지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재물은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돈을 버는 재능도 공동체를 섬기는 ‘은사’로 봅니다. 그래서 균등하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구제’는 내게 주신 은사를 통해 공동체와 하나님을 섬기는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2-4)

 

 구제할 때에는 사람들이 모르고, 하나님만 아시도록 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입니다. 그래서 개혁교단 중에 구세군은 연말이 되면, 냄비를 준비해서 모금을 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나눕니다. 어떠한 사람이 얼마만큼의 돈을 내었는지 밝히지 않고, 지방자치 단체와 잘 협력해서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고 잘하는 것입니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5)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을 예수님이 대체로 ‘외식하는 자’로 봅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셔야 하는데, 이들은 사람들이 보는데서 큰 소리로 외칩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기고, 귀찮게 여기고, 신경도 안 쓰겠지만, 종교적인 민족인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이 신령한 자인 것처럼 생각하고 따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목회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큰 소리’로 기도한다고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조용 조용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못 들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를 오해합니다. 많은 경우, 혼자 떠들고 내 요구 조건을 말하는 것이 기도라고 생각한느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할 말만 다 하고 기도 끝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아무 말씀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때론 침묵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을 앞에 놓고 하나님도 잘 모르면서 대화가 될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을 ‘중매쟁이’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회 사이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설명하고 여성과 남성이 마치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는 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속삭입니다. 그런데, 중매쟁이의 말을 오해해서 잘못 받아들이면 원만하게 교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남 전에 사전 지식이 필요하고 경우에 맞는 예절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분이시기 때문에 어떻게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아주 핵심적이면서 요약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6)

 

 먼저는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하면, 다른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기 골방은 예시로 든 것이고, 예수님은 한적한 산에 오르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꼭 산이 아니라도 골방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좋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나 믿음의 선배들은 새벽 시간을 택하였습니다. 장소 보다, 오직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선택한 것이지요.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7)

 

 우리들이 실수하는 것이 하나님은 자주 같은 말을 해야 잊어버리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잊어버리니까, 하나님도 잘 잊어버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천만에 만만에 입니다. 우리는 혹시 잊어버려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8)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한 것을 먼저 살피십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손길을 통해서 얻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기도로 구해야 할까요? 그 기도문의 예를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십니다. 이른 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주기도라고 하지요. 9절부터 13절까지 말씀이 우리가 늘 하는 주기도의 원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9-10)

 

 하나님께 기도를 올릴 때, 먼저 아버지를 부릅니다. 우리가 누구와 대화를 시작하려고 할 때, 이름을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대신 우리가 직접 이름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 부릅니다. 아이들은 ‘아빠’ 하고 부르면서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냥 아버지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육신의 아버지와 구별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면서 부릅니다. 

 

 신학적으로 ‘하늘’이 무엇이냐 여러가지 해석을 달고 할 수 있지만, 단순하게 넘어갑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대화이지 여기서 신학적 연구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먼저 아버지를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를 존귀히 여기고, 또 세상 사람들에게도 소중하고 아주 높게 기억되기를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사랑하고 존경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왕이신 나라. 이미 하늘과 온 피조물은 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만 유일하게 인간 만이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등지고 있는 상태였지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온 것입니다. 그 계획과 뜻은 하늘에서 이미 다 짜여져서 실행이 되었고,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복음이 흘러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과 사명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락 하에 지금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연결이 되어 있고, 우리가 간구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일이요 사명이며, 우리의 소명과 미래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1-12)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지만 우리가 요구하거나 요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단순히 ‘내게’ 달라는 간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되,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주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요청자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대리하는 공급자가 되기도 합니다. 

 

 어려운 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지구상에 항상 모든 인류에게 넉넉하게 먹을 양식과 물이나 공기 같은 것을 꾸준히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일부 그것을 독점하려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아와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항상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게 넘치게 주신 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리해서 필요한 우리의 형제들에게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소수의 사람들이 물질을 관리할까요? 

 

 어려운 신학적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메리카 광활한 대륙의 인디언들이 살 때에는 아주 소규모 농업과 유목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 넓은 땅을 개간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 광활한 대지에 농사를 짓지 않고 자기들만 먹을 것을 조금 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는 온 지구적으로 양식이 유통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그 넓은 땅을 경작할 욕심(?)있는 사람들도 필요한 것입니다. 

 

 소수의 뛰어난 관리자가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항상 형제들(?)의 필요를 잘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뛰어난 재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경제발전을 할 때, 대다수의 국민들이 학벌이 좋고, 모두 기업을 일으켜서 된 것이 아닙니다. 소수의 엘리트가 국가적 자본을 집중하여서 산업을 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재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 재벌들이 나라의 부를 늘렸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국민들이 공장에서 일하면서 재벌들은 더 부자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직장인들은 모두 가난해졌습니까?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비교를 해서 그렇지 절대 빈곤은 거의 다 사라졌습니다. 

 

 자원이 독점이 되고, 일부의 소수의 사람들이 모든 부를 차지하는 것 같지만, 또 멀지 않아서 하나님께서 그 부를 흩어서 가난한 사람들도 살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말고, 내게 넘치는 것이 있으면 혹시 모자란 우리의 형제들을 생각하며 나눌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 기도에는 그런 하나님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누지 못하고 욕심을 부릴 때, 죄가 되지요. 12절 나오는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한다는 의미는 원어로 보면, ‘빚을 탕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모두 돈으로 계산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과나 잘못을 인정하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피해를 돈으로 보상하는 요구를 많이 합니다. 이혼 소송에도 문제가 되는 것은 양육비와 위자료 문제이고, 거의 모든 재판에서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보상입니다. 

 

 성도들이 빚 탕감에 적극적으로 호응을 하면, 아마도 이 사회가 돈 때문에 얽히고 섥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돈문제를 용서해 주었는데, 실질적인 ‘죄’의 문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탕감해 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3)

 

 우리는 모두 연약한 존재입니다. 사실 약점들이 다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에 노예가 되어 있고, 어떤 사람은 중독의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경우 악한 영에 눌려서, 사탄이 원하고 기뻐하는 우상 숭배와 자기 자신을 믿는 교만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가 없으면, 죄 가운데 빠지기 쉽고, 악을 행하다가 심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도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죄악에 빠질 유혹과 범죄함에 참여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사탄의 종노릇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망과 죽음을 두려워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죄 가운데 빠집니다. 이것을 극복할 힘과 의지는 우리에게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와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항상 아버지께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때로는 사탄이 가지고 있는 듯 보이고, 세상의 권력자들이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진실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하면, 아주 훌륭한 기도입니다. 이 보다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병들었으면 건강함을 되찾기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우리가 미련하기 때문에 지혜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도에 앞서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고 항상 정성을 다해서 모시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알려 주시고 덧붙이시는 설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못하는 것들이지요.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항상 부족합니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다시 부연 설명해 주십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14-15)

 

 우리가 한 번 자신을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세요. 가장 불만인 것이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그것이 형제 자매일 수 있고, 때로는 부모님께, 친구 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거의 90% 이상이 여기에 걸릴 것입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용서가 잘 안 되지요. 대부분이 오해와 편견과 잘못 생각하기 때문인데, 마음 속에는 증오심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처럼 용서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우리가 지옥가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아주 아주 고통스런 죽음을 맞으신 것은 ‘내 죄’를 용서하시려고 하신 것인데, 우리는 그만큼은 고통을 당하지는 않지 않았습니까? 아주 사소하고 조그마한 일로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죄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놓고 기도하십시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16-18) 

 

 우리들이 금식을 많이 오해합니다. 어떤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금식하는 것은 정말 잘못하는 것입니다. 아들이 단식하면서 아버지께 농성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을 기뻐할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말씀의 맥락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금식해야 할 상황은 정말 내 속의 ‘죄’의 문제 때문에 형제 용서가 되지 않고, 악행이 안 끊어질 때 하는 것입니다. 즉, 회개를 위한 금식(禁食)입니다. 하나님께 무슨 요구사항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해서 분이 안 풀리고 계속 미움이, 증오가 쌓이는데, 밥 먹고 힘이 있어 보세요. 그 힘 가지고 때리고 강포를 행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금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안 살아질 때 금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이 넘쳐나면 잘못 사용하기 쉽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자꾸 쌓기에 급급해 보세요. 다른 사람들은 다 굶는데, 자기만 부자가 되면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죄 밖에 더 짓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려면, 때로는 자산을 끊어내고, 돈을 빼서 다른 곳으로 흩어야 하겠지요. 

 

 그런 의미입니다. 우리가 굶어 봐야, 배고픈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도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비만이 안 되어야 하듯이 영적으로도 비만이 되면 안 됩니다. 물질적으로도 나만 너무 배를 채우면 안 됩니다. 관리를 해야 할 때는 하더라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난해 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몸이 병이 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건강한 몸 가지고 주의 일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으로 죄를 더 열심히 짓는 사람들은 그러다가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텐데, 그 전에 힘을 빼 놓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유대인들은 ‘금식’ 이 무슨 경건을 나타내는 척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습관적으로 금식을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척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진실로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정말 의롭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자 할 때에는 금식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무슨 자랑거리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19-21) 

 

 여기서부터 6장의 마지막까지는 대부분 물질에 대한 교훈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가장 신뢰하고 믿는 것은 ‘돈’입니다. 이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항상 여러 제국으로부터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페르시아와 그리스, 그리고 예수 시대의 로마까지 그렇게 수백 년 동안 계속해서 자기들의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메시야를 기다리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 혹시나 자신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다윗시대처럼 강성하고 솔로몬 시대처럼 부요한 나라를 이루게 하실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런 신앙이 퇴색되어 갑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야훼 신앙을 가진 것 같으면서도 그들이 언제나 의지했던 것은 돈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제국 시대에나 뇌물은 잘 통용이 되었고,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은 어떤 신이 아니라 ‘돈’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어떻게 해서든 돈을 모으려고 했고, 돈으로 권세를 얻고자 했습니다. 거기에 성공한 사람들이 일부 사두개인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도 섬기지만, 실질적으로는 돈을 최고의 우상으로 섬깁니다. 또 유대인들은 부자는 모두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큰 부자, 야곱도 부자,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까지 지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부’는 곧 하나님의 축복이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믿었습니다.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도 그렇게 믿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물질관은 전혀 다릅니다. ‘물질’ 그저 수단일 뿐입니다. 전혀 숭배해야 할 대상도 아닐 뿐더러, 쌓아서 모아들여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도구일 뿐입니다. 참, 오늘날 교인들이 믿고 순종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결코 돈이 네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24)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큰 시험꺼리가 ‘돈’이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대부분의 염려와 근심거리가 ‘돈’에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구하는 것이 단순히 ‘물질’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에 우리의 관심과 주의가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31-34)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계속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들과 같다면, 우리는 정말로 ‘외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 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으로부터 공급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아름다운 보화를 쌓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결핍이 오히려 축복임을 알고, 항상 기뻐하며,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이웃들 중에 헐벗고 굶주린 자들이 사라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나누고 섬기며 용서함으로 우리를 통해서 화목이 있고,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고, 자유함이 넘치는 그런 아름다운 공동체가 이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나누면서, 생색을 내고 자랑하지는 않았는지요. 항상 겸손하고 기쁨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나누게 하옵소서! 우리를 통해서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이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주님! 기도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항상 내 뜻과 내 생각이 앞섰는데, 하나님의 이름과 아버지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의 사역이 우리를 통해서 우리의 가정과 이웃과 사회에 실현되고 열매맺게 하옵소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고 준비된 일군이 되게 하옵소서! 

 

 욕심과 이기적인 생각으로 죄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며, 욕심에 매여 살지 않도록 도와 주옵소서! 세상의 부요함보다 하나님 나라에 보화를 쌓는 바른 안목을 주시고, 기쁨으로 그 길을 가게 하옵소서! 세상은 물질을 숭배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죄와 악의 유혹에서 건져 주옵소서! 감사하며 존귀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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